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3) > 글쓰기의 달인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12/10 월요일
음력 2018/11/4

절기

글쓰기의 달인

발굴, | 『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3)

페이지 정보

작성자 MVQ 작성일18-12-01 23:11 조회56회 댓글0건

본문



 

 

『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3)





강 보 순

 

 

 

 

반고, 나는 문사로소이다!

 

본격적으로 반고에 대해 알아보자. 반고는 ‘9살에 문장을 짓고 시부를 외웠으며, 장성하여서는 전적과 구류백가의 책을 두루 읽고 깊이 연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타고난 문재와 공부의 성실성. 학문을 넘나드는 통섭의 사유가 있었다. 흔히 어릴 때부터 뛰어나면 우쭐대거나 자만에 빠지기 십상인데, 반고는 학문으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타인을 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품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 태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반고를 좋아하지 않은 유생이 없었다고 한다. 

  

청년 반고의 삶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부친 반표의 죽음을 맞이했던 23살때였다. 장남인 반고는 태학에서의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른다. 이 때 반고는 아버지가 집필하던 사기후전을 본 후 크게 감명 받아, 부친의 뜻을 이어 ‘역사쓰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반고는 역사개작이라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반고는 살아남는다.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꿔준 쌍둥이 동생반초의 대활약 덕분이다. 대활약의 결과 반고는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 명제로부터 역사쓰기를 허락 받고 난대영사라는 벼슬까지 하사 받는다. 공부하던 반고가 역사를 쓰고, 옥에 갇혀 죽을 뻔했다가 황제 옆에서 벼슬까지. 그야말로 변전의 변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반고의 관직생활은 이렇듯 문장에 얽힌 인연에 의해, 전혀 예상할 수 없던 타이밍에 시작되었다. 난대영사는 오늘날로 치면 국회 도서관장쯤 되는 직책으로, 반고는 당시 현령이었던 진종, 윤민등과 함께 세조(광무제)본기를 완성한다. 또한 후한 공신들에 대한 열전과 후한에 맞섰던 할거세력에 대한 열전을 완성했는데 모두 28편이었다. 반고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장제(명제 다음 황제)를 만나고 나서 부터다. 어려서부터 경학과 문학을 공부했던 장제는, 반고의 문장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지방을 순수할 때 마다 반고를 동행시켜 부와 송을 짓게 했다고 한다. 반고는 문사로서 황제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반고는 어떤 문장을 지었을까?

 

반고가 황제에게 올린 문장의 대부분은 한나라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반고가 칭송한 한나라의 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순이나 공자와 같은 성인의 행위에 버금가는 덕으로 당시의 한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토대이자 한나라의 존립이유였다. 하지만 당시의 의식이 있다는 문사와 학자들은 자기 시대는 무조건 깎아내리고, 과거의 치세는 높이고 그리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나라에는 성인과 같은 제왕이 없고 정치와 교화의 측면에서 보면 태평시대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사로서 자기시대의 미덕과 문화를 칭송하면 권력에 영합하는 것일까? 반고가 올린 부와 송과 같은 글들은 어용인가? 문사로서 반고의 행위를 어떻게 봐야할까? 

 

한 대의 저술을 살펴보면, 주로 은나라 주나라에 대한 언급에 치우쳐 있다. 여러 학자들의 저술 또한 다른 일에 대해서만 논하고, 한나라의 덕에 대해서 칭송하는 말이 없다. 그래서 논형을 통해 칭송한다. 주나라를 칭송한 시를 주송이라 한다. 두무나 반고 등이 한나라를 칭송해서 진상한 작품과 종류가 같다. 

