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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되기 | 꼰대와 방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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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03-31 07:00 조회3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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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방임 사이





 권미옥 (4조)




말을 좀 해 봐! 이게 최선을 다한 거야?


거실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에 잠깐 쉬려고 누웠다 든 낮잠이 깼다. 나와 보니 올해 고등학생이 된 둘째 아이를 앞에 두고 남편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남편의 얘기는 잔소리였다가 훈계가 되었다가 마침내  푸념으로 이어진다. 남자아이인 둘째는 초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 했다. 중학교부터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더 심해지고 있다. 왜 그러냐는 내 말에 남편이 2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를 내밀었다. 과학 외에 모든 과목에서 뚝 떨어진 성적은 국사 26점이라는 사건까지 더 했다. 시험공부를 안 했나 보다. 큰 아이보다 훨씬 공부를 잘 해서 남편의 기대가 높기도 했지만, 노력을 전혀 안 한다며 남편은 화를 냈다.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지금부터 다른 걸 준비하든가!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 할 것 아냐?”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 같은 공간에 있으니 나까지 덩달아 혼나는 기분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끼어들었다. 야단친다고 공부하진 않는다고.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게 하자고. 남편은 화를 삭이면서 자기만 늘 악역을 맡는다고, 이제 일도 그만뒀으니 아이 교육문제를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이는 대학에 꼭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공부를 해야 하는 건지, 아빠는 왜 뭘 전공할지 정하라고 하는 건지,  학원 갔다가 밤에 오는 게 너무 지친다고 했다. 대학에 안 갈 거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단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공부하기 싫은 거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하고 싶은 게 없을 수 있지? 어릴 땐 이렇지 않았는데 얘가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거지? 공부에 대한 잔소리 별로 않고 자유롭게 키웠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바닥은 ‘고생을 전혀 안 해봐서 동기도 없고 나약한 거야.’였다. 나도 별수 없는 꼰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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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에 안 가고 돈을 벌겠다고 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언니는 펄쩍 뛰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자기처럼 그렇게 되게 하진 않겠다고. 무조건 고등학교는 가야 한다고. 언니의 성화에 마지못해 시험을 보고 나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자립하고 싶었다. 가출이든 자취든 그 방식이 뭐든 간에.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갑갑한 집과 물에 고인 듯 생동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던 내가 사는 지방 관광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돈 벌기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요즘처럼 아르바이트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봉제 공장 시다 일을 했다. 겨우 3일 일을 하고 쉬던 일요일, 호된 몸살을 앓았다. 이를 악물고 두 달을 채우고 나서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다.

 

대학을 안 가고 살아갈 길이 없을까 내내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성당에 빠져있던 1학년 땐 수녀가 될까 했다. 어디 외국에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도시에서 산다면 아마 고만고만한 회사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시집이나 가야 할 게 뻔했다. 막막했지만 헤매는 것 말곤 할 게 없었고 그사이 성적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은 대학입시 시험뿐이었다. 2학년 겨울방학부터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세상에 대학 학력고사 밖에 없는 것처럼 살았다. 내신 등급을 원래대로 올렸고, 시험을 치렀다. 엄마는 내가 돈을 벌기를 바랐지만 다음 해 나는 집에서 가장 먼 도시인 서울의 대학으로 왔다. 그 속사정이야 말할 수 없이 고달팠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던 자립을 마침내 해냈다.   

 

큰 아이가 꼬맹이였던 90년대 말,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놀지 않았다. 강남을 중심으로 조기 영어교육 바람이 휩쓸던 때였다. 한글 익히기나 산수 공부를 시키지 않는 어린이집은 아예 없었다.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고 싶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을 만나게 되어 ‘육아 품앗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걸음은 ‘공동육아 어린이집’ 만들게 했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갈 나이가 되자 자연스럽게 대안교육활동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가득 했던 8여년의 대안교육활동은 ‘입시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그 내용이 뭐든지 아이가 자신 스스로 부딪쳐서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로 마무리했다. 아이에게 정보력 짱짱한 매니저 엄마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놀며 자랐다. 잔소리나 간섭을 최대한 적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부모가 살아가는 태도를 통해서 아이들은 배운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막연하고 무모한 믿음이었다. 아이들은 대학으로만 뻗은 일직선의 삶 속에서 무기력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한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나름 건강한 교육관을 가졌다는 명분 뒤에 숨어 어떤 순간 아이들을 방임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 동안 비록 방향은 달랐지만 남편은 아이들에게 자기의 방식으로 부지런히 소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만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꼰대가 되어 버리곤 한다. 

  

며칠 후, 약속한 시간에 아이가 얘기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일이 학교 다닌 거 밖에 없는데 그만두긴 어떻게 그만둬. 다시 공부해 볼게. 대신 학원 하나는 그만 뒀으면 좋겠어. 피곤하기만 하고 별로 도움이 안 돼” 

  

바로 학원을 그만두는 걸로 했다. 나는 대신 몇 가지 습관 바꾸지를 제안했다. 스마트폰 하느라 늦게 잠드는 거 바꾸기, 아침에 눈썹을 다듬고 꾸미느라 꾸물거리는 시간 줄이기, 밤늦게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거 줄이기. 아이는 받아들였고, 완벽하지 않지만 대체로 약속한 것을 지키고 있다. 

 

이 시간을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내는 방법이 뭔지 아직 모르겠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내 질문은 계속 겉돌고 있다. 꼰대와 방임 사이의 먼 거리 어디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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