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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 한나라를 감싸는 훈훈한 바람, ‘양생’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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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9-02-02 10:00 조회1,1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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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를 감싸는 훈훈한 바람, 

‘양생’의 바람

 

 

 

 

 

 

 

 

길 진 숙

 

유방의 넷째 아들, 변방의 제후에서 황제로!

 

소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여태후가 죽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여씨의 한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여태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카 여산과 여록에게 천하를 지켜달라 당부했으나.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여씨 천하는 막을 내리고 만다. 태위 진평과 승상 주발은 여록에게 병권을 빼앗은 뒤 유장을 앞세워 여씨들을 제거하고, 소제와 3명의 동생을 비밀리에 모두 죽인다. 그리고 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자 박희의 소생인,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렇게 ‘문제’는 변방 대나라의 제후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인생사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운명의 엇갈림은 오묘하기 짝이 없다. 문제와 그 어머니의 인생이 그랬다. 고조 유방의 아들 8명 중 넷째인 유항은 여태후 소생도 아니요, 총애하는 후궁 소생도 아니었다. 유항의 어머니 박희는 진승의 반란기에 초나라 왕 위표의 직실(織室)에서 일하던 궁녀였다. 초나라를 점령했던 한왕 유방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1년간 동침 한 번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박희는 젊은 시절 관부인과 조자아라는 후궁과 친해서 먼저 부귀하게 되어도 서로를 잊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방의 총애를 받게 된 관부인과 조자아는 젊은 시절의 약속을 떠올리며 박희를 조롱했다. 유방은 이들이 비웃는 까닭을 듣고 오히려 박희를 불쌍히 여겨 그날 밤 박희를 불러 동침했다. 이때 박희가 꿈에서 용을 품었다고 아뢰자 유방은 높이 오를 징조니 그 뜻을 이루어주겠다고 했는데, 이 말대로 박희는 임신하여 대왕 유항을 낳았다. 유방의 연민으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인생사 도처 반전이란 바로 이런 것!  

 

예상하듯, 박희의 인생역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태후는 고조 유방이 죽은 뒤 척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보복했을 뿐만 아니라 고조의 총애를 받던 비빈들도 모두 궁에 가두어 버렸다. 박희는 이번에도 위기 탈출. 그 이유는 고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조와의 잠자리가 적었던 연유로 박희는 아들과 함께 안전하게 대나라로 갈 수 있었다. 고조의 총애를 받았다면 궁에 갇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사랑을 못 받아 천수를 누리게 된 이 역설! 모든 일이 그렇듯 멀리 보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게 아니다. 게다가 봉지도 변방의 대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주목받지 않아 안전하게 목숨을 지켰다. 고조 유방이 사랑을 주지 않은 덕분에 박희도 살고, 유항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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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유항) 인생사 도처 반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유혈의 난투극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던 박희와 유항 모자. 유항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어질고 겸손하게 대땅을 지킬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 이들 모자의 인생은 뜻하지 않게 또 한 번 역전한다. 진평과 주발이 여씨를 몰아내고 천하를 다시 유씨에게 이양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혜제의 소생은 없었기에 고조 유방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았다. 이때 고조 유방의 아들로 생존한 이는 넷째인 대왕 유항, 여덟째로 막내인 회남왕 유장 두 사람 뿐이었다. 진평과 주발을 비롯한 공신세력들은 나이가 많은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올리기로 결정한다. 덧붙여 대왕을 황제의 적임자로 내세운 또 하나의 이유는 어머니 박희의 조건 때문이었다. 박희의 어진 성품도 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천하를 위협할 수 있는 외척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신세력들은 여태후의 맹렬한 권력에의 의지와 이것을 받쳐주는 막강한 여씨 세력의 힘을 미워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황제 어머니의 조건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조건들을 따져 볼 때 유항이 적격이었다.

