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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의역학 | 대칭성 세계로의 여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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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아 작성일18-02-23 07:30 조회5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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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시작, 일상의 동선 살피기

청나라의 명의 오국통은 ‘축유祝由’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했다. ‘축유’는 주문이나 기도를 통해 병을 치료하는 무속적 의료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는 “‘축祝’이란 알리는 것이고, ‘유由’란 병이 생기는 원인”(오국통, 안세영 옮김, 『의의병서역소醫醫病書譯疏』 집문당, 78쪽)이라고 하여, 축유의 본래 뜻과는 다르게 해석했다. 즉 글자의 뜻을 살려 축유를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오국통이 굳이 축유라는 어휘를 재사용한 것은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알려주는 행위가 주술이나 기도를 통해 병을 치료할 때처럼 신묘한 치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안도균, 작은길, 109쪽)


  여기서 축유는 스스로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할 때 도와주는 장치이다. 현대의 우리는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서 내 몸을 맡기기 때문에, 병의 원인을 찾는다는 말이 생소하겠지만, 동의보감에서 보면 병은 삶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내인(內因)으로 과도한 감정인 칠정과 적절하지 못한 음식은 당연히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외인(外因)인 육음(六淫,풍·한·서·습·조·화 등 육기六氣가 지나친 것)도 나의 면역력이 강하면 방어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생활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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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유를 말했던 오국통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두통과 복통을 자주 겪었고, 20대 후반에는 극심한 두통으로 매일 오후마다 구토를 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내가 스스로 아픈 이유를 찾는다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 병원을 전전하였는데, 하나같이 스트레스성이라며 회사일 혹은 집안일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했다. 뭔가 병명이 확실하면 안심하겠는데, 자꾸만 맘을 편히 가지라고 하니, 정말 더 신경 쓰이고 더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되었다. ^^;; 솔직히 직장생활 하면서 이정도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이럴 때 ‘축유’를 해주는 의사가 있으면 어찌되었든 그 처방에 따라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두통은 비위가 음식물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그런 거다. 비위를 좋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사지를 많이 움직이는 게 좋으니 일단 많이 걸어라. 그리고 소화를 못시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상황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는 관련이 되니 지금 본인이 뭘 회피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뭐 그런 식으로 조언을 들었다면 아픈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일단 실천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일상을 살피다보면 어떤 지점에서 걸려 넘어졌는지, 문제를 어떤 식으로 회피하고 대충 뭉개려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감이 잡힌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나는 외적으로 볼 때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으나, 대운에 인성이 들어와서 그런 건지 뭔가 가치 있고 심도 있는 일을 하거나 책을 통해 인생의 통찰을 얻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너무 잡스럽게 느껴졌고 그런 일에 시간을 소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망상만 가득하니 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고, 아마도 아무 의욕 없는 직원이었을 것이다.

 잡스러운 걸 싫어했던 당시 내 마음 때문에 소화가 안되고, 그렇게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위는 외부의 지기를 받아들여 그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단 뭐든지 잡탕으로 잘 섞어야 하는데, 꼭 필요하거나 의미 있는 일만 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런 작용을 가로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비위가 좋다’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일 때를 보면 그 사람은 완전히 이질적인 사건이나 일을 만나면 일단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켜서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당시 나의 경우 재성을 써서 인성을 제어했으면 아마도 쓸데 없는 망상에 빠지는 대신 사소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일들에도 힘을 쏟으면서 흔히 말하는 삽질이 왜 필요한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병이 있으면 스스로 그 원인을 추적해보고, 사주명리를 통해 삶의 무게 중심을 바꾸는 것. 이것은 이전과 다른 삶의 양식을 창안한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사랑이나 인류학적 장치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축유와 벡터는 다르지만 결국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방식이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 나타난다. 서지안의 아버지는 한때 중소기업 사장님이면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으나, 사업이 망하면서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낀다. 그래도 끝까지 가족이라는 끈을 붙들고 있다가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들에게 외면당하자 말 그대로 죽고 싶다고 느낀다. 그래서 상상임신처럼 상상암을 겪게 되는데, 막상 죽음을 준비하게 되니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자 하며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던 클래식 기타를 사서 배운다. 이 아버지는 병을 낫기 위해 자기 일상을 살핀 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병이 너무 커서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결국 그 병으로 인해 그 동안 자신이 살던 방식,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한걸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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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것은 이 아버지는 위암을 상상암으로 겪었다. 가족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이데아가 있었기에 가족끼리 신뢰가 깨질 수도 있고, 서로 보듬기는커녕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오롯하고 순정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있으면 잡스러워지는 걸 참을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이 아무래도 비위와 관련된 병을 많이 겪게 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아닐지!

 어찌되었든 자기 힘으로 혹은 축유의 도움을 받아 병의 원인을 찾으면 그것 자체로 신묘한 치료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를 통해 이전과 다른 일상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그럼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인가? 융이라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융은 하나의 강력한 감정, 즉 단일한 콤플렉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다양한 콤플렉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고정된 삶의 방식은 빈곤한 콤플렉스를 만들어내고 당연히 병을 일으킨다고 답할 것이다.

 
 융은 이 경험으로 신경증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한다. 문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보겠다는 자아의 고집이었다. 자연이란 변화 그 자체이기에, 한때는 적합했던 삶의 태도도 시간이 자나면 적합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려는 마음이 병의 원인이었다. 요컨대, 새로운 삶의 관계기능인 무의식의 방문을 회피하는 자아가 만든 병이 신경증인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 신근영,  북드라망, 187쪽~188쪽)


 앞에서도 말했지만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확장을 통한 고양감이 그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의역학적으로 보면 변화가 두려워 새로운 삶을 창안해내지 않으면 결국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어딘가가 아프다면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 일상의 동선을 살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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