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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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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9-03-03 02:24 조회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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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제국의 여름 보여주마!

 

 

 

 

 

 

강보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무제(효무황제)다. 본명은 유철. 16세에 즉위하여 54년간 재위한 군주로 역사의 ‘역’자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중국 한나라의 유명한 황제다.


그는 무엇으로 유명해진 것일까? 한나라의 차서는 문경지치의 태평성대라 불리는 봄을 딛고 여름으로 향한다. 무제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한나라의 여름, 이른바 전성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중국대륙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왕조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유독 무제의 전성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제가 한나라의 여름을 이끌면서 보여준 강력한 황권중심의 리더십 때문이다. ‘황제라면 누구나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지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나라에서 무제 이전의 군주, 그러니까 한고조 유방으로부터 시작해 경제에 이르기까지의 약 60여 년간의 치세는 대부분 재상의 권력으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시대였다. 소하, 진평, 주발, 조참, 원앙, 조조 등 한나라의 역대 재상들을 보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여태후만 하더라도 정치는 철저히 소하, 조참 등에게 일임하고 재상이 가진 권력까지는 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제는 달랐다. 무제의 전성기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가 한나라 개국이후 늘 공고했던 재상 중심의 권력구도를 해체하고, 황제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한 최초의 군주이기 때문이다. 왜 이 시대는 한무제, 단 한 사람에게로의 권력 집중을 허락했던 것일까?

해를 품은 유철, 절대 황제가 되다!

  한나라의 태자는 적장자 후계가 원칙이다. 그러나 앞서보았듯 7대 황제 무제에 이르기까지 혜제를 제외하고는 전부 적장자가 아니다. 문제는 유방의 넷째아들, 경제는 문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데 이번에 함께 볼 무제는 무려 경제의 11번째 아들이다. 역시 원칙은 원칙일 뿐이다. 


  무제가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된 것은 한마디로 ‘운’이다.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고자 했던 관도장공주 ‘표’(경제의 누나이자 두태후의 딸)의 욕망이 유철을 황제로 만든 것이다. 엄마(왕지)의 욕망이 아닌 장모의 욕망으로 황제가 된 사내라니. 참 사람일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정말 황제가 되려고 태어난 운명이었는지, 공교롭게도 왕지는 유철을 임신했을 때 ‘해를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한서』에는 이 태몽을 전해들은 경제가 귀한 징조라며 무척이나 좋아하는 장면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경제는 이 태몽을 왜 그토록 좋아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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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품고 태어난 무제


  해는 양기의 시작이자 근원 그리고 밝음의 상징인데, 그런 양기의 결정체인 해가 엄마 품에 안기는 꿈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군주의 탄생 조짐 아닌가. 한나라의 여름이라는 차서에, 그 여름을 뜨겁게 달구어줄 진정 ‘태양’인 황제가 태어난 것이다. 이 양기 덩어리인 사내가 얼마나 양기를 뿜어댈까?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제는 ‘오초7국의 난’을 경험했던 바, 한나라를 이끌어갈 다음 황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지방제후들을 압도하는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유철은 자신의 아들 중 나이는 어리지만 가장 현명하다 판단하던 터였다. 하여 경제는 당시 태자였던 율태자를 임강왕으로 강등시키고, 11번째 아들인 유철을 태자로 앉히는 파격을 감행한다. 신하들의 반대상소는 빗발쳤다. 하지만 경제는 자신의 선택을 끝내 번복하지 않고 무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율태자가 폐태자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이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황실에서 엄마와 아들은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엄마가 받는 총애가 곧 아들이 받는 총애였음을 상기한다면 당시 태자의 모친이었던 율희가 경제의 총애를 잃었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만 더 짚어보자. 왜 율희는 경제로부터 총애를 잃었을까? 당시 태자의 모친인 율희는 사돈관계를 맺고자 손을 내밀었던 관도장공주의 제안을 거절, 그녀를 적으로 만든 것이 경제의 총애를 잃게 된 주된 이유였으나, 경제가 주목한 것은 율희의 품행에서 보여진 그녀의 욕망이었다. 아들은 태자인데 엄마인 자신은 여전히 후궁이었던 탓에 율희는 경제에게 끊임없이 황후로 올려줄 것을 건의했다. 아들이 태자이니 자신도 황후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논리상으론 맞지만 경제는 율희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율희의 불손한 언사와 ‘황후’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경제는 황후가 될 만한 자질이 없는 여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그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를 이미 여씨 반란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갓 안정되어 가는 한나라에 그런 분란의 씨앗을 만들 수는 없었을 터. 경제가 유철을 태자로 책봉한 데에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경제는 진정 성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제는 16살의 어린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이 16살의 어린황제는 어떻게 권력을 황제 중심으로 재편하여 절대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의 황상(무제)이 자리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나고 한나라가 일어난 지 70여년이 되도록 국가에는 큰 일이 없었으며 수해나 가뭄의 재해도 생기지 않았고 백성들은 사람들마다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도시나 촌락의 미곡 창고는 모두 가득 찼으며, 조정 창고에도 재물과 보화가 남아돌았다. 경사의 금고에는 억만금이 쌓여 있었는데 돈을 묶은 돈꿰미가 썩어 셀 수도 없었다. 태창의 양식은 묵은 곡식이 계속 쌓여 가득 넘쳐나 태창 밖 길가에 쌓아 놓았으나 썩어서 먹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사마천, 「평준서」, 『사기』, 민음사, 314쪽