- 왕충,『논형』,성기옥 옮김, 동아일보사, 2016,733쪽

지금으로 치면 시사평론가! 세상의 허위를 그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했던 까칠의 대가 왕충, 그가 반고의 부와 송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한나라를 칭송한 반고의 작품은 주나라 때의 송과 그 종류가 같고, 왕충 자신의 『논형』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왕충이 쓴 『논형』은 어떤 책인가? ‘아무리 작은 선일지라도 칭찬하고, 아무리 작은 악일지라도 비판’한 한마디의 치우침도 없이 있는 그대로에 충실한 ‘비평서’가 아니던가? 왕충은 광무제 명제 장제가 만들어낸 태평성대 역시 충분히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했던 바, 상서로운 징험으로 태평성대를 판단하더라도 그러한 징조는 오히려 요순시대보다 후한이 훨씬 더 많다고 반박한다. 하여, 왕충은 말한다. ‘신하로서 군주를 칭송하는 일 역시 문사가 해야 할 일이며, 성군인 줄 알면서도 칭송하지 않는 것은 옳거나 그른 일을 보고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와 같은 것’이라고. 없는 것을 지어내서도 안 되지만, 있는 것을 폄훼하거나 감추어서도 안 된다. 왕충은 반고의 붓이 그러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왕충은 후한의 덕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반고의 문장’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적어도 반고의 문장 안에 담겨 있는 한나라 덕의 ‘사실과 진의’ 정도는 확인한 후에 인정한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라는 밀이다. 

  

그러나 반고에 대한 왕충의 평가와 달리 일군의 사람들은 무장가 반고의 행적을 폄훼했다. ‘제왕지세에 살면서 몸에 관복을 입고 밖으로는 명성을, 안으로는 도덕을 숭상하며 천문을 오래도록 연구’ 했지만 드러난 공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반고가 다행히 제왕의 시대에 태어나 활동하기 때문에 문장가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일 뿐, 문장은 황제를 즐겁게 해주는 일 외에 실제 현실에는 쓸모가 없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문장의 가치를 의심하고 문장가의 역할을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었다. 반고는 이러한 인식에 당당히 맞섰다. 문장의 공덕은 실질적 기술이나 실리적 업적을 세우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하여, <답빈희>라는 부를 지어 문장을 무용하게 보는 이들에게 답했다. 

 

근자에 육가는 출사하지 않다가 신어로 등용되었으며 동중서는 제자를 가르치며 유림의 글을 지었고, 유향은 서적을 관리하며 엣 저술을 바로 잡았고, 양웅은 깊이 사색하여 법언과 태현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군주의 문에 출입하면서 선성의 심오한 뜻까지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재주를 내 보이면서 서적의 동산에서 쉬며, 그 바탕을 보전하고 문채를 발휘하여 훌륭한 군주에게 등용되어 후세인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으니 이들은 선성의 후계자일 것입니다. 저 백이는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켰고 유하혜는 3번이나 쫓겨나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안회는 단사표음의 가난을 즐겼으며, 공자는 춘추를 서수획린에서 끝냈으니 그런 성현의 말씀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으니 진실로 우리의 사표가 될 것입니다. (중략) 봉몽은 활 쏘는 절대기술이 있었고, 공수반은 목공 전문가였습니다. 나는 그들과 같은 기술에 끼어들지 못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문사(文史)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 반고,『한서10권』,진기환 역주, 명문당 2017,473쪽

반고에게 글쓰기란 누군가의 인정을 얻기 위해 써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육가나 양웅처럼 글쓰기로 인정받아 명예를 누린 문사도 있었지만, 평생 글을 썼음에도 결국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한 공자와 같은 이도 있었다. 해서, 칭찬에 기뻐할 것도, 비난에 뜻을 굽힐 필요도 없었다. 반고가 보기에 문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와 명예, 칭찬과 비난이 아니라 성현의 뜻을 하늘과 땅에 가득 채우려는 마음이다. 반고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세상에서 유용하다고 칭송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성인의 뜻을 전하는 일이요,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일인 것이다. 공자가 『춘추』라는 역사책을 써서 사표가 되었듯, 역사책을 쓴다는 것은 성인의 뜻을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행위이다. 세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보다 더한 공덕이 있을까? 반고는 글쓰기, 특히 역사 쓰기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반고의 입장에서는 활쏘기에 뛰어난 봉몽이나 목공술에 뛰어난 공수반과 같은 기술을 가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이런 기술이 없었기에 역사책을 쓸 수 있었다. 역사책은 기술과는 다른 차원에서 세상의 빛이 된다. 이런 자부심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20년 동안 한나라의 역사를 쓰는 작업에 매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고에겐 ‘역사쓰기’ 그 자체가 역사적인 과업이었던 것이다.

