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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축의 시대-⑨ 제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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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6-14 01:31 조회2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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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축의 시대』-⑨

 

 

제국의 시대

-기원전 300년~220년경-


김지숙

 

  중국이나 그리스, 인도에서는 모두 제국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가 등장했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세워진 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다. 인도에서는 와소카왕이 마우리아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제국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과연 각각의 제국들은 어떤 출구를 찾았을까.  

 

 

법과 도덕 사이에서 


  중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질려가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통일된 중국이 나와서 안정과 평화를 되찾기를 갈망했다. 그리스인들처럼 과학이나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중국인들의 관심은 오직 중원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예전의 도덕적인 힘으로 가능하다는 시각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러기에는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났고 영토도 상당히 넓어졌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통치자들은 정치과학자들, ‘방법을 가진 자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564쪽) 소위 법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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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가들은 군주의 마법적인 능력인 도나 덕을 비웃었다.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이 받쳐준다면 자연스럽게 질서가 잡힐 것이라 생각했다. 한마디로 통치자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점에서는 ‘무위’를 강조하는 장자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인 면에서는 확연히 달랐다. 법이라는 유위가 작동하면서 평화대신 폭력을 낳고 말았다. 진나라로 건너가 중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상앙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상앙은 법으로써 진나라의 개혁을 단행했다. 전쟁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가혹하게 엄벌함으로써 차라리 전쟁에서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게 했다. 귀족이든 농민이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만 하면 똑같은 포상을 내렸다. 농민이 지주가 될 수도 있고 귀족은 언제든지 평민으로 강등될 수 있었다. 범죄자를 숨겨주는 것도 위법행위에 해당하므로 강력하게 처벌했다. 태자가 그런 일을 행하자 태자 대신 태자의 스승과 보좌진에게 묵형과 비형을 내렸다. 무시무시한 공포 정치였다. 진시황의 총애를 받은 한비자도 법가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법과 더불어 군주의 통치술을 강조했다. 군주가 벌을 줄 때는 감정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필요하다면 친구와 친족을 벌하고 적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570쪽)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평한 법이라도 너무나 가혹했기에 법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천하의 진나라도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예견했던 사람이 바로 순자였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했다. 서로 미워하고 다툼과 폭력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법가처럼 엄벌로 처벌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도덕적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이 전례의식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예를 내면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는 사람들을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양보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래서 순자는 “여전히 자비심 있는 왕만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571쪽) 이런 왕만이 악한 백성을 선으로 교화할 수 있기에 그렇다. 

 

  노자는 법가와도 유가와도 달랐다. 왕이 덕이 있기를 바랐지만 끝도 없이 백성을 위해 일을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노자는 완전한 무위의 덕을 갖춘 통치자만이 전국시대의 폭력을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그렇다. 내려가는 것이 있으면 올라가는 것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으면 강함이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도’다. 인간의 유위로서는 도저히 자연의 도를 살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통치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579쪽)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억지로 거스르는 수동성이 아닌 자연스럽게 흐르는 능동성이 생명의 본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현명한 왕은 백성들에게 어떤 것도 간섭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게 내버려 둘 뿐이다. 이런 통치자는 절대로 쇠퇴할 수 없다고 노자는 확신한다. 해와 달이 왜 영원한가. 자기를 절대로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폭력을 끝내고 싶은 중국인들은 법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하며 더 좋은 통치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영적 깨달음 보다는 세속적 계몽을 

 

  기원전 333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제국은 빛과 그림자였다. 이란이나 예루살렘 같은 곳에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잔인한 학살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앞선 문화가 전해지면서 세계 곳곳에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그리스인은 이제 자신이 태어난 작은 도기 국가와 결합돼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원전이 그들의 지평을 확대했으며.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 시민이라고 느꼈다.”(59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이런 고통을 위로하려는 철학자들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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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을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에피쿠로스학파가 그 첫 번째다. 그들의 쾌락은 광적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정원이라 불리는 공동체 안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다. 번민을 일으키는 일체의 것은 피해야 했다. 죽음과 존재는 늘 따로 있기 때문에 죽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냥 유한한 삶을 즐기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는 스토아학파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했다. 감정과 충동을 제어하고 금욕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스토아학파는 외적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가볍게 삶을 통과해 가야 했다.”(597쪽) 마지막으로 회의론자라고 불리는 피론이 있다. 피론의 목표 역시 아타락시아였다. 그래서 피론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고요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들이 보여준 태도는 축의 시대와 거리가 있었다. 자기들의 내적 평화만을 위해 고통과 정면으로 싸우기를 포기했으니 말이다. 판단 중지라는 것도 자신들의 사유 체계를 깨부수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가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말하자면 개념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요컨대 “헬레니즘의 철학자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다.”(600쪽) 더 이상 직관적 능력을 개발하며 영적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로고스에 의지하며 세속적 계몽에 만족하고 있었다. 

 

 

카르마-요가, 거리를 두다

 

  인도 역시 마우리아 제국을 건설했다. 3대 황제 와소카는 전륜성왕이라고 알려졌는데 군사적 에토스를 아힘사로 바꾸는 칙령을 발표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을 이렇게라도 덜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칙령에는 다른 종교를 배제하지 말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비와 관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아소카 왕이 죽고 나자 “인도의 종교는 유신론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인격신을 발견했다.”(608쪽) 《슈베타슈마타라 우파니샤드》에서 그 기미가 보였다. 브라만과 인도의 토착신 시바/루드라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이 신은 초월적 신이 아니었다. 자기 내부 깊숙한 곳에 살기도 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명상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었다. 자기 안에 신을 모시고 있으니 다른 사람한테도 신을 향한 사람을 베풀어야하지 않겠는가. 신에 대한 헌신(바크티)은 자기 버리기라는 영성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바크티의 핵심 텍스트는 《바가바드기타》였다. 

 

 《바가바드기타》는 크리슈나와 판다바 집안의 최고의 전사 아르주나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아르주나의 고민은 전사로서 아힘사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적에게 겨누던 활과 화살을 내려놓는 ‘멈춤’이라는 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살생을 저지르니 말이다. 크리슈나는 카르마-요가를 제안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리 두기’였다. “전사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이 경우에는 전투, 그리고 친족의 죽음-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했다.”(614쪽) 사실 전사들의 폭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복수와 개인적 명예와 부, 명성 때문이다. 이런 욕망은 전사들을 전쟁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과 거리를 두게 되면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신과 결합할 수가 있게 된다. 전사-요가 수행자가 되어 폭력적 세상에 질서를 가져올 수가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누구나 다 쉽게 신을 만나고 그래서 ‘케노시스’라는 축의 시대의 영성에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인도에서 불교보다 힌두교가 더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던 것은 이런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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