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 시대-④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 글쓰기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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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축의 시대-④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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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5-10 01:29 조회2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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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2) 『축의 시대』-④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기원전 700년~600년경-

 

김지숙


 

  이 시기에 인도에서는 아트만에 대한 지적 탐구가 본격화되었다. 그리스는 중무장 보병의 언어를 채택하면서 과학과 철학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국은 전례 개혁을 단행하며 예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중원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기록된 경전, 유대교가 탄생했다. 

 

 

자기 발견의 탐구에 나서다


  인도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트만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트만은 곧 ‘자아’이자 브라만이기에. 《우파니샤드》의 핵심도 이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재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221쪽)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사람은 야지나발키아와 우달라카였다. 

  

  야지나발키아는 인간이 불멸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궁극적 실재인 아트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해서 아트만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규정될 수 없기에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느낄 수는 있었다. 아트만과 하나가 될 때는 “차분해지고, 안정되고, 서늘해지고, 끈기가 생기고, 침착해진다.”(229쪽)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아트만, 즉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행위의 문제였다. 행동이 올바르면 자신을 좋게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존재가 고양된 상태인 브라만에 이를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충동, 감정 같은 정신적 활동도 포함된다. “이제 카르마(행동, 업)는 인도 영성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231쪽)


  우달라카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달라카는 자신의 아들에게 아트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그것의 실현을 강조했다. 앎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달라카는 일단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제를 내려놓는 일이 바로 아트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훈련은 사람들이 최고라 여기는 부, 명예, 지위가 덧없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하고 결국 자신에게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그것을 일상적 삶의 양식으로 구현해 낼 때 비로소 아트만과 하나가 되어 브라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트만은 거창하고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아트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데 106년이 걸렸다는 인드라. 그가 한 일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스승을 위해  나무를 하고, 스승의 불을 보살피고, 집을 청소하고, 금욕을 실천하고, 전쟁을 그만두고, 아힘사를 실천”(239쪽)하는 것이었다. 인드라는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겸손하게 살았다. 그것이 진심으로 평화와 기쁨을 주었기에 인드라는 이전과 다르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과 하나가 된 인드라다. 

 

  그렇다. 이 시기에 인도인들은 ‘어떻게 살 때 자기의 삶이 브라만에 가닿을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고통과 필멸을 넘어설 수 있는 영적 기술의 개발에 골몰하고 있었다. 

 

 

중무장 보병, 로고스의 시대를 열다

 

  기원전 7세기에 이르자, 그리스는 정치적 군사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귀족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번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농민에 대한 착취는 심해지고 있었다. 귀족이 법원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제받을 길도 없었다. 잘못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들의 명예 때문에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명예가 폭력이 되고 있는데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킬레우스만 보더라도 그의 개인적 명예 때문에 그리스 군사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이제 사람들은 영웅적 에토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헤시오도스가 바로 그 선봉에 있었다. 그리스의 특징은 ‘정의’가 되어야지 “영웅적 전사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무절제(히브리스)”(243쪽)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헤시오도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신들의 계보》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히브리스가 자멸을 가져오고 결국 인간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와 달리 어떤 농민들은 히브리스에 대항할 장치를 고안해냈다. ‘체념’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옹호하는 귀족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참주제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들의 통치가 가혹할 때는 반기를 들며 저항했다. 이제 “사람들은 제대로 조직만 되어 있으면 지배 계급의 착취를 제어할 수 있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249쪽) 영웅적 이상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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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것과의 근본적 단절은 ‘중무장 보병’이라는 군사적 혁신에서 비롯되었다. 군대는 “소규모 귀족 전차 부대”(249쪽)가 아니라 대규모 밀집대형으로 움직였다. 개인의 이익은 군 전체의 이익에 흡수되었다. 개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군사작전을 짜려면 많은 전문 지식이 필요했기에 그렇다.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물론 언어는 영웅 시대의 시적이거나 상징적인 언어가 아니라 명확한 언어, 로고스를 써야 했다. “중무장 보병이 되는 시민이 늘어날수록, 로고스는 자기 자리가 분명한 언어이자 통치의 사고방식이 되었다.”(252쪽) 

 

  사실 중무장 보병은 언뜻 보기에 축의 시대의 케노시스의 이상과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심을 버리는 윤리와 타인에 대한 헌신을 장려”(251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노시스가 전쟁터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기계를 배출했다는 것, 그래서 아힘사와는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가 바로 그런 나라였다. 