 

고조의 막내아들 유장은 유항보다 나이가 어려 황제로 옹립되지 못했던 것일까? 『한서』의 기록으로 보면 유장은 한나라를 지켜내기 힘든 인물로 보인다. 진평과 주발도 이미 파악했던 것이다. 유장이 어떤 인물인지 짚고 넘어가자. 

 

기억하기 쉽게 덧붙이자면, 유장은 『회남자』를 지은 유안의 아버지이다. 유장의 어머니는 조왕 장오의 후궁이었다. 조나라가 한나라에 정복되자 조왕은 유방에게 후궁을 바쳤는데, 이 후궁이 유장의 어머니이다. 이때 유장을 임신했는데, 조나라가 모반한다는 혐의를 받아 조왕과 더불어 그 비빈들이 모두 감금되면서 유장의 어머니도 함께 갇히게 되었다. 벽양후 심이기에게 고조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호소했지만 벽양후는 유장의 어머니를 구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 유장을 낳고는 벽양후에 대한 분노로 자살한다. 관리가 고조에게 유장을 데려가자 고조는 안타까워하면서 여태후에게 유장을 길러달라고 부탁한다. 여태후는 고조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후궁과 그 소생에 대해서는 관대했기에 유장을 아들로 받아들여 양육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유장은 여후와 혜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문제 또한 하나밖에 없는 동생 유장에 대한 총애가 지극했다. 

 

총애가 지나쳤던 것인지, 유장은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황제의 동생이자 측근으로 법을 자주 어기고, 황제의 수레를 같이 타고 사냥을 다녔다. 생모에 대한 복수를 위해 벽양후 심이기를 찾아가 쇠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수행원에게 목을 자르게 했다. 유장은 포악하고 잔인했고 교만했다. 물론 이 사건들은 문제 즉위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유장이 황제가 되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후와 혜제에게 총애를 받을 때부터 유장은 이미 교만했다. 또한 봉국인 회남으로 돌아가 왕으로 처신할 때도 방자하기 그지없었고, 법도를 준용하지 않았으며, 황제처럼 명령하고 출입할 때마다 길을 치우게 했다. 

 

문제는 동생 유장을 불쌍히 여겨 직접 꾸짖지 못하고 외삼촌 박소에게 부탁했다. 박소는 유장이 잘못을 깨우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유장은 반감을 갖고 사람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고 흉노를 끌어들이려 했다. 결국 폐위되어 촉의 엄도로 이송되는 중에 교만했던 행동을 후회하며 식음을 전폐하여 죽었다. 사실 문제는 동생 유장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장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유장의 어머니는 분노 때문에 자살했고, 유장은 비관으로 목숨을 끊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어머니와 아들. 유장에게 천하를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하의 대권은 유항에게로 향했다. 인물은 인물이었다. 유항은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널리 조언을 구했고, 점을 쳐서 시운을 파악했다. 대왕의 신하 중 송창은 “안팎으로 유씨 친족들이 포진하여 공신들이 함부로 할 수 없으며, 나이 많고 현명하고 인자하고 효행으로 천하에 알려졌기에 천하 민심에 따라 대왕을 옹립하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점을 치니 “천왕이 되어 선제의 유업을 빛낼 것”이란 ‘대횡(大橫)’ 괘가 나왔다.(「문제기」, 『한서』1, 명문당, 204쪽) 유항은 확신이 서자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안에 이르러서도 황제의 자리를 선뜻 받지 않았다. 서쪽 대신들을 향해 3번 사양하고, 남쪽 여러 신하를 향해 2번 사양했다. 신하들이 다시 간곡히 청원하자 유항은 그제야 천자의 자리에 등극했고 미앙궁으로 입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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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선택을 하기위해 각고의 고민을 기울였다

 

 

진평과 주발 등의 공신세력과 유씨 일족은 천하 사람들의 안정과 한나라의 안녕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를 선택할 때 각고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움직였다면 제각각 후계자를 내세워 싸웠거나, 조종하기에 적당한 인물을 황제로 올렸을 것이다. 여씨를 물리친 세력들에게 사심은 없었다. 이들은 유씨 천하에 올인했다. 따라서 한나라를 짊어질 황제로 유항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될 나라라 그랬는지, 공신들이 훌륭해서인지, 문제는 이들의 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문제 때 한나라는 최고의 안정기를 구가했다. 문제는 화창한 봄기운에 감응하며 만방에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결과적으로 진평과 주발의 혜안은 탁월했으며, 이들의 선택은 옳았다.  

