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 시대-③ '자기 버리기'의 영성 > 글쓰기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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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축의 시대-③ '자기 버리기'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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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5-03 01:30 조회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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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2) 『축의 시대』-③ 

 

 

 

‘자기 버리기’의 영성

-기원전 800년~700년경-


 

김지숙


 

  이 시기에는 축의 시대의 정신의 씨앗이 될  케노시스 즉, ‘자기 버리기’의 영성이 발견된다. 자기 버리기란 자기를 비움으로써 그 자리에 타인을 놓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감을 형성하기 위한 출발이다. 이는 이미 축의 시대가 열린 인도를 제외한 3개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민족적 에고에 구멍을 내다


  기원전 8세기, 여로보암이 다스리고 있던 북부 이스라엘은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빈부 격차와 도덕적 타락은 감출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이기도 했다. 언급했듯이 전통적으로 중동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중요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나서서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 중심에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었다.

 

  남부 유다의 농부였던 아모스는 그의 에고를 야훼가 차지하여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었다. 야훼와 감정적으로 완전히 결합되었던 것이다. 야훼는 그에게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여보로암이 죽임을 당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파괴당하고 그 백성들은 쫓겨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아시리아를 도구로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것. 이를 전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불의를 저질러도 야훼는 다 용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모스는 야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에고에 구멍을 내고 싶어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자기 버리기’의 영성-축의 시대 이상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에 대한 최초의 표현 가운데 하나다.”(160쪽) 아모스가 야훼의 분노를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도 그것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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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와 그의 부인 고멜 

 

  북부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호세아도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사람들은 바알 신을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매춘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호세아의 아내 고멜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 삶을 통해 야훼와 공감하게 되었다.”(160쪽) 호세아는 살인과 강도질, 성적 방종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알 신앙의 도덕적 타락을 비난하며 당연시 여겨지던 종교적 관행에 의문을 제기했다. 믿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다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일까.  호세아는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살피고 자기 성찰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신의 사랑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기를 진실로 고대했다.

 

  그렇다. “종교는 공동체의 자부심이나 자존감을 부풀리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도록 권유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162쪽)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다

 

  ‘그리스’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비극? 그리스 신화? 모두 다 맞다. 하지만 내 경우는 민주주의가 먼저 떠오른다. 초중고 사회 시간에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머리에 박혀있다.^^ 사실 그리스에서 그런 정치 형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폴리스’라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스는 다른 나라들이 제국의 형태로 나아갈 때 지방 자치를 실현한 나라였다. 기원전 8세기가 그러한 때였다. 폴리스의 가장 큰 특성은 무엇일까. 바로 ‘차별 없음’이다. 귀족이나 농민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가 있었다. 누가 말을 잘 하고 그래서 누가 더 잘 설득할 수 있느냐가 차이를 만들었다. ‘경쟁’과 ‘명예’가 중시되었다. “따라서 폴리스에서는 자기 버리기 대신 격렬한 자기 중심주의가 넘쳐났다. 또 호전성도 내재해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 장군 아킬레우스가 그런 인물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되자 즉시 그의 부대를 전장에서 빼내버린다. 그 과정에서 절친 파크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만다. 무자비함과 분노밖에 남아 있지 않는 아킬레우스. ‘그깟 명예가 뭣이 중헌디?’라고 말해선 안 된다. 이들에게서 명예를 빼면 시체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 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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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걸하는 프리아모스

 