  한고조에서 시작해 경제에 이르는 한나라의 봄은 백성을 쉬게 만드는 충전기였다. 이는 백성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쉬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도의 일로 백성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세금도 줄이고, 요역도 줄이고, 전쟁도 없었다. 초기 한나라의 무위정치는 이러했다. 한나라를 위협했던 북방의 흉노와 협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이유도 당시 이러한 통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전쟁으로 낭비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가 구현되자 백성들은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우연인지 때마침 하늘도 도와주어 풍년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한나라의 경제상황은 날로 안정되어, 재물과 보화가 남아돌았다. 그 풍요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심지어 썩어서 먹을 수 없는 곡식이 길가에 쌓이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만물은 한 번 흥하면 반드시 한 번 쇠퇴한다. 풍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순 없다. 물산과 재화의 풍요로움은 그것이 적재적소에 쓰일 때 그 건강함을 유지하는 바, 그것이 쓰일 곳이 없어 썩어 버려질 정도라면 그것은 한나라의 물산이 순환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순환하지 못하는 것은 병증이다. 그것은 물산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순환하지 않고 한 곳에 쌓이는 물산은 병이 되어, 가만히 내버려두면 ‘오초7국의 난’에서 보았듯 제후들이 실력을 쌓아 중앙을 위협하는 암 덩어리로 변이 될 수 있다. 한나라에는 쌓인 힘의 소비를 통한 순환성의 회복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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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움에도 쓰일 곳이 없어 썩어버릴 정도라면, 그것은 순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무제는 자신 앞에 놓인 시대의 문제에 응답했다. 무제가 보기에도 한나라는 오랜 안정으로 축적된 재화와 힘을 설기 할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지방으로 분산되어 있던 제후권력은 ‘오초7국의 난’의 실패로 완전히 힘을 잃은 상태여서 중앙을 견제할만한 제후세력도 남아있지 않아, 권력이 ‘중앙’이라는 한 점으로 모일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우리는 흔히 무제가 황제 중심으로 권력을 모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무제 개인의 자질에서 찾곤 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처럼 무제 앞에 놓인 시대의 형세였다. 권력이 한곳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모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형세가 있었던 것이다. 무제 개인의 자질이 특정 시대와 만나서 가능했던 권력 재편! 바야흐로 한나라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리더십은 봄이 아닌 여름을 다스려야 하는 리더십이자, 비축(충전)이 아닌 발산(소비)의 리더십이었다. 


  무제는 한나라에 비축된 물적 풍요를 효율적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황제 중심으로 권력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해줄 장치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 어린 황제가 보기에 한나라의 황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원인은 크게 3가지였다. 황제를 견제하는 승상권력, 여태후와 같은 섭정하는 사람의 기질 문제, 권력의 분산을 긍정하고 군주에게 무위를 강조하는 국정철학으로서의 황로. 무제는 황제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 이 3가지 문제들을 풀어가기 시작한다.

무제의 3가지 문제

  야심찬 군주 무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국정철학 황로와 그것을 숭상하는 할머니 두태후였다. 무제는 강력한 황권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한 질서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정치이념인 황로를 대체 할 새로운 정치논리를 안착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두태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제 2년. 무제의 인재 라인업은 유학을 공부한 두영, 전분, 조관, 왕장 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조관과 왕장은 죽음을 맞이했고, 두영과 전분은 면직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할머니 두태후의 정치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두태후는 황로사상을 중심으로 어린 유철을 대신해 섭정을 병행했는데, 그녀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려고 하는 유학관료들이 탐탁지 않았다. 이런 찰나에, 때마침 조관이 무제에게 올린 ‘두태후에게 정사를 보고하지 말라는’ 상주는 두태후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조관은 죽게 되었는데, 두태후에겐 유학을 더욱 더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제가 단행한 첫 번째 인사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련한 두태후를 어린 황제 무제가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제는 할머니 두태후의 존재감을 확인한 후, 진평이 여후 시절 납작 엎드려 후일을 도모한 것처럼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으나 무제의 이러한 전략수정으로 인해, 두태후가 섭정했던 이 6년간의 시간이 무제 시절 가장 태평한 때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무제가 두태후 밑에서 마냥 엎드려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전분은 키가 작고 못생겼지만 자존하며 으스대기를 좋아했다. 또 제후의 왕들에 연장자가 많고 황제는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나이가 어린데, 자신은 제실의 먼 외척으로 재상이 되었기에 엄격하게 기를 꺾거나 예로써 굴복시키지 않으면 천하를 통치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 승상이 입조하여 업무를 아뢰면 해가 기울도록 하는 말을 황제는 다 들어주었다. 인재를 추천하면서 단번에 이천석 관리로 임명하니 권력이 폐하보다 더 했다. 그러자 무제가 말했다. “승상이 제수할 관리가 아직도 있는가? 나도 관리 좀 임명하고 싶소.” 전분이 고공의 관서의 땅을 요구해 집을 넓히겠다고 하자 무제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제는 무고(武庫)까지 가져가는군!” 전분은 이후로 조심하였다.