 

 

         

양생 정치의 끝판왕 ‘문제’를 기억하라!

 

한나라는 고조로부터 혜제, 고후, 문제, 경제에 이르기까지 무위와 청정과 양생을 정치적 비전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황제와 노자의 비전으로 천하를 다스리기를 제안한 황로학이 통치의 좌표가 되었던 때이다. 그야말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백성의 삶을 돌보는 통치! 무위, 청정, 양생과 같은 모토가 현실정치에서 실행될 수 있는지에 의구심을 던지는 우리들에게 한나라 초기의 역사는 그것이 가능함을, 실제로 그런 정치적 모토가 구현되었음을 증명해준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백성들은 전쟁의 칼바람 속에서 한시도 쉴 수 없었다. 게다가 무수한 전쟁 끝에 쟁취한 천하 통일의 뒤끝은 죽음과 황폐였다. 통일 한나라의 최대 과제는 백성의 삶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황폐한 땅을 갈아 생명의 씨를 뿌리고 싹을 튀우고 푸르게 자라게 해야할 시기였던 것이다. 하여, 백성들 스스로 삶을 복구하고 삶을 안정시킬 때까지 통치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진나라 제국의 허망한 종말이 황로학의 비전에 공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나라 건국의 주체들은 엄혹한 법령이, 가중한 세금이, 장엄한 궁실과 성곽과 도로가 거대 제국 진나라와 진나라 백성의 삶을 파탄 나게 했음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한이 건국되고 가혹한 법치를 버리고 관대하게 다스리면서 간교한 통치가 아닌 질박한 정책을 폈는데 배를 삼킬 큰 고기도 빠져 나갈만큼 법망이 느슨하였다. 관리들은 순수하여 간교하지 않았고 백성은 평안하였다. 이를 본다면, 나라의 태평은 덕치에 달렸지 법치에 있지 않았다.

- 「혹리전」, 『한서』8, 명문당, 336쪽

그리하여 승상 조참은 한고조와 소하가 건국의 기초로 닦아놓은 궁실, 법령, 행정제도 위에 그 어떤 것도 더하지 않았다. 혜제와 여태후도 한나라를 지키는 비책이 온 천하 사람들의 ‘휴식과 안정’에 있음을 절감했기에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일로 삼았다. 백성을 동원하고 번거롭게 하며 괴롭히는 정치를 하지 않는 것, 백성이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 통치자가 욕심내지 않는 것. 한나라 초기 통치자들은 이런 정치로 자신도 살리고 나라도 살리고 백성도 살렸다. 

 

황로학의 비전이 현실 정치에서 구현된, 아마도 이 이후로는 찾기 힘든, 그래서 아주 특별한 역사의 순간이 한나라 초기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활활 타올랐던 여태후가 황로의 정치적 비전을 적극 실행했다는 사실도 반전이라면 반전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여태후의 뒤를 이어 등극한 문제가 ‘양생 정치’의 끝판왕으로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정점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천하는 금하는 것이 많으면 백성들이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이 이로운 기물을 많이 갖고 있으면 국가는 더욱 혼미해지고, 사람들이 재주가 많아지면 기이한 일들이 더욱 불어나며, 법령이 복잡해질수록 도적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이르기를 내가 무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바르게 되며, 내가 일을 만들지 않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넉넉해지며, 내가 무욕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순박해진다.

