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술 > 글쓰기의 달인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8/20 월요일
음력 2018/7/10

절기

글쓰기의 달인

소세키의 질문들 | 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술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7-12-13 02:13 조회757회 댓글0건

본문

[소세키의 질문들] (13) – 『춘분 지나고까지』

 

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술

 

박 성 옥

 

1. 조각보 같은 소설

 

 『춘분 지나고까지』(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5년)는 조각보 같은 소설이다. 조각보는 아무 맥락 없이 형형색색의 헝겊조각을 이어 붙이는 것처럼 보여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통일된 문양을 이룬다. 일정한 패턴이 크고 작은 규모로 변주되는 프렉탈 구조이다. 이 소설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각보처럼 짜임새 있게 얽혀있다. 소설의 시작은 모리모토라는 사내의 별난 모험담으로 시작되지만 조금 지나면 모리모토는 사라지고 없다. 앞부분은 게이타로, 뒷부분은 스나가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중간 중간에 실업가 다구치와 인텔리 백수 마쓰모토 이야기가 끼어든다. 마무리는 마쓰모토가 화자가 된다. 어찌 보면 몹시 산만한 이야기다. 소설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스나가와 지요코의 결혼은 화자조차 ‘나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로 끝난다. 기승전결로 구성되는 근대소설의 문법으로 보면 이 소설의 구성은 생소하고 어리둥절하다.  

 

 517b31afc121af8dd0050d162dded611_1513099 

 

  왜 이렇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짜깁기했을까? 1912년 1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에 소설연재를 시작하면서 쓴 머리말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전부터 나는 각각의 단편을 쓴 뒤에 그 각각의 단편이 합쳐져 하나의 장편이 되도록 구성하면 신문소설로서 의외로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세키는 단편소설끼리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성을 시도했다. 모리모토가 게이타로에게 뱀조각 지팡이를 남겨주고, 게이타로는 그것을 들고 마쓰모토를 미행하게 되고, 바로 그 지팡이 때문에 마쓰모토가 미행한 남자를 기억하게 되는 식으로 바느질이 엮어진다.  

 

 각 인물에 대한 정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감질나게 밝혀진다. 복선이 많이 깔린 추리기법은 이 소설을 읽는 색다른 매력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양파처럼 한 꺼풀씩 다 벗겨내고 나서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스나가가 어릴 때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당연한 유언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돌연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엄마가 지금까지처럼 귀여워해줄 테니까 안심해.”하고 말한다. 뭔가 야릇하다. 이때부터 스나가의 불안과 의혹이 시작된다. 스나가가 느낀 이상한 직감의 정체는 소설이 끝나갈 때야 진실이 밝혀진다. 그제야 풀릴 듯 말 듯 답답했던 스나가의 행동과 말들이 되짚어 떠오르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하게 된다. 조각보처럼 이어붙인 『춘분 지나고까지』는 추리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쓰기 전, 소세키는 1년 반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위궤양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몸이 회복될 무렵 소세키는 갑자기 다섯째 딸 히나코가 급사하는 사건을 겪는다. 소세키는 딸의 죽음으로 “정신에 금이 갔다”고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소세키는 『춘분 지나고까지』를 쓰면서 딸의 죽음 이야기를 삽입해 넣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손님을 만나지 않는 마쓰모토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액자소설처럼 소설 속에 작은 소설로 삽입된 것이다.
 

어느 날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밥을 먹다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진다. 마침 그 시각에 마쓰모토는 손님이 찾아와서 옆방에 있느라 아기를 살피지 못했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사인(死因)을 찾지 못한다.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불가사의한 운명 앞에 내던져 질 때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기의 장례식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에 휩싸인다. 그날 이후 마쓰모토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약속하고 찾아간 손님도 만나지 않고 돌려보낸다. 그날의 고통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애절함이 극도로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생은 소설 같다고나 할까. 소설은 인생의 단면을 모아놓은 조각보 같다고나 할까. 

 

 조각조각 이야기가 맞물려있는 만큼 이 소설에는 다양한 성격과 삶의 태도를 지닌 인물들이 나온다. 파란만장한 굴곡으로 가득 찬 모리모토의 인생이야기, 호기심 많은 청년 게이타로의 미행이야기, 복잡한 내면 안으로 파고드는 청년 스나가의 연애이야기, 유능한 실업가 다구치의 짓궂은 장난과 고등유민을 자처하는 마쓰모토의 개성 있는 삶, 모두가 각각 흥미로운 이야기꺼리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뜻밖에도 소세키는 ‘모험’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들의 인생이야기는 역동적으로 세상과 마주치고 싶었던 게이타로에게 ‘귀로 듣는’ 모험이 된다.

