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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 여태후의 재발견, 권력은 잔인하게! 정치는 너그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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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9-01-19 11:37 조회1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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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 발견, 

권력 잔인하게! 

정치 너그럽게

 

 

 

 


박 장 금

 

야심찬 정치가, 여태후

 

한서는 12왕조를 그리고 있다. 1년이 12달이고 매 월은 균질한 달이 아니듯 한서에서도 사계절의 변화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서의 역사는 발전이나 성장의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 자체로 사계절의 흐름을 드러내면서 생노병사의 흐름을 밟고 있다. 고조가 한나라를 건국했고 그리고 두 번째로 혜제가, 세 번째 등장은 고후기로 여태후가 등장한다. 여기까지가 초봄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문제와 경제로 늦봄이 이어진다. 

 

여태후는 왕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을 한 탓에 사기에서는 혜제를 제치고 등장했다. 한서는 혜제를 왕의 자리에 복귀시켰지만 여태후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역할은 한나라 역사에서 가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몇 개만 짚어 봐도 알 수 있다. 고조를 도와 한나라를 건국했고 앞을 내다보고 한신과 팽월을 제거하는데 일조할 정도로 혜안을 가졌다. 그녀는 한나라 건국과 유지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여후는 강직하고 굳센 사람이라서 고조의 천하 평정에 도움을 주었고 두 오빠가 장수로 고조의 정벌에 수행하였다.

- 「외척전」, 『한서』 9권, 명문당, 422쪽

여태후는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만큼 정치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혜제를 세운 것도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였다. 혜제는 성품이 좋은 아들이었지만 정치판에서 살아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척 부인에 대한 잔혹함은 단순한 질투심은 아니었다. 천하 지배를 위해 도전하는 자에 대한 응징이었다. 척 부인이 아들 여의를 내세워 설친다면 한나라는 여기서 끝장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뜨악할 정도의 혹독함을 보여야 신생 왕국 한나라가 유지될 수 있다는 계산을 여태후는 했을 것이다. 고조가 아무리 여의를 태자로 책봉하려 해도 적장자 원칙으로 인해 고조조차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공신들은 고후의 권력 장악은 원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혜제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고 그녀는 그런 흐름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정치적 지략이 있는 여장부였다. 

 

고조는 척 부인에게 마음이 쏠려 잠시 판단이 흐려졌지만 공신들의 말을 끝내 들었기에 혜제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여후의 권력 장악 욕망과 맞닿아 있지만 한 나라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태후의 공적이 부각되기보다 악녀로 이름난 것은 척 부인을 돼지로 만들어 아들 혜제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약한 혜제에게 충격을 가해 정치포기를 유도했다고 말한다. 이 사건에 좀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여태후가 처음부터 앙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자극한 것은 척 부인이다. 고조가 죽고 죄수가 된 척 부인은 “아들은 왕이나 어미는 죄수라”며 떠벌렸고, 여태후는 권력을 흔드는 싹을 뿌리 뽑기 위해 여의를 독살하고 척 부인을 끔찍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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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장에서는 살아남지 않으면 죽는다!

 

 

여태후가 변태 아닌 다음에야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굳이 혜제에게 보일 이유가 있었겠는가. 다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것이다. 피 튀기는 정치판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죽는다.(는 게 여후가 목격한 정치판의 생리였다.) 척 부인이 쥐 죽은 듯 있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척 부인은 까불었고 여후는 강한 힘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정치판의 성격을 모르고 착하기만 한 혜제를 단련시킬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여후의 심정도 모르고 심성 여린 혜제는 척 부인을 보고 충격을 받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병사한다. 보위에 오른 지 7년만이다. 여태후는 혜제를 강한 아들로 키우기 위해 척 부인을 노출시켰지만 혜제는 그것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고후는 천하 통치를 위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해 오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씨의 모든 싹을 제거하라

 

여태후는 혜제를 내세워 천하를 쥐락펴락하고자 했다. 아들 혜제라도 자신의 권력을 위협했다면 모를까 보호막인 혜제를 죽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혜제가 죽자 여후는 불안했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여씨 천하를 기획한다. 고후가 척부인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여의를 앞세워 안위를 구할 뿐 통치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후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시야와 그것을 주무를 수 있는 결단력이 있는 여걸이었다. 