- 노자, 『도덕경』 57장

노자가 말한바, 무위와 청정과 양생의 정치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통치자가 먼저 무위하고, 일을 만들지 않고, 욕망에 흔들리지 않아 고요하며, 욕심을 내지 않아야 천하 또한 달라진다. 통치자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천하는 다스려지지 않는다. 

 

이런 노자의 통치학에 부합하는 황제는 오직 문제뿐이었다. 백성의 양생에 힘을 쏟으면서도 검소와 절제로 자신을 청정, 무욕하게 만드는 일에 솔선했다는 것. 문제를 인애의 군주라 일컬었던 반고가 주목한 바도 소박하고 절제하며 자신을 다스려가는 모습이었다. 반고는 이런 모습을 「문제기」의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역사가의 총괄적 비평을 담은 논찬에서 부각시켰다. 본기는 신하와 백성 그리고 이웃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실행한 정책과 정치를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문제의 수신(修身) 행위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지만 기술상 본문에 넣기 어려웠기 때문에 논찬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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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와 청정과 양생의 정치는 임금 자신으로부터

 

 

 

반고가 개괄한 바, 문제 개인의 생활은 이랬다. 효문제가 대나라로부터 와서 즉위한 지 23년이 지나도록 궁실, 동산, 애완물, 의복, 거마에 있어 더 늘어난 것이 없었다. 문제는 궁실을 지으려다 황금 백근이 든다고 하자, “황금 100근이면 보통 사람 열 집의 재산과 맞먹는다. 짐이 선제의 궁실을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늘 선제께 부끄러웠는데, 누대를 더 지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중지시켰다. 문제는 항상 질박한 옷을 입었고 총애하던 신부인에게도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옷은 입지 못하게 했으며, 휘장에는 수를 놓지 말게 하여 검약하는 것을 보임으로써 천하의 모범이 되었다. 패릉을 건조할 때는 와기를 사용하고 금, 은, 구리, 주석 등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했으며 산의 형세를 따를 뿐 분묘를 높게 만들지 못하게 했다. 

 

문제의 생활은 소박하고 청정했다. 하여, 한나라 백성들은 가장 안정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통치자가 소박하고 무욕하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고 부유해진다. 통치자가 사치하고 방종하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고 가난해진다. 황제와 노자가 추구했던 삶의 원칙이지만, 이것은 만대에 새겨야 할 삶의 원리이자 통치의 원리였다. 문제는 황제, 노자의 삶을 실천했고, 이후 문제 자신이 청정한 삶의 표상이 되었다.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역대 신하들의 상소문이나 대책문에서 문제는 황제들을 깨우치는 삶의 전범으로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던 것이다.    

 

성명하신 문제에 이르러서 전례에 따라 바로 나라의 안녕에만 뜻을 두고 절검을 실천하시어 거친 비단옷을 해질 때까지 입으셨고 가죽 신발은 구멍 나지 않으면 괜찮았으며, 큰 궁궐에 거처하지 않았고 목기에는 무늬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후궁에서도 대모를 천시하고 구슬을 멀리했으며 비취 장식을 하지 않고 공들여 새기지 않았으며 화려한 사치를 미워하여 가까이하지 않았고 향기를 멀리하여 즐기지 않았고 음악과 사성(邪聲)의 풍류를 삼가고 정과 위의 기묘한 음악을 싫어하였기에 정치가 깨끗하고 사회가 안정되었습니다.