 

 

(상략) 왕망이 천명을 거슬러 온 중국 뒤흔들 때, 선친은 우환에 피신하여 홀로 노래하였도다. 

끝까지 보신하며 좋은 법도를 보여주셨나니, 인자가 거처해야 할 곳을 골라 살았도다.

크신 선조의 공덕, 순수한 아름다움이여, 궁색과 현달에도 천하를 건지려 하였도다. 

아! 우둔한 나의 미미함이여. 조상의 공업을 훼손하고 따르지도 못하고 

이 몸이 성취하려 애쓴다지만 어찌, 대대로 이어온 업적을 생각만 하는가? (하략)<유통지부>

- 반고,『한서10권』,진기환 역주, 명문당 2017,443쪽

<유통지부>는 반고가 부친 사후에 쓴 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표명한 일종의 출사표와 같은 글이다. 이 부에서 반고는 부친에 대한 존경과 감사함을 써내려 가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반고의 역사관이다. 반고는 부친 반표의 역사쓰기를 ‘천하를 건지려’ 한 일, 즉 ‘천하를 구원하려 한 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반고가 역사쓰기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끝내 부친의 유업을 잇고자 했던 이유는 ‘역사쓰기’가 ‘천하를 구원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서 1백 권은 황제 12기를 순서대로 서술하고 관사를 나열하였으며, 후왕의 책봉을 정리했고 천지의 표준을 설명하였으며 음양을 통합하고 원시 이래 일월과 성신의 운행을 확대하여 추산하였으며, 지리와 지역을 분할 설명하였고 강토를 연구 정리하였으며 인류의 뿌리와 근원을 밝히고 만방을 포괄하여 설명하였다. 육경과 도덕의 체계를 밝혀 성과를 엮었고 모든 인물의 성과와 자취를 종합하여 편장을 찬술하였다. 고아한 전고를 모두 포함하고 고금의 세상사를 관통하였으니 모든 문자가 정밀하고 전아하며 학술의 총림을 생각했다. <서전> 

- 반고,『한서10권』,진기환역주, 명문당 2017,548쪽)

반고가 생각하는 역사쓰기는 단순한 업적과 사건의 나열이 아니었다. 반고는 자신이 쓸 역사를 학술의 총림이라 생각했다. 총림은 무엇인가? 집대성한다는 의미로 하나의 분야를 중심으로 쓴 역사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의 체계를 자유롭게 횡단해 통섭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고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흥망성쇠뿐만 아니라,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은 물론 지리와 지역, 인류의 뿌리와 근원, 육경과 도덕적 체계, 고금의 세상사를 관통하는 그 모든 것을 역사의 체계로 편입시켰다. 즉 반고가 보기에 나라의 흥망성쇠는, 사람의 흥망성쇠에 더하여 자연의 흥망성쇠, 도덕의 흥망성쇠, 지리와 지역의 흥망성쇠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 결과물로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반고가 전한시대의 흥망성쇠를 총망라하여 중층적으로 입체적으로 조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반고는 『한서』가 후한의 오늘과 미래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길 바랐다. 작은 것은 반드시 커지고, 은미한 것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기미와 조짐을 한서를 통해 발견하길 바랐던 것이다.

