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자 > 글쓰기의 달인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10/21 일요일
음력 2018/9/13

절기

글쓰기의 달인

루쉰-되기 | 비겁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MVQ 작성일18-04-21 07:00 조회321회 댓글0건

본문



비겁자

 




박기보 (5조)

 

넉 달여의 병가를 끝내고 돌아온 회사는 어색하기만 하다. 많던 업무는 팀원들과 나누었고, 원하던 업무도 가져왔건만, 헛헛한 마음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해본다. 그동안 별일 없었냐는 내 미끼를 덥석 문 직원이 ‘선생님만 알고 있어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졸의 수습직원 A가 업무가 힘드니 바꿔 달라며 과장님을 찾아갔고, 과장님이 A에게 정식직원이 아니니 그런 일이라면 지청장님을 찾아가라고 해, A가 지청장님까지 찾아갔다는 이야기였다. ‘우와, 당돌하다. 무슨 깡으로 그런 거래~’ 과장된 리액션을 하며 상대방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나.

  

며칠 뒤, 갓 스물이 된 A를 아기라고 부르는 같은 팀 H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그 얘기 들었어요?” “뭐?” H가 관심을 보인다

 

“A가 민원 업무 못 하겠다고 업무 바꿔 달라며 과장님을 찾아갔대요.” “진짜?” H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신이 났다.

  

“네!! 그런데, 과장님이 당신 말고 지청장님한테 말하라고 해서 지청장님도 찾아 갔대요!!” “정말?” “네!! 그랬대요.” “업무 얼마나 했다고? 요즘 그 팀 사람도 많아서 힘들지도 않을 텐데… A 대단하다.” “그러니까요! 진짜 대단하죠?!!” 못 믿겠다는 듯 자꾸 진짜냐고 묻는 H의 말에 마치 그 장면을 본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지만, 스멀스멀 의심이 올라왔다.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더욱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퍼진 묘한 승리감이 일말의 의심을 지워버렸다.

  

얼마 후, 관사에서 같이 사는 S가 묻는다.

  

“샘! A가 업무 바꿔 달라고 지청장님 찾아갔었다면서요?! 맞아요?” “어? 어... 누구한테 들었어?” 애써 지워버렸던 의심이 당혹감으로 변한다.

  

“H샘이 샘한테 들었다면서 얘기해줬어요. 나 그 얘기 듣고 A한테 완전 배신감 들었잖아! 걔는 평소에 번호표도 안 누르면서! 샘은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요?” “어? 누구한테 들었더라? 나 요즘 치매잖아. 아무튼 A가 그랬대.” 대충 얼버무리며 진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S의 질문은 은근슬쩍 넘기고, A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며 분노하는 S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제 마무리. “S야, 이거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 꼭이야!!” S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A가 나에게 따지면 어떻게 하지? 나도 들은 이야기라고 딱 잡아떼면 되지. 그런데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S가 말 안 하겠지 하며 억지 잠을 청했다.

  

다음날, 휴게실에서 A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눈을 피하며 가벼운 목례만 하며 얼른 휴게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눈은 A를 쫓고 있었다. 혹시라도 A에게 그 얘기가 전해질까 싶어서…

 

 

74bc4198b958fd3d38dde77b5797c6f8_1522670

 

 

사실 나도 A처럼 과장님을 찾아갔었다. 팀장님, H와 상의하여 결정한 업무 분장이 과장님의 의사로 뒤집어져, 씻을 새도 없이 떡이 진 머리를 질끈 묶고 헐레벌떡 회사로 달려갔다. 팀원이 충원되어 휴직 전보다 업무량은 줄었지만 하기 싫은 업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못 해낼 것 같고 책임져야 할 게 많은 업무라 하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제 능력이 부족하니 바꿔주십시오’라는 말로 스스로를 낮추는 척했다.

  

이 일은 복직 후에도 잊어지지가 않았다.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낙인은 스스로 새긴 것이었다. 병에 걸린 것을 알자마자 병가를 낸 것은 몸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었기에, 나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 맞았다. 아픈 사람이라는 보호막 아래 내 이기심을 숨기고 있었을 뿐. 그리고 일이 힘들다고 소문난 회사의 분위기 덕에 병가를 핑계로 도망친 나의 행동은 오히려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인 양 포장될 수 있었다.

  

병가 전 나는 윗사람에게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여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싶은 마음에 과장님께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을 조정해달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나를 평가할 권한이 없는 팀장님과 H에게만 힘들다고 징징댔을 뿐. 그러면서 과장님이 인원을 충원해주지 않아 몸을 혹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그 대가로 나는 승진과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면서… 결국 병은 내 욕심 때문에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병이 나서도 욕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복직 후 말로는 몇 개월간의 공부로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쉬는 중 승진에서 누락됐지만 아주 괜찮은 척―허세를 부리지만, 속으로 휴직으로 다음번 승진에도 누락될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리고 A가 한 행동을 떠벌리면서, 내가 휴직 중 과장님을 찾아간 일과 병을 핑계로 회사에서 도망친 일이 잊히기를 바랐다. A가 어떤 마음으로 과장님과 지청장님을 찾아가 힘들다고 업무를 바꿔 달라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A를 힘들지도 않은 상황에서 힘들다고 하는 개념 없는 요즘 것들로 만들고, 난 회사 때문에 병을 얻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A와 다르다고 선언하고 싶었다. H와의 대화에서 느낀 묘한 승리감은 그 선언이 먹혀들었다는 착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H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 H는 나의 병가로 인한 팀의 인력 부족은 회사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은 정확치도 않은 일을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이 A의 귀에 들어갈까 전전긍긍하는 내 비겁한 모습뿐이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