 

혜제 후궁의 소생을 제위에 올리고 태후가 조회하며 칭제하였다. 이후로 고조 아들인 조 유왕 유우, 공왕 유회 및 연왕 유건의 아들을 죽였다. 이어 주여후(주택)의 아들 여태를 여왕으로, 여태의 동생 여산을 양왕에 봉하였고, 건성후 여석지의 아들 여록을 조왕에, 여태의 아들 여통을 연왕으로 삼으니 여씨 일족으로 6인이 모두 열후가 되었으며, 여태후 선친 여공을 여선왕으로, 주여후를 도무왕으로 추존하였다.

외척전」, 『한서』 9권, 명문당, 425~426쪽

그녀는 여씨 천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치밀하게 그리고 조용히 실행한다. 혜제가 죽은 후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혜제 부인인 장 황후에게 거짓 임신한 척 하게 하여 후궁 미인의 자식을 태자로 삼았다. 증거 인멸을 위해 생모를 죽였는데 나중에 황제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황후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고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제를 정신병자로 몰아 폐위시키고 몰래 죽인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 혜제의 다른 아들 유의를 아바타로 세우고 직권을 행사한다. 고후는 자기 눈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조처했다. 여왕인 여가를 생활 태도가 교만방자하다고 폐위시키고 조카 여산(呂産)을 바로 여왕(呂王)으로 삼았다. 

 

고후의 권력 확장을 위한 만행은 멈출 줄 몰랐다. 고후 7년 조왕(趙王)인 유방의 여섯 번째 아들 유우(劉友)는 여씨 황후를 총애하지 않고 후궁을 사랑하자 황후는 질투심에 몸부림치며 고후에게 유우가 죽으면 여씨 일족을 몰살하겠다고 했다며 모함한다. 고후는 진의 여부와 상관없이 유우를 즉각 불러들인 후 감금하여 굶어 죽인다. 유우는 원한에 사무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다.  

 

여 씨 일족이 전권을 휘두르니 유 씨가 위태롭구나. 왕후를 협박하고 강제로 여 씨의 딸을 왕비로 주었네. 왕비가 질투하여 나를 모함하니 참언하는 여자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건만 황상께선 깨닫지 못하시네. 내게는 충신이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라를 잃어버렸는가? 황야에서 자결하나니 푸른 하늘이 시비를 가려주리라. 아아! 후회막급이로다. 차라리 진작 자결할 것을. 왕이 되어 굶어죽다니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리요? 여 씨가 천리(天理)를 끊었으니 하늘이 이 원수를 갚아주길 바라노라.