 

2. 모험이 하고 싶어

 

 517b31afc121af8dd0050d162dded611_1513099 

 

 낯선 세상을 만나 기상천외한 사건에 휩쓸리는 것, 예측 불가한 인생의 거친 물살을 헤치는 것. 여기에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더해졌을 때 모험이 성립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험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갇혀있던 좁은 지평을 벗어나는 힘이다. 그리하여 가슴 쫄깃한 긴장감과 살아있음의 생동감을 느끼는 것이 모험이다. 말이 쉽지 막상 우리는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십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위가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우리는 조금이라도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 초조불안하고 근심에 사로잡힌다. 관성의 법칙대로 굴러가는 편안한 일상은 안정을 주지만 그 대신 지겨움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게이타로는 얼마 전부터 해온 별 성과도 없는 취직 활동과 그 분주함이 다소 지겨워졌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은 벌써부터 권태를 느낀다.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게 애쓰는 일은 지겹다. 매일 먹는 하숙집 반찬도 신물이 난다. 호기심 많은 게이타로는 변화무쌍한 사건을 경험하고 싶다. “전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전혀 소용이 없네. 소매치기도 못 만난다니까.”라며 투덜거릴 정도로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게이타로에게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난다. 취직을 부탁하러 찾아간 사업가에게서 첫 번째 과제가 주어진 것. ‘오늘 4시에서 5시 사이에 기차정거장에 내리는 마흔 살쯤 되는 사내를 미행하라’는 미션이다. 단서는 낡은 외투와 검은 중절모를 쓰고 미간에 점이 있다는 것 뿐. 게이타로는 정거장에서 한 중년남자가 순백색 비단 목도리를 두른 여자와 만나는 현장을 보고 뒤를 밟는다. 유부남과 젊은 여자의 비밀스러운 관계? 두 남녀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진다. 긴장감을 느끼며 온갖 상상을 했던 미행은 허탈하게 끝났다.  

 

 517b31afc121af8dd0050d162dded611_1513099 

 

게이타로가 미행보고를 하러가자 사업가는 두 사람이 무슨 관계 같으냐고, 육체상의 관계는 있었을 것 같으냐고 짓궂게 다그친다. 게이타로가 미간에 점이 있는 남자의 집을 찾아가서 미행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들의 관계를 묻자 “고등매춘부라고 전해주게.”라는 반격이 돌아온다. 알고 보니 두 중년남자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자기 딸과 외삼촌이 만날 약속을 미리 알고 고약한 장난을 치는 사업가는 다구치. 익살스러운 대답으로 맞대응하는 남자는 마쓰모토다. 마쓰모토는 자칭 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유유자적 노는 남자. 소세키는 눈이 핑핑 돌아가는 문명사회의 속도감을 견디지 못하고 ‘여유’를 얻고 싶어 하는 인물들을 즐겨 그려왔다. 고등유민은 소세키가 만든 말이다. 돈을 벌려고 안달하지 않고 여유 있게 시간을 즐기는 지식인을 일컫는다. 『그 후』에 나오는 다이스케도 정신적으로 더럽혀질까봐 일부러 취직을 하지 않는 고등유민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이다. 고등유민은 돈과 출세 대신 개성과 취향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다.
 게이타로가 세상과 접촉한 첫 모험은 싱겁게 끝났다. 다구치는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게이타로의 정직성을 높이 사서 직장을 소개해준다. 모험도 즐기고 일자리도 얻고 정말 낭만적이다.

 

3. 자의식의 우물에서 빠져나오기

 

 게이타로와 상반되는 인물은 스나가라는 청년이다. 게이타로가 일상 속에서 모험을 열망하는 것에 비해 스나가는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몸을 사리는 성격이다. 스나가는 단 하루도 취직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마쓰모토처럼 자기철학이 있는 고등유민도 아니다. 그는 자아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이라는 정체가 그토록 이해하기 힘든 것일까?”하면서 내면의 활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괴로워하지만 하염없이 깊은 마음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는 자의식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보지도 못한다. 스나가는 다른 남자와 있는 지요코를 보고 질투심의 불길에 휩싸이면서도 이건 절대 질투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삼각관계조차 불가능하다. 그는 아예 관계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격렬한 경쟁을 해야 좋아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차라리 초연하게 연인을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연의 상처를 쓸쓸히 어루만지는 이 청년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안으로, 안으로만 향하는 생명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 밖으로 몸   을 사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5년, 312쪽)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자기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서는 생명력을 발산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와 가슴이 다툴 때마다 늘 머리의 명령에 굴종해온’ 그에게는 그야말로 가슴 뜨거운 모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명의 방향을 밖으로 돌린다는 말은 사람들과 열린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랬다면 너무나 사랑스럽고 여성스러운 지요코를 밀쳐내지 않고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보다 더 큰 모험은 없으니까.  

 

 517b31afc121af8dd0050d162dded611_1513099 

 

 이 작품의 결말은 스나가가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세상을 순례하는 길에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소설 맨 앞에 나오는 모리모토라는 사내도 여행을 떠나면서 사라진다. 소설 앞뒤로 여행과 모험을 배치시킨 수미상관의 구성이 쌈박하다. 모리모토는 “모든 모험은 술로 시작하네. 그리고 여자로 끝나지.”하면서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생생하게 인생역정을 들려주었던 남자다. 불현 듯 종적을 감춘 모리모토가 한참 후 보내온 편지에는 중국 따렌의 전기공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만주 여행담과 장춘 도박장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인생을 모험으로 만들 줄 안다. 앞으로도 계속 신기한 이국풍물과 마주치며 모험을 만들어갈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을까. 자의식의 우물에서 빠져나와 넓은 관계망을 뻗어간다면, 날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술을 연마하고 싶다. (2017.12. 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