 

 

 

반고의 죽음, 그리고 『한서』를 마무리한 여동생 반소

  

누구에게나 그렇듯 반고의 죽음 역시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곳에서 찾아왔다. 사연은 이렇다. 낙양 현령인 층긍이 길을 가는데 반고의 노비가 특별한 이유 없이 층긍의 수레를 막아 세웠다. 노비가 현령의 수레를 막다니. 현령을 수행하던 관리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관리들은 그 노비를 흠씬 패주었는데, 황당한 것은 그 노비는 맞으면서도 현령을 향해 욕을 한 것이다. 층긍은 더욱 더 화가나 노비를 죽이고 싶었지만, 반고와 친분이 있던 두헌의 권세가 두려워 어쩌지 못하고 원한을 품은 채 발길을 돌린다. 낙양 현령도 떨게 만든 두헌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물이기에 반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두헌은 ‘성격이 과감하고 조급하였으며, 사소한 원한도 꼭 보복하는’ 성품을 지녔는데, 여동생이 태후(두태후)가 된 후 오만방자의 아이콘이 되는 한마디로 문제적 인물이었다. 층긍은 이러한 두헌의 권세와 성품이 무서웠기에 화를 자초하지 않으려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두헌이 황제 암살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연루자들이 모두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층긍은 이때를 이용하여 노비의 주인이었던 반고에게 복수한다. 개인적 원한을 풀기 위해 반고가 두헌의 암살모의에 연루되었다고 고발한 것이다. 반고는 두헌의 흉노원정에 동행했으며, <두장군북정명>이라는 명문(銘文)을 남겨 두헌의 전공을 기념하기도 했다. 이에 반고는 옥에 갇혀 고문을 받다 61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옥사한다. 후에 층긍은 반고에 대한 무고죄로 처벌 받지만, 이미 반고는 죽은 뒤였다.

  

두헌의 오만방자함과 권세를 부린 노비의 우연한 충돌로 죽음을 맞이한 반고. 반고는 생전에 궁형을 피하지 못한 사마천의 행위를 비평한 적이 있는데, 정작 본인도 옥사를 피하지 못했다. 삶도 죽음도 운명이기에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반고 자신도 몰랐으리라. 

  

미완으로 남은 『한서』를 완성한 것은 반고의 여동생 반소였다. 장장 100권 52만자 분량의 방대한 역사쓰기를 마무리한 존재가 여동생이란 사실에 먼저 놀라고, 근대 이전 중국에서 역사쓰기에 참여한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반소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한서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반소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녀가 14살에 동향사람 조세숙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단명하여, 꽤 일찍 홀로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재가하지 않고 아이를 홀로 키웠다는 것이 전부다.  

  

그런 반소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오빠 반고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한서』집필 상황을 알고 있었던 황제 화제는, 반고가 마무리하지 못한 표와 천문지를 여동생 반소에게 완성하라 명한다. 그런데 왜 반소여야만 했을까? 반소는 『한서』의 집필기획과 관련한 전 과정을 알고 있는 유일한 혈육인 동시에, 후한에서 반고의 『한서』를 마무리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반소의 학식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일까? 

  

반소의 학문수준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한편 남아있다. 이야기는 반소가 『한서』를 완성한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지하듯 반소는 황제의 하명으로 『한서』를 완성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한서』를 온전히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마융과 같은 후한의 대학자도 『한서』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 『한서』 100권을 전부 이해한 사람은 반소가 유일했다. 그래서 화제는 마융에게 명을 내려 『한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반소에게 구두를 받아오게 한다. 『한서』가 처음 완성 되었을 때에는 구두가 끊어져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구두를 어디에서 어떻게 끊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한서』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구두점을 제대로 찍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구두를 받을 때 마융이 각하(閣下)에 엎드려 전수받았다는 것인데, 각하에 엎드렸다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반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한마디로 반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한서』는 마융이 반소로부터 읽는 법을 전수 받은 뒤에야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되었다. 『한서』는 반소의 마지막 공력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반소의 학식을 높이 평가했던 황제는, 반소를 황후와 비빈들의 스승으로 삼아 황실여인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한다. 반소가 ‘최고의 여성지식인’이라는 의미의 ‘조대가’로 불리우게 된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이때 반소의 교육을 받았던 후궁 중 한사람이 ‘등수’로, 미모는 물론 사서에 능통했을 정도로 학문적 소양이 밝았다. 이 여인이 훗날 어린 황제 상제를 대신해 섭정했던 등태후로, 반소를 정치에 입문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반소는 정사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반소는 자주 고사하며 정치할 뜻이 없음을 드러냈는데, 그럼에도 제국상이라는 직위까지 하사받고 정사에 참여한 것은 등태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만큼 반소의 정치적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등태후의 오빠이자 대장군인 등즐이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을 청원했다. 그러나 태후는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오빠 등즐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원했다. 등즐은 비대해진 외척이 전한시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어, 스스로 자중하고 물러서려 했던 것이다. 등태후는 이 문제와 관련해 반소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반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옛날, 백이 숙제가 나라를 떠나자 천하는 그 고결함에 탄복하고 태백이 떠나자 공자는 삼양(양보로 이름이 높던 세 명의 현인)이라 칭찬했습니다. 겸양의 마음은 영덕을 눈부시게 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리는 것입니다. 논어에 “예의와 겸양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정치를 실시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추양의 진심은 심원한 경지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사구(등즐, 등리鄧悝·등홍鄧弘·등창鄧閶)는 깊게 충효를 지키고 몸을 빼어 스스로 물러나라고 했지만 마마는 변경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기에, 거부하고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나중에 사소한 잘못이 있을 경우, 실로 추양(타인을 추천하고 스스로 물러남)의 이름을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 후한서- 조세숙 처전

