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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꺽정시대 | 희망 없는 걸음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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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차리 작성일18-10-03 15:48 조회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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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리뷰 ⑦

 

희망 없는 걸음걸음 

 

성승현

 

 

박유복, 매사가 조심스러웠던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번 편에서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유복이 어릴 때를 생각해보자. 꺽정이의 힘과 봉학이의 활솜씨에 눌려 몰래 재주를 배우던 유복이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복수에 대한 집념이 이유의 전부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복이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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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_ 희망 없는 걸음

어릴 때 헤어졌던 유복이가 돌아왔다.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어 모두를 애타게 했던 장본인이다. 유복이를 찾아 본고향까지 찾으러 다녀왔던 꺽정이는 유복이의 말만 나면 “그 자식 죽었어”하면서 언짢아 했다. 살아있다면 이렇게까지 소식을 전하지 않을 녀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유복이는 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앉은뱅이로 지냈다. 이모를 의지하고 살 생각으로 배천으로 내려갔는데, 이모에 이어 어머니까지 죽었다. 이모부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열입곱살이 되던 해에 앓기 시작해서 꼬박 3년을 앓다가 완구히 병줄이 놓여 살만하니까 두 다리의 무릎 아래가 힘이 없어서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 십년을 앉은뱅이루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처까지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재주를 닦는 데 재미를 붙여 하루 해가 긴 줄을 모르고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십년이 지난 어느 날, 낯모르는 노인 한 분이 들어와 유복이가 병신인 것을 불쌍히 여기구 약을 해주었다. 처음엔 환약 두어 줌으로 다리를 조금 낫게 하더니, 다시 환약 한 봉지를 주었는데, 그것으로 걸음을 걷게 되었다. 이에 유복이는 그 어른을 따라다니며 몸수고를 하므로써 은혜를 갚았다. 유복이는 노인을 따라다니며 차력약을 얻어먹었는데, 그 이후로 걸음도 잘 걷게 되고, 힘깨나 쓰는 장정 사오십 명은 무섭지 않을 정도로 힘이 세졌다.   

 

노인이 노환으로 죽게 된 이후, 유복이는 남아있던 숙제를 하기로 결심한다. 원수를 찾아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큰골 노첨지네를 찾았다. 그는 이제 칠십 먹은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력이 좋아 새파랗게 젊은 작은마누라를 얻었고, 아이도 낳았다. 게다가 수단이 좋아 형세도 점점 늘고 있었다. 

 

유복이가 노첨지를 죽이려고 그 집으로 들어가자, 노첨지는 유복이를 보고 “귀신 보아라!”라고 소리를 쳤다. 젊었을 때 무명 세 필에 팔아먹은 친구의 모습이었다. 유복이는 “이놈아, 정신 차려라. 네 배를 가르구 간을 내서 씹구 싶지마는 드러워서 내가 고만둔다. 네 모가지만은 나를 다구. 우리 아버지께 갖다 드리겠다.”(135쪽)며 환도를 빼 노첨지의 목을 쳤다. 그렇게 아버지의 복수를 마치고 노첨지의 목을 챙겨 도망하게 되었다. 

 

 