 

  그러나 중무장 보병의 에토스를 계속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스파르타 방식이 먹히는 것은 사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다. 대신 중무장 보병의 언어, 로고스는 과학과 철학의 시대를 여는데 톡톡히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는 로고스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서(恕)라는 공감의 덕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주나라의 중원 장악력은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중국은 제후국들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노나라 제의 전문가들이 이뤄놓은 ‘전례 개혁’ 덕분이었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절제와 자제로 우아한 삶을 사는 군자들의 사회”(253쪽) 한마디로 ‘예’가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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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쟁도 예의 있게 치러야 했다. 따라서 상대가 전쟁을 치를 준비 되지 않았는데도 먼저 습격을 하면 전쟁에 패한 것이었다. 송나라가 강력한 초나라를 이길 수 있었음에도 그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이유로 송나라 제후가 초나라를 치지 않고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몇 년 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맞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秦)나라가 사신을 보내 새벽에 싸우자고 전했다. 사신이 초조해하는 것을 본 진(晉)의 부관들은 지금 당장 공격하자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약속한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은 비겁한 짓이며 그것은 군자의 도와 맞지 않기에. 이처럼 전쟁은 ‘양보’와 ‘절제’라는 예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종교적 전례이자 한편의 야외극이었다. 요컨대 “예는 쉽게 복수를 유발할 수 있는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263쪽) 

 

  그런데 예는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가족 관계에서도 중요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들은 자기의 입장에 비추어 아버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프면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버지가 행복하면 밥맛도 좋았다. 예를 통해 “아들은 서(恕,자기에게 견주다)라는 공감의 덕을 배웠으며, 이것이 중국의 축의 시대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263쪽)


  사실 전례를 받아들인 제후국 덕분에 중원의 폭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들은 동맹을 맺으며 연대와 화합을 다짐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더니 초나라의 배반으로 중원의 평화는 깨져버렸다. 과거 제의에 매달리며 아무리 설득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패자가 되고자하는 초나라의 욕망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회의적 태도가 확산되면서 과거의 전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268쪽)


 

기록된 경전, 유대교의 탄생

 

  앞서도 보았지만(축의 시대-③ 참조) 히스기야 왕이 야훼만을 숭배하다 이스라엘은 멸망직전까지 갔었다. 이를 교훈 삼으며 그의 아들 므낫세는 여러 신을 숭배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야훼의 도움으로 평화롭게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런 바램이 통했던 것일까. 므낫세의 손자 요시아가 왕에 오르자 야훼 유일 숭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무슨 명분으로 요시아는 야훼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솔로몬 성전 확장 사업 중에 발견된 ‘율법의 서’라는 두루마리로 된 ‘책’때문이었다. 거기에 적힌 말을 듣고 요시아는 책에 기록된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야훼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고 부르짖었다. “종교가 구전 전승에서 텍스트로 전환된 충격은 컸다.”(272쪽) 모호한 구전과 달리 텍스트는 확실하고 분명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책에 기록된 언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야훼 신앙은 기록된 경전을 갖춘 종교, 유대교가 되었다. 종교적 정통성을 부여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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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마리로 된 책은 《신명기》였다. “《신명기》 저자들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자신들이 모세를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272쪽) 모세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아니던가. 《신명기》 저자들은 모세를 대신할 적임자로서 요시아를 선택했던 것이다. 요시아는 책에 나온 대로 개혁을 단행했고 야훼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록된 경전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영적 가르침이 과연 글로서 온전히 전달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칫하다 정보만을 주는, 그래서 지혜를 놓치게 되어 왜곡될 수가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신명기》에서는 아모스와 호세아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얘기가 많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에게만 관대할 뿐이었고 외국인들에게는 무자비할 정도 배타적이었다. 예레미야는 “지나친 확신과 명료함은 잔인한 불관용에 이를 수 있다.(282쪽)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축의 시대의 정신에서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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