- 「여태후본기」, 『사기본기』 , 까치, 312~313쪽

조왕이 감금된 채로 굶어 죽자 고후는 후사를 없애기 위해 왕위를 박탈하여 평민의 예로 장사를 치렀다. 또한 고조의 다섯째 아들인 유회(劉恢)를 조왕으로 삼고 여산(呂産)의 딸과 결혼시켰다. 유회는 여씨에 둘러싸여 감시를 당해야 했고 아끼던 희첩마저 독살을 당하자 원한에 사무쳐서 죽는다. 그러자 고후는 유회가 첩에게 정신이 팔려 종묘사직의 예를 버렸다고 트집을 잡아 왕위계승권을 취소시킨다. 고후는 고조의 넷째 아들인 유항(劉恒)을 조왕으로 봉하려고 했으나 유항은 무조건 사양한다. 척 부인 아들 유여의, 유우, 유회 등 고조의 자손들이 조왕만 되면 줄줄이 죽어 나가는데 누가 그곳에 가려고 하겠는가. 결국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자 신하들은 고후 입맛에 맞는 여씨를 추천하였고 고후는 마지못해 봉하는 척 하며 둘째 오빠 여석지의 아들 여록(呂祿)을 조왕에 봉한다. 그해 고조의 막내아들 유건(劉建)이 사망하자 유씨의 씨를 말리기 위해 후손을 모두 죽이고 봉국을 취소했다. 고후 8년 조카 여태(呂台)의 아들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봉하고. 여통의 동생 여장(呂莊)을 동평후(東平侯)에 봉하였다. 고후는 유씨의 싹을 제거하는 동시에 여씨 왕을 줄줄이 배출하고 있었다. 여왕(呂王)에 여산(呂産)을, 조왕에 여록(呂祿)을, 연왕(燕王)에 여통(呂通)을 등. 하지만 혜제 7년을 지나, 고후 섭정 8년 만에 천하의 고후도 죽음을 맞는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고후는 죽으면서까지 여씨 천하에 대한 강한 욕망을 보였지만 남은 여씨 일족이 그것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고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이다’라고 맹약하였거늘, 지금 여씨가 왕이 되었으니 대신들은 마음속으로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은 아마 난을 일으킬 것이니, 그대들은 반드시 병권을 장악하여 황궁을 지키고 나를 위해서 장사 지내지 말며, 사람들에게 제압당하지 않도록 하오.

- 「여태후본기」, 『사기본기』 , 까치, 315~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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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정치 판세를 읽었던 여걸, 여태후

 

 

고후는 대신들이 고조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신의 카리스마에 눌려 참았을 뿐, 자발적 복종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여씨 일족에게 제발 장사 지낼 생각 말고 병권을 지키라는 고후의 유언. 죽으면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고후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이 정도 정치 판세를 읽고 죽기는 쉽지 않다. 고후는 병권이 정권 장악의 핵심임을 꿰뚫고 있었다. 병권을 손에 쥐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록과 여산은 그것을 지킬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 고후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여씨 천하가 고후의 죽음이후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만나보기로 하자. 

 

 

 

고후의 죽음, 여씨 일족의 몰락

 

당시 궁궐과 수도 장안성을 수비하기 위해 남군과 북군이 있었고 고후의 조카 여록과 여산이 총 책임자였다. 고후가 죽고 그들은 대신들이 반란할까봐 여씨들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공신인 진평, 주발, 관영 등이 버티고 있어서 주춤하는 중이었다. 고조의 큰 아들 유비(劉肥)의 둘째 아들 유양의 동생인 유장(劉章)은 기백과 능력이 남달랐는데 부인이 여록의 딸로 여씨 일족의 반란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여씨 대 대신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 

 

솔직히 여록과 여산은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대신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록은 부귀를 좋아하는 인물이었고, 여산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진평은 그들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군사 책임자인 태위(太尉) 주발이 진평에게 병권 장악에 대한 의논을하자 진평은 계책을 내놓다. 역상(酈商)의 아들 역기(酈寄)가 여록과 친한 것을 알고 여록을 속여 병권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설득한 것이다.  

 

고제와 여후는 함께 천하를 평정하셨고 유 씨에서 9명, 여 씨에서 3명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들이 합의한 것으로 제후들도 모두 이를 마땅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태후께서 서거하시고 황제의 나이는 아직 어리신데 족하(足下)께서는 조왕(趙王)의 인수(印綬)를 받고도 봉국에 가서 봉지를 지키는 대신 상장군(上將軍)의 신분으로 병사들을 인솔해 이곳에 머물러 계시니 많은 대신과 제후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족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상장군의 인수를 반환해 태위에게 병권을 돌려주지 않으십니까? 청컨대 양왕(梁王)께서도 상국의 인수를 반환해 대신들과 맹약하고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나라에서도 틀림없이 병사를 거두고 대신들도 안심할 것입니다.