반소는 등즐의 입장에 서서 겸양의 가치가 무엇인지, 겸양의 때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등태후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누구나 낼 수 있지만, 백이·숙제·태백처럼 그것에 욕심내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는 겸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설혹 그러한 겸양을 했다 하더라도 모든 겸양이 추양으로 존숭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겸양의 때를 아는 것이었다. 이에 반소는 등즐이 대장군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고, 여동생인 등태후가 황후라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지금이야말로 겸양을 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등태후는 결국 등즐의 사직을 허락한다. 등태후의 반소에 대한 신뢰가 이와 같았고 반소 또한 이처럼 현명했던 것이다.

  

끝으로 반소하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여성교육서라는 ‘여계’를 편찬했다는 사실이다. 근대이전까지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내훈으로 꼽히는 이 ‘여계’다. 반소는 여성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부친 반표에게 배운 바, 여성도 가문의 얼굴로서 올바른 판단을 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여성도 지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소. 반소는 여성이 학문과 정치의 주체로 활동했던 최초의 사례이자, 여성들의 스승으로 기록된 최초의 인물이다. 이렇게 멋진 여인이라니! 반소의 마지막 길은 등태후가 함께했다. 등태후는 친히 소복을 입고 애도하며 장례를 감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3부에 걸쳐서 반씨 집안의 『한서』 완성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한서』와 반고라는 이름이 조금은 친숙해졌는지? 『한서』는 반고를 중심으로 반씨집안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빚어낸 역작으로 결코 쉽게 나온 책이 아니다. 그 출발은 우리가 흔히 알았던 저자 반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녀를 구분 짓지 않고 가르쳤던 반씨집안의 교육철학에 있었다. 그러한 교육이 삶으로 옮겨진 결과, 고모할머니 반첩여는 백성과 황실로부터 높은 신망을 받았고, 할아버지 반치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뚝심으로 자신을 지켜냈던 것이다. 또한 그 덕분에 부친 반표는 선악시비를 포폄하는 역사로 세상의 사표가 되고자 『사기후전』을 남겼고, 그 유업을 반고는 고스란히 이어 나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생 반초는 특유의 설득력과 행동력으로 사지에서 형을 구해내, 『한서』집필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여동생 반소 역시 반고가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을 완수해 『한서』의 대업을 완성했다. 대를 이어 전해졌던 역사의 이면에는 배운대로 행동하고! 배운대로 쓴! 반씨가문의 놀라운 실천력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한서』는 반고만의 『한서』가 아니다. 반표, 반초, 반소의 『한서』이기도 한, 말하자면 ‘반씨가문의 『한서』!’다. 2000년간 사랑 받아왔던 『한서』에 이런 특별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올 겨울, 방학을 기회 삼아 『한서』의 특별함에 접속해보는 것은 어떨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