- 「양웅전(하)」, 『한서』8, 명문당, 160쪽

효문황제는 자신이 묻힐 패릉을 보고 북쪽 물가에서 마음이 처량하고 슬퍼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아 북산에서 캐낸 돌로 덧널을 만들고 모시와 솜으로 채우고 그 사이를 옻으로 칠한다면 어찌 열 수 있겠는가?” 그러자 장석지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그 안에 욕심낼 만한 것이 있다면 비록 남산으로 막더라도 뚫을 틈이 있겠지만 그 안에 욕심낼만한 것이 없다면 비록 덧널이 없다 한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대저 죽음이란 것은 그 끝이 없지만 나라에는 망하고 흥하는 것이 있기에 장석지의 말은 무궁한 계책일 것입니다. 효문제는 깨달았고 그래서 박장을 하면서 큰 봉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 「초원왕전」, 『한서』2, 명문당, 361쪽

 

쾌락과 사치와 방종은 필연코 안일과 나태와 욕심을 부른다. 욕심에 가로막히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욕심은 고립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욕심이 또다른 욕심을 불러 갈등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천하 백성과 통해야 하는 황제에게 환락과 사치와 욕심은 치명적이다. 내 몸과 마음이 막혀있는데 어찌 천하 백성의 몸과 마음을 볼 수 있겠는가? 양생은 소박하고 절제하는 생활에서 시작된다. 내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고요해야 다른 이들의 삶도 청정하고 고요해진다. 

 

문제는 백성들의 양생에 전심했다. 청렴을 귀히 여기고 탐욕을 천시하였으며, 농민은 전조의 세를 납부하지 않았고, 연좌제와 육형을 폐지하였고, 비방과 요언의 죄를 폐지하여 천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널리 현량을 찾아 기용했으며, 전쟁을 피하고자 흉노와의 화친을 국책으로 삼았다. 무위하려는 노력의 결과, 판결은 1년에 400건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을 생각하는 문제의 마음은 한량이 없었다. 상제와 종묘에 제사하면서 불민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천하에 군림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면서 선왕들을 뜻을 마음에 새겼다. “예전의 선왕은 먼 곳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면서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먼 산천을 제사하면서도 복을 구하지 않았으며, 현인을 우대하고 친척을 멀리 하였으며, 백성을 먼저 보살피고 자신을 나중에 생각했으니 아주 영명한 처사이셨다.”(「문제기」, 『한서』1. 명문당, 238쪽) 그리하여 제사관이 황제에게 복이 돌아가도록 축원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문제가 생각하기에 제사의 복을 혼자 누려 좋아하면서 백성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부덕을 더하는 것. 사실 이야말로 탐욕의 극치가 아닌가? 백성을 책임지는 황제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죽는 순간에도 욕심을 버렸다. 마지막까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 마음을 썼다. 문제는 무위를 실천하고자 죽기 전 조서를 남겨 당부했다.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 생을 찬미하고 죽음을 싫어하여 장례를 후히 치르느라 생업을 파괴하고 복을 중히 여겨 산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는데. 짐은 이에 대해서 심히 찬성하지 않는다. …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은 사흘 동안만 조곡하고 모두 상복을 벗을 것이며, 백성의 자식을 결혼시키고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며 고기 먹는 것 등을 금하지 말라! 상사를 담당하여 상복을 입고 곡을 해야 하는 자들도 절대 맨발로 땅을 밟지 마라! 상복의 질대는 세 치를 넘지 않도록 하며, 수레와 병기를 진열하지 말고, 백성들 중에서 남녀를 선발하여 궁전에서 곡하게 하는 일도 하지 말라! 궁에서 곡을 해야 하는 자들도 아침 저녁 각각 열다섯 번씩만 하고 예가 끝나면 그만둘 것이며 아침 저녁으로 곡할 때가 아니면 자기 멋대로 곡하지 말라. … 패릉 일대의 산수는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바꾸지 마라. 후궁 중 부인 이하 소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문제는 무위 정치의 표본 그 자체였다.      

                

황제의 덕은 바람이고 백성들은 풀처럼 따르니 나라는 부유하고 형벌은 청렴하여 한의 법도를 이룩했다. 

- 서전, 한서10, 482쪽 

문제는 천하의 양생을 위해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렸다. 반고는 문제의 훈풍과 같은 덕에 백성들이 풀처럼 따랐다고 총평했다. 문제가 불러온 훈풍은 한나라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성장시켰으며 더하여 습속을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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