「전분열전」, 『한서』 4권, 명문당, 115쪽


  우리가 역사 속에서 흔히 보아왔던 어린 황제의 모습은 외척이나 엄마, 할머니 등에 휘둘려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는 신체였지만 무제는 달랐다. 무제의 카리스마와 패기를 보라! 무제는 어렸음에도 신하를 압도하는 무엇이 있었다. 무제도 처음에는 자신이 어린데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기에 외척 전분의 말을 다 들어준다. 하지만 황제인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전분에게 무제는 화를 내며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장면은 무제의 국정 운영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포석으로 ‘승상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첫 걸음’(『반고평전』 천치타이 다른생각 240쪽)이었다. 한고조 유방 때부터 경제시절까지 승상이라는 직위는 황제에게 가감 없이 간언을 하는 자리였다. 여태후만 봐도 여씨 천하를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기 전, 승상 진평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무제는 그런 위치에 있던 승상을 황제의 권위 밑에 둠으로써, 황권을 중심으로 국정을 리드하겠다는 포부를 대외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후 무제는 승상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정안에 인맥이나 외척과 같은 지지기반이 없는 사람을 승상으로 뽑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공손홍이다. 


  건원 6년. 할머니 두태후가 붕어한다. 이로써 강력한 승상권력의 해체와 두태후라는 섭정권력의 문제 2개가 해결되었다. 드디어 하나의 문제만 남았다. 무제는 권력분산이 아닌 황제를 중심으로 권력을 응집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 새로운 정치논리를 찾아 나선다.

  원광 1년. 짐이 알기로 옛 요와 순은 죄에 따른 복장을 입게 했어도 백성은 죄를 짓지 않았으며 일월이 비추는 곳에 직분을 다하지 아니하거나 명을 아니 따르는 자가 없었다. 주의 무왕과 강왕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은덕이 조수에게도 미쳤고 교화가 사해에 통했으니 멀리 숙신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거수를 정벌하고 저족과 강족도 신복하였으며, 혜성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산릉이 무너지거나 하천이나 계곡이 막히지도 않았다. 기린이, 봉황이 교외에서 놀고 하수와 낙수에서 도서가 나오기도 하였다. 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짐은 종묘를 지키고 받들면서 일찍 일어나 추구하고 저녁에도 생각해보지만 깊은 물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알지 못하겠노라. 아름답고도 위대하도다! 어떻게 하면 선제의 공업과 미덕을 널리 알리고 위로는 요순과 같고 그 다음 삼왕과 같아지겠는가! 짐이 불민하여 먼 곳까지 덕을 펴지도 못하니, 이는 그대들이 보는 대로니 고금 왕도정치의 요체를 잘 아는 현량한 인재들은 짐의 책문을 받아 살펴 모두를 문서로 답하되 죽간에 지어 올린다면 짐이 친히 열람할 것이다. 그러자 동중서와 공손홍 등이 대책을 올렸다.

「무제기」,『한서』1권, 명문당, 297쪽

  이 문장은 할머니 두태후가 죽고 난 직후 발표한 책문으로 무제의 비전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제의 비전은 ‘멀게는 요순, 가까이는 삼왕’으로 요순이 구가한 태평성대를 이룩하면서도 주의 무왕과 강왕이 보여주었듯 사방의 오랑캐를 신속하여 그들마저 자신의 질서 안에 포함시켜 천자의 은덕을 사해에 펼치는 것이었다. 비전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눈여겨봐야할 사항은 무제가 정치적 비전의 중심으로 삼은 인물이 ‘요순과 삼왕’이라는 점인데, 이것은 황제를 정치적 비전으로 삼았던 한고조 유방에서 경제까지 이어져오던 70년간의 정치 패러다임을 전복하겠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요순을 정치적 비전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황제를 비전의 중심으로 삼던 황로와 결별하겠다는 의지다. 


  문제와 경제가 물려준 나라는 너무나 훌륭했다. 하지만 무제는 경제의 유업을 잇는 6년간의 두태후의 섭정치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일까? 하늘은 태평성대에 반드시 태평의 징조, 기린과 봉황, 하도와 낙서와 같은 상서(祥瑞)를 보내주는데 결정적으로 지난 6년간은 그러한 상서가 전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서 무제는 한나라가 아직 진정한 태평성대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황로의 무위정치만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무제에겐 현재를 뛰어넘고 자신의 비전을 지지해줄 새로운 정치논리와 그 철학에 맞는 인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무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유학자 동중서다. 동중서는 무제에게 ‘천인삼책’을 올린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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