귀신_ 두려움 없는 걸음

유복이는 도망을 치다 최영 장군의 사당으로 유명한 덕적산에 들어갔다. 그 사당은 고려 말년 영웅으로 큰 공로를 세운 최영 장군을 기리어 지어진 사당이었으나, 지금은 무당들의 밥그릇이 되어 있었다. 장군당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병 있는 사람은 병이 낫고 아들 없는 사람은 아들을 낳았다. 그 대신 여러 사람의 재물은 무당의 손으로 들어갔다. 요사스러운 무당 입에 놀아나서 장군의 귀신은 희한하게 잡탕스러운 귀신으로 변해 있었는데… 죽은 최영 귀신이 산 마누라와 동침을 원한다 하여, 근처 동네에서 숫색시를 뽑아다 장군당 옆 별채에 두었던 것이다. (도깨비 신부의 원조격인가. ^^;) 유복이가 덕적산을 지나던 해에 새 마누라가 뽑혔는데, 산상골 최서방의 맏딸이었다. 과거에 마누라가 바뀌는 과정에서 이를 피해 도망갔다가 그 집은 집대로 염병에 전가가 폭망하고, 산 밑 동네에까지 해가 미쳐 흉년에 못된 병이 돌아 사람이 많이 사망한 사례가 있어 누구도 이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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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최서방 맏딸을 최영 장군에게 시집 보내는 날이었다. 큰굿 열두거리를 끝내고, 장군당에 새 마누라를 침실에 놓고 나왔다. 장군당에서는 마누라 말고는 아무도 잘 수 없었는데, 특히 사내는 밤에 당 근처에만 올라와도 장군의 벌역이 내려서 당장에 급살을 맞는다고 하여 사내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처녀는 발발 떨며 몸을 도사리고 있었는데, 방문이 부스스 열리더니 장군이 들어섰다. 장군은 방구석에 놓인 상 앞으로 가서 떡이며 실과며 다른 음식을 혼자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처녀의 몸을 끌어안고 누웠다. 처녀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소르르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장군의 귀신이 아니라 상투 있는 사내가 옆에 누워 있었다. 유복이었다. 유복이는 처녀가 당집 지키는 무당인가 하다가, 그 사연을 듣게 되었다. 처녀가 장군의 벌역이 내려서 두 사람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니 “산 장군이 온대두 겁날 것이 없는데 그까짓 죽은 장군이 오면 우리를 어찌할 텐가. 조금도 근심 말게.”(159쪽)하고 씩씩하게 말했다. 유복이는 처녀가 맘에 들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박유복이란 사람인데…….”를 시작으로 자기 아버지가 노가의 모함에 죽은 것, 어머니가 한 품고 죽은 것, 자기가 앉은뱅이로 세월을 허송한 이야기와 병을 고친 이야기, 표창질 이야기를 다 했다. 

 

둘은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도망하기로 한다. 만반의 준비를 하여 도망하는 중에 청석골을 지나게 되는데, 산중에 있는 오가네 집에 하룻밤 묵게 된다. 유복이 맘에 수상한 집 같기는 하나, ‘외딴집에 도둑놈이 있기루 백명이 있을까 천명이 있을까’ 싶어 들어간 것이다. 처음에 오가는 유복이 내외에게 있는 무명을 뺏기 위해 두 사람을 죽이려했지만, 유복이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항복한다. 

 

“사내자식이 싸우면 적수요, 사귀면 친구지 잔말 말구 올라갑시다.”(195쪽)

싸움에서 진 오가는 너스레를 떨며 술을 권한다. 술을 먹다 친해져 유복이는 자기 사연을 털어놓게 된다. 오가는 유복이에게 자신이 도적질로 지내고 있음을 털어놓고, 오가의 마누라는 유복이 처에게 함께 살자고 달랜다. 단지 피신하기로 말하면 여기 있는 것이 더 든든다면서. 결국, 유복이 아내가 수양딸을 자처하여, 유복이는 청석골에서 도적놈의 사위 노릇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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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이의 걸음걸음을 지켜보며 든 생각은 유복이가 원래 이렇게 담대한 사람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의뭉스럽다, 미련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살았는데 말이다. 오랜 병을 묵묵히 견디고, 거침없이 복수를 하고, 귀신의 벌역 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은 그가 ‘희망’으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유복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오직’ 살아냈을 뿐이다. 언제 나을지 모르는 희망 없는 병이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오랜 세월이다. 쓰일지도 모르는 재주를 배우며 자칫 죽고 싶은 마음과 싸운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도 그렇다. 노첨지를 죽이면 자신은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 뻔하고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삶이 눈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니까 할 뿐이다. 이처럼 희망으로 삶을 살지 않는 유복이가, 대가를 바라며 살지 않는 유복이가, 귀신의 벌역을 두려워하겠는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는 걸음걸음이지만,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헛된 것임을 아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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