  하지만 호메로스는 이런 영웅적 이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반전의 시작이다. 트로이의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춘다. 아들 헥토르의 주검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이 모습에서 아킬레우스는 무너지고 만다. “늙은 왕의 완전한 겸손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며 통곡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194쪽) 자신의 아버지도 프리아모스의 입장이라면 똑같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아킬레우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를 통해 ‘자기를 버리는 공감’을 경험했으며 그에게서 성스러움을 보았다. 아킬레우스의 마음에서 자비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성과 필로테스(사랑)를 회복”(195쪽)하는 순간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이라면 악에서 선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호메로스가 그린 신들이 그 증거다. 그리스 신들은 다 짝이 있다. 그런데 역설로 짝지어진 희한한 관계다. 이를테면 “아레스와 아테나는 둘 다 전쟁의 신이지만, 아레스는 전쟁의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측면을 대표하는 반면 아테나는 승리의 영광을 체현한다.”(199쪽) 포세이돈은 노년, 아폴론는 젊음을 상징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짝을 짓기도 하는데 이때 아폴론은 균형과 절제를, 디오니소스는 혼돈과 해체를 뜻한다. 그리스 신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분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운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200쪽) 이런 이중성은 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이 호메로스의 주장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선하거나 전적으로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비움을 통해 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호메로스의 이상과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제의 학문, 예학의 출현

 

  기원전 8세기, 중국에서는 춘추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나라는 더 이상 제후국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이었다. 환경조건도 더불어 나빠졌다. 벌채와 개간으로 야생동물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사람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왕은 과거의 전례에서는 핵심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는데, 신민이 어떻게 그의 힘을 계속 숭배할 수 있을까? 궁핍의 시대에 어떻게 과거의 희생 제사를 유지할 수 있을까?”(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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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격한 ‘통제와 절제’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데 암묵적 동의가 이뤄졌다. 제의 전문가들은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없게 바꾸어 놓았다.”(204쪽) 그 결과 새로운 제의 학문인 ‘예학’이 출현할 수 있었다. 《서경(書經)》, 《시경(詩經)》, 《역경(易經)》, 《악경(樂經)(현존하지 않음)》, 《춘추(春秋)》가 편찬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자기 버리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서경(書經)》에서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전기를 따로 편집해 놓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요 임금의 ‘공손’과 ‘겸양’은 통치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이자 덕이었다. 순 임금 또한 진실로 예를 아는 사람이었다. 임금이 되어서도 부모를 끝까지 예를 다해 모셨으며, 나중에 임금의 자리에 물러설 때도 요 임금이 그랬던 것처럼 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춤으로서 태평시대를 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예가 교묘하게 이용되면서 케노시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겉으로 볼 때는 겸손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위신과 이익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편법을 막기 위해 노나라 제의 전문가들은 《예기》를 지어 전례의 원칙을 정리 했다. 즉, 전례의 가치와 의미를 완전히 인식할 때만이 의식은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행한다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실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 새로운 제의의 학문, 예학은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출가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


  기원전 8세기가 되면 개혁된 전례에 따라 인도에서는 혼자서 제의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가장들은 신성한 불을 앞에 두고 집에서 전례를 드렸다. 그런데 아예 가정을 나와 출가자가 되는 남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제의 개혁가들은 인간의 아트만, 즉 내적인 자아가 바로 프라자파티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희생제인데, 왜 외적인 시늉을 하는가?”(213쪽)라고. 말하자면 출가자들의 생각은 자신들의 삶 자체가 희생제인데 왜 굳이 희생제를 드리느냐는 것이다. 

 

  출가자들은 사회에서 떨어져 숲 속에서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의 삶은 고통스럽고 끔찍했다. 한마디로 “끝없는 희생이었다.”(214쪽) 모든 욕망을 내려놓아야 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참아야 했다.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 곳에 이틀 이상 지내지 않은 것도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의 차단이었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물론 씨앗조차도 해쳐서는 안 되었다. 해롭든 해롭지 않든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대했다. 그들은 은자들보다도 훨씬 급진적이었다. 은자들은 밀림에서 가정을 이루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동물이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기도 했는데 말이다. 

 

  출가자의 철저한 금욕생활은 바로 자신을 태우는 희생제였다. 자신을 내려놓고 아힘사(불살생)를 실행하며 “출가자는 자신의 아트만, 즉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브라만과 통일될 수 있었다.”(214쪽) 그렇기에 출가자들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자기 중심적 삶의 다름이 아니므로. 출가자들은 세속사회와의 단절을 선포하며 영적 탐구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자기 내면을 탐구해 스스로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하고 아힘사에 헌신하는 수도자였다.”(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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