- 「고후기」, 『한서』 1권, 명문당, 194쪽

역기가 여록을 설득한 논리는 이런 것이다. 대신들은 여씨 일족이 왕이 된 것에 의심이 없다는 것. 그런데 왜 병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는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대신들이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대신들의 의심을 풀어주려면 병권을 반환하라는 것이다. 역기가 듣기에는 그럴듯한 논리였다. 진평 등 공신들은 지금까지 고후를 섬겼는데 여후가 죽었다고 다른 마음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고후의 유언이 있긴 했지만 늙고 병든 고후가 예민하게 반응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여록은 싸우기가 싫었다.

진평은 그런 여록을 잘 알았고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줌으로써 병권을 자진해서 반납하게 만든 것이다. 여록은 역기의 말을 여씨 일족들에게 알렸으나 그들도 그럴듯하다고 여겨 의견이 분분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록은 역기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함께 놀러나갔다. 이렇게 여씨 남자들은 우왕좌왕하는데 여록의 고모 여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대번에 “너는 장수가 되어 군사를 버리려 하니 여씨는 이제 안주할 데가 없을 것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패물들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렸다. 여씨의 왕좌 게임이 끝났음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여씨 일족은 확실히 여성이 똑똑하다. 그렇다고 고후가 여수에게 병력을 장악하게는 할 수는 없으니 이런 게 운이 아닌가 싶다. 그 후에도 남은 병권을 잡은 여산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치게 되고 결국 주발은 북군을 장악했다. 그 후 주발과 유장은 협업을 통해 여산을 기습해서 죽였고 여씨 일족을 거의 몰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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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통일은 피바람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는 보통 고후가 여씨 천하를 만들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으니 그녀의 몰락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유방도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음모과 거짓을 일삼았다. 솔직히 한나라 공신 모두가 누군가를 죽이고 음해했으며 거짓을 말한 자들이다. 유방의 시대에는 천하가 어지러웠고 통일을 해야 하는 조건이 펼쳐졌다. 국가를 통일 한다는 것은 피바람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후의 시대는 한나라 초기이다. 그러므로 권력 내부에서 권력 장악을 위한 피바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고후는 여자지만 혜제를 내세워 권력 장악을 욕망했으니 피바람은 예고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고후가 나서지 않았다면 별 일이 없었을까. 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피바람을 불렀을 것이다. 워낙 고후가 강력했기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 덕분에 15년간 한나라는 안정기를 이룰 수 있었고 앞으로 벌어질 권력 다툼을 위한 문제적인 싹들이 제거될 수 있다.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고후는 초기에 악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악행 때문에 공적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권력은 잔인하게! 정치는 너그럽게! 


혜제 7년, 여태후 8년으로 이어지는 15년은 고후가 실권을 잡은 기간이다. 그녀는 실권을 잡고 황족ㆍ공신 등을 살해, 황실을 피로 물들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너그러웠다. 고후 원년 봄 정월에는 천하 죄인을 대 사면할 뿐 아니라 해제가 하지 못한 삼족죄(연좌)와 요언령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삼족죄란 죄를 지면 삼족을 멸하는 벌이다. 요언령은 무고죄로 유언비어 유포 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작심하고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자도 있지만 약간의 불만만 말해도 법령이 실행되니 백성들은 불만으로 꽉 차 있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 여태후는 과감하게 가혹한 법령을 폐지했다. 이렇듯 고후는 민심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법령 폐지를 실행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년 2월에는 백성의 작위를 하사하고 군주나 제상이 효성스러운 효자(孝弟)나 열심히 농사짓는 자(力田者)를 천거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그 해 여름 5월에는 왕궁 총대(叢臺)에 불이 났다고 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흥미롭다. “고후는 후궁의 아들 강을 회양왕에 봉하고, 불의를 항산왕, 홍을 양성후, 조를 지후, 무를 호관후에 봉했다.” 화재가 났는데 여후가 여전히 여씨를 이것 저곳에 심는 것을 한서는 포착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해 가을에는 복숭아 꽃(桃李)이 꽃을 피었다로 끝을 맺는다. 가을에 꽃이 피다니 분명 이변이다. 여후는 정치를 잘했지만 여씨 천하는 때에 맞지 않음을 한서는 자연의 이변을 통해 경고하고 있는 듯 하다. 

