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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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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7-05 02:37 조회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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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3)『신화의 역사』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김지숙


 

허구, 그러나 진실


인간은 늘 신화를 창조해왔다.(카렌 암스트롱, 『신화의 역사』, 문학과 지성사, 2005, 7쪽)

 『신화의 역사』 첫 장의 첫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 바로 옆에 ‘왜?’라고 썼다. 정말 궁금하다. 왜 인간은 신화를 창조해왔는지 말이다. 허무맹랑해 보이고 때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를 인간은 왜 만들었을까. 하고 많은 존재 중에 왜 하필 ‘신’에 대해 그렇게 주구장창 얘기를 늘어놓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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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좋은 일, 긍정적인 일,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삶이 아니다. 뜻하지 않는 사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인생이자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에게는 결코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들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무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무덤에서 발굴된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만이 유일한 실재는 아니라고 상상”(8쪽)하면서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했다. 즉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가정해보면서 그들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드러나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신화에 나오는 신의 세계는 초월적 세계가 아닌 인간 세상의 또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들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의 세계에 나오는 신들과 인간들은 존재의 간극이 없다. “신성함은 대개 세속의 한 양상일 뿐이었다.”(12쪽)  

 

  이처럼 인류는 신화를 통해 삶의 본질이나 가치에 대해 질문했다. 그래서 신화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욕망과 본질적인 두려움을 엿볼 수 있으며 삶의 근본적인 통찰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신화란 “인간 세상의 실재의 원형”(11쪽)이며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12쪽)  허구이지만 진실인 것, 그것이 바로 신화다. 

 

 

죽음을 통과하는 법


  카렌은 모든 문화에는 ‘낙원에 대한 신화’가 있다고 말한다. 구석기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낙원을 그리워했다. 당시 사람들은 최초의 인간들이 낙원에서 신들과 매일 만나고 동물들과 조화롭게 살았던 불사의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재앙이 닥치면서 낙원은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신화의 최우선적 목표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절정의 순간에 나타나는 환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규칙적인 의무를 통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22쪽) 낙원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현재의 고단함을 잊고 싶다는 소망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늘 일상과 함께 했다. 그래서 신화에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통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수렵에 의지하며 살아갔다. 그것은 위험한 활동이었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사냥꾼의 몸보다 훨씬 큰 동물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사냥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아주 고된 노동이었다. 그러니 아무나 사냥꾼이 될 수는 없었다.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 했다. 즉 “소년은 어린 시절을 잊는 죽음을 겪고 성인의 의무가 있는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40쪽)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제 그는 부족을 위해 목숨을 내건 여정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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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꾼의 체험은 ‘영웅신화’를 낳았다. 영웅의 조건은 일단 길 위로 나서야 한다. 산전수전을 겪고 온갖 개고생을 다하며 시련을 견뎌내야 영웅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영웅이 될 수 없다.”(44쪽) 영웅 신화는 과거의 자기와 단절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매번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신석기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석기시대에 인류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하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 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면 먹을 것이 나왔으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농사는 생각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가뭄과 태풍과 폭우에 농사가 망치는 일이 잦았다. 자연의 변덕에 맞서 싸워야 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투였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신화에는 죽음과 싸우는 여신과 고난에 처한 그녀의 배우자가 등장한다. 여신은 납치된 자기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대지를 누비지만 이미 그는 불모와 가뭄의 신에게 먹힌 상태다. 대지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게 되자 남편이 소생하게 되고 대지에는 비가 내린다. 여신은 죽음과 맞서 싸워 인류에게 양식을 제공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신의 모습은 계절의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은 보편적 과정”(58쪽)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죽음과 삶이 따로 있지 않다고,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지나 인류는 문명을 창조했다. 창조는 희생, 즉 죽음의 결과였다. 미개한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인류는 엄청난 분투를 치러야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화에는 신들이 인간에게 잃어버린 낙원인 지구라트를 짓는 법을 가르쳐주는 얘기가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들의 활약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고 발전될수록 신들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인간이 신들로부터 독립하는 신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인간의 천재성이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이기에. 이제 신들은 점점 멀어져갔다. “사람들은 조상을 살찌운 옛 신화적 상상력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87쪽)

 

종교적 영감의 원천


  그런데 문명이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할까. 눈부신 문명의 발전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사람들의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도둑질이나 간음은 애교였다. 도시를 뺏고 뺏기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정착과 추방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전에 없었던 폭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동안 멀어져 있던 신화를 호명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했지만 영혼의 불가사의와 맞닥뜨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옛 신화로 회귀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91쪽) 바로 이 시기가 칼 야스퍼스가 말했던 ‘축의 시대’였다. 

 

  창조신화