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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의역학 | 권력의 의존성과 폭력의 상관관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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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아 작성일18-04-27 07:23 조회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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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힘을 제어하는 복령

 

개별적인  하나의 한약은 ‘본초(本草)’라 불린다. 본초에는  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 나무껍질, 동물, 광물  등 약이  될 수  있는 자연물  전체가 본초의  대상이다. 이 본초들이  두 가지  이상 모여  하나의 조합을  이룬다. 이것을 ‘방제(方劑)’라 한다. 이  복합약물을 처방하는  원리 중에 ‘군신좌사(君臣佐使)’라는 것이  있다. 군은 군주, 즉  임금이다. 신은 국왕의  사무를 돕는  측근이다. 좌는 견제  세력이다. 대간(臺諫) 같은  감찰 장치라고  보면 된다. ‘사’는 사신  혹은 원로원  같은 역할을  한다. 군신좌사론은 약물들을  국가의 기구에  빗대어 약물을  구성하는 독특한  처방론이다. 이것은 한의학의  원리가 얼마든지  서사적인 구성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북드라망 블로그, 방제와  병법, 도담)

 

 예를  들어 피곤하고  식욕이 없을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처방하는 사군자탕에서  인삼은 군, 백출은  신, 복령은 좌, 자감초는  사에 해당한다. 군주인  인삼은 기(氣)로 변환  가능한 진액(津液)을 비위에  대어 준다. 신하인  백출은 인삼을  도와 비기를  보하기도 하지만  비위에 있는  기존의 묵은  습(濕)을 뺀다. 감찰역할을  하는 복령은  비위에서 제거한  습기를 오줌으로  내리면서 기운을  뺀다. 백출은 습을  빼면서도 인삼을  돕는 역할을  했지만 복령은  기운까지 빼버린다.

 흔히  보약이라고 하면  인삼을 떠올릴  정도로 인삼은  아주 효과가  좋은 보기약이다. 그러나  속에 열이  많은 소양인  체질이 인삼을  잘못 먹으면  열독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약성이  강하기 때문에  복령이 인삼의  힘을 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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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기생하는 균체, 복령

 복령이  없으면 인삼이  기운을 넣어주지만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힘이 없기에  오히려 혈과  기의 순환이  정체되어 소화도  잘 안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나타난다.

 복령이  없는 사군자탕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평생을 함께  한 류머티즘을  빼고는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다는  오창희 선생님께서는  질병이 쉬지  않고 괴롭혀준  덕분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엄청난  통증을 가져온  류머티즘은 사주적으로  보면 나를  제어하는 관성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해석하신 게  놀랍고도 참신했다.

 

 나를  나타내는 비겁을  중심에 놓고  관계도를 그리면  상생 상극의  관계가 그려진다. 그런데  내 사주의  배치를 보면  내가 극하는  기운인 재성도, 나를  극하는 기운인  관성도 없다. 그러니  사주상으로 보면, 내가  무언가를 제어하는  기운도 없고  나를 제어하는  기운도 없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는  식상의 기운은  과다하다. 그러니 내  사주의 배치가  힘의 균형을  맞추면서 순환하려면  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도  사주에 새겨진  여덟 글자처럼  일생 동안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많은 것들을  만나며 살아왔겠지만  류머티즘만큼 그  역할을 충실히  해 준  건 없는  것 같다.

 류머티즘과  씨름하며 종국에  맞닥뜨린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면서  그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  별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놀기 좋아하고  먹는 것  좋아하고 친구들  좋아하는 내가  류머티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물론 류머티즘이  아니어도 또  다른 고민들을  만났겠지만, 잠시 잠깐  고민하다가 당장  즐거움을 주는  곳으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이놈처럼 끈질기게  나를 물고  늘어져 주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 질문을  하며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파서 살았다, 오창희, 북드라망, 291쪽)

 

 생명력 보존, 일상에서 복령과 마주하기

 

 사주에서  오창희 샘처럼  식상이 많은  직원은 보통  업무속도로 빠르고  기획력도 좋다. 자신이  업무능력이 좋으니  아무래도 동료나  팀원들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럴 때  자신이 타고난  기운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더 능력  발휘 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고, 가시화되지 않는  다른 지점에서는  그들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뭐든지  양적(量的)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게  제일 억울한  신체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가능하겠는가? 삶의  어떤 국면에서  죽을 만큼  힘들어서 부득이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비자발적으로  마음의 회로를  바꿔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습관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남들보다 업무성과가  좋다고 평가  받으면 타인의  덕을 생각하기는커녕  승진이나 연봉인상으로  그만큼 보상받길  원한다. 물론 이때  절대적 금액보다도  남들보다 얼마큼  더 받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고  소위 회사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그 상태를  지키고 싶어서  인정욕망에 자신을  내맡긴다.

 인정욕망에서  자유로운 직장인은  거의 없지만, 유독  거기에 매몰된  상사와 함께  일하는 건  상당히 피곤하다. 인정받는다는  건 말  그대로 준거점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이 척도에  매달릴 경우  타인은 물론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까지 모두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본인이 목표  달성을 위해  종종 타인을  통제하려 하기에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자기는  능력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평판까지도 추구할  경우 그는  모든 에너지를  타인과 주파수를  맞추고 눈치  보는 것에  쓰기 때문에  자기 몸이  들려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이건  타인을 넘어  자신과도 접촉할  수 없기에  생명 차원에서  버틸 수  없는 삶이지만, 여하튼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전략이  어찌어찌 잘  먹혀서 승승장구하며  직장생활을 했다고  치자. 그럴 경우  앞의 인용글에서도  나왔듯이 자신을  컨트롤해주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맞닥뜨리지 않기  때문에 결국  너무나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팽겨친 삶을  꾸렸을 뿐이라는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 나에게  복령으로 작용하고  있는 사람이나  사건들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자기 나름의  고민을 안고  그에 대해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그런 괴로운  일들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시점을  알려주는 시그널로  작동하려면 그 순간 최대한  그 경험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느끼는  감정과 감각에서  떠나는 방식으로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떠나는 모든  건 중독이다.

 

 자신을 [몸으로부터] 떠나보내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은  주변 환경에  예외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공동 의존의  원초적 행태를  찾아볼 수  있다. 중독 현장은  공동 의존  현상의 기록과  논의가 빈번히  이루어지는 포럼이었다. 왜냐하면  그 구성원이  안전을 느끼고  사랑받기 위해  다른 구성원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문제의  가족에서 중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의 바깥에  주의를 두면서  실제로 기능을  수행하는 동안  그 기능은  신체적 탈감의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깥을 보고 있는 동안 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불교인들은 중독을 "습관 에너지"라고 부르며 각성과 생동감이 습관적인 경향에서 풀려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존 브래드쇼는 중독이 항상 생명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몸으로 떠나는 여행, 한울, 크리스틴 콜드웰, 6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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