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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씨앗문장 | 붓다와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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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길 작성일17-11-29 08:26 조회3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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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며

가꾸어지더라도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생각하건대 거만하거나 남을 업신여긴다면,

통찰이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붓다를 극도의 허무주의자로 묘사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두목은 두 권의 책을 쓰는데, 한 권은 붓다에 대해서이고 또 한 권은 조르바에 대해서이다. 불교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마음을 지닌 두목은 원고와 씨름을 한다. 그러다 생명력 넘치는 사내 조르바를 만나고 붓다의 정체를 확연히 깨닫는다. 붓다는 생의 반대, 추상적 관념의 화신이었다. 본디 인간은 거칠며 불순한 것”,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명이란 그러한 것임을 조르바에게 배운 것이다. 이제 그의 글쓰기는 이 위대한 부정(否定)”과 결투가 되었다. 붓다에게서 조르바로! 아마도 이것은 작가 카잔차키스의 사상적 편력, 혹은 전투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붓다가 허무주의자라고?! 나 역시 조르바에게 홀딱 반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조르바를 읽다가 우리(?) 붓다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구!’라며 혼자 발끈하게 된다.^^;;; 그러다가도 위와 같은 경을 만나면 하아.. 이거 오해를 살만도 하다는 마음이 든다. 악취에 오물이 흘러나오는 부정한 이런 몸뚱이라니ㅠㅠ 그렇다면 불교란 어딘가 약간은 생을 부정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하물며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가 생은 고()” 아니던가.

 

이 경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여중생 때의 고민이 떠올랐다. 막 생리를 시작했던 그때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다. ‘생리 기간에 혹시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수술을 하든 응급처치를 하든 그러면 피 묻은 생리대가 보이잖아?’ 심각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긴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생리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성찰했겠지만. 언젠가 사람이 죽을 때는 똥 오줌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그야말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잔차키스도 붓다도 철없는 여중생도 생명이란 불순한 것임을 알았다. 여중생과 카잔차키스는 생명의 불순함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썼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 기저에는 혹시 생 자체를 더럽고 처치 곤란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붓다는 거꾸로다. 이 불순함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더럽다 보는 것이다. 너무 이뻐서 사람 같지 않은 요즘 아이돌도 피와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위대한 부정부르든 어쩌든 중요한 것은 그 효과일 것이다. 이러한 직시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거만과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버릴 수 있다. 약간 허탈하다. 겸손하라는 말로 들려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도덕적 태도에 대한 얘기가 아닐 것이다. 거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무아를 깨달아야 가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부정관은 무아(無我)를 깨닫기 위한 방편이다. 생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카잔차키스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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