 

고후 2년에는 공신들에게 지위를 주고 세습하도록 명한다. 고후는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가혹했지만 백성에게나 신하들에게 너그러운 군주였다. 하지만 그해 자연은 지진과 산의 붕괴, 그리고 그믐 일식으로 자연의 이변은 계속 된다. 3년 여름에는 장강과 한수가 범람하여 4천여 호의 유민이 발생했다. 가을에는 낮에도 별이 보였다. 6년 봄에 별이 낮게 보였고 여름에 사면령을 내린다. 현령의 녹봉도 2천석으로 정하고 장릉에 성을 쌓는다. 오분전(五分錢)이라는 화폐도 발행한다. 

 

7년 유우를 굶어 죽이고 몇 칠 뒤 일식이 발생하자 낮에도 어두웠다. 한서와 사기는 모두 일식을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사기는 고후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후가 잘못을 고백하는 장면을 언급함으로써 여후의 권력 장악이 정당하지 않음을 슬쩍 암시하고 있다. 많은 유씨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9년 3월 중순 고후는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중에 검정색 개 같은 괴물이 보았는데 그것이 고후의 겨드랑이를 치고 사라진 후 병이 들었다. 검은 개가 여의의 귀신으로 언급하면서 고후가 두려워서 병이 들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이 내용도 사기에는 있으나 한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렇듯 사기와 한서가 고후를 기록하는 시선은 많이 다르다. 사기는 고후의 정치적인 면모보다는 유씨를 대신 여씨 천하를 이루고 싶은 권력욕에 대해 주목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사마천과 반고의 논찬은 모두 고후의 시대에 정치적 안정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기와 한서 모두 고후의 정치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서는 정치가 고후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혼란 속에서 통일이 되었고 이제는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나라 유지를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고 그 시점에 고후가 있었다. 만약 고후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권력 장악을 하지 않았다면 한나라를 뒤 엎고 권력을 장악하고 싶은 공신과 제후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진나라처럼 한나라도 바로 망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고조와 고후는 같은 피바람을 몰고 왔다. 단지 유방은 혼란기에 통일을 이루어야 했고 고후는 통일 후 안정이라는 목표가 달랐다. 통일된 후라 고후는 인정을 위해 권력층 내부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전쟁을 할 때는 사람을 죽여도 적이기 때문에 정당해 보이는 착시 효과가 있다. 하지만 권력 내부에서 사람을 죽이면 자국민을 죽이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죽이는 것 같아 보인다. 또 그 대상이 혈육이거나 가까운 관계에서 이루어지므로 더욱 인해 보인다. 잘 생각해보자. 전쟁과 권력의 피바람. 누가 더 살생을 많이 했을까. 전쟁의 피바람이 더 강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조에 대해서는 창업 군주로 높이고 고후는 잔인하다고 말한다. 잔인함으로 따지면 고조가 고후보다 더하면 더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고 조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다. 고조 때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 고후 또한 통일 후 권력을 장악해서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 있었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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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는 권력 안정을 위해 피바람을 일으켰지만, 정치에서는 달랐다

 

 

고후의 피바람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도, 한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부득이한 선택이었다는 것. 이렇듯 고후는 권력 장악 면에서는 잔인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사기와 한서 모두 고후의 시대를 무위의 정치이자 태평한 시대로 평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아무튼 고후는 대신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고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 앞서 보았듯이 한서는 고후기에서 '정치가 고후'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있다.

다음에 연재될 내용은 고후 시대의 신하들의 이야기이다. 공신이 없었다면 여태후도 없었고 한나라도 유지될 수 없었다. 서로 대립했지만 공존하면서 한나라는 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고조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여태후와 공존하면서도 한나라의 봄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노하우가 공개될 테니 기대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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