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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의역학 | 소외, 현실을 산다는 감각에서 멀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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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아 작성일18-09-28 09:00 조회1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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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라이프〉에서 사고로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는 동생 예선우(이규형)에게 형 예진우(이동욱)가 자기 삶을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건네는 위로가 있다.  
 의대까지 나와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널 보며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너는 그런 사람에게 희망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동생의 답이 인상적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 삶이 누군가한테 용기를 줘야 하는데? 난 그냥 사는 거야. 이 삶이 난 그렇게 기쁘거나 좋지가 않아”
 SNS에 ‘작가이자 코미디언, 바느질을 좋아하는 장애도 있는 사람’으로 프로필을 썼던 스텔라 영은 자신을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이 아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해주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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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코미디언, 바느질을 좋아하는 스텔라 영​

 

우리는 종종 이처럼 다른 사람을 하나의 코드로 환원해서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이뤄지는 방식은 아마도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이란 드라마에도 나오는 듯이 사람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는 것일 텐데, 그렇게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다보니 성형이 엄청나게 성행하고 있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계속 다른 사람과 견주면서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게임의 수행자가 되고 만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소외시키는 방식이 소비에서도 일어난다. 성형도 중독적으로 계속하게 되는 것처럼 맛집 탐방, 명품브랜드에 대한 집착 등도 끝이 없다. 왜 그럴까?


 

  인간은 소비할 때 물자를 받아들이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에 부여된 개념과 의미를 소비한다. 보드리야르는 소비란 ‘관념론적 행위’라고 언급했다. 소비되기 위해 물자는 기호가 되어야 한다. 기호가 되지 않으면 물자는 소비될 수 없다.
 기호와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기호와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라는 행동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무리 맛있는 식사라도 먹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배는 80퍼센트만 채우라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권고를 무시하고 마구 먹는다고 해도 식사는 언젠가 끝난다. 항상 80퍼센트만 간소하게 먹기는 힘들다. 때로는 호화로운 식사를 실컷, 조금 과할 만큼 먹고 싶다. 이것이 바로 낭비다. 낭비는 생활에 윤택함을 가져온다. 그리고 낭비는 어디쯤에서 멈춘다.
 이에 비해 소비는 ‘멈추지 않는다’ <중략> 소비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식사 혹은 음식이라는 물질이 아니다. 그 가게에 부여된 관념과 의미다. 이런 소비 행위에서 가게는 기호가 된다. 그래서 소비는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한권의책, 134쪽> 

 

 

 자본주의 자체가 끝없는 소비에 기반하고 있으니 만족할 수 없는 상태로 계속 내몰리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기호화하는 것은 물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자기 몸이나 타인을 대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관념을 소비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맛집, 명품, 성형수술 등 상품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종의 환상에 덕분에 즐겁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이런 도식은 중세시대 사랑에 대한 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성애이론(erotic theory)은 남자가 여자와 사랑에 빠질 때, 그는 여성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가능성들』, 114쪽>
 그런데 이렇게 대상 그 자체와 만나지 못하고 인상이나 기호로 만나다 보면 살아있다는 실감, 즉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소비 지향적 사회에서 우울증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해도 만족감은 느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 <강남미인>에서도 모태 자연미인으로 불리는 현수아는 미모가 뛰어난데도 본인이 예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이미지, 아무거나 잘 먹는데 살이 찌지 않는다는 이미지 등을 지키기 위해 항상 상냥하고 순진한 척해야 하고 먹고 바로 토하는 것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게 무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살다보니 흔히 말하는 킹카는 당연히 자기를 좋아해야 하고 그 외 모든 남자도 자신만을 바라봐야 직성이 풀리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이렇게 그녀는 타인을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이미지로 만나며 소외시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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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 위해 예쁘고 귀여워야 한다'에서 시작된 현수아(왼쪽)의 강박


 고쿠분 고이치로는 관념론적 행위인 ‘소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물건을 취하는 것’이란 그 물건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의식주를 즐기는 것, 예술과 예능과 오락을 즐기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314쪽>  
 즐긴다는 건 예컨대 음식을 좋아하면 음식과 관련된 만화책, 역사책 등을 섭렵하여 배경지식을 넓혀서 맛을 더 잘 음미하게 된다거나, 영화를 좋아하면 그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촬영기법은 무엇일까 공부해 본다거나 뭐 그런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뭔가를 즐기다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관념론적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 ‘즐긴다’ 혹은 ‘알았다’라는 실감을 통해 외부를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일종의 훈련을 통해 이런 실감을 해보면 우리 신체는 점점 어떤 것에도 하나의 코드만 작동하여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앞에서 얘기한 드라마 <라이프>에서 예진우는 동생 예선우가 사고를 당하기 전처럼 걷고 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양쪽 다리가 멀쩡한 예선우의 환시가 종종 보인다. 그런데 예선우가 죽을 수도 있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평생 업고 다녀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점차 환시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동생을 정말 사랑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동생을 ‘장애’에 방점을 찍어서 바라보았기에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살아 있기만 해주면 좋겠다고 마음자리가 바뀌면서 동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이후에는 둘이 함께 처음으로 여름휴가도 가는 등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지금 자신이 만나는 사물, 사건, 사람 등 그 어느 지점에서 삶을 실감하기 어렵다면, 그건 소비의 방식으로 일상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자기를 소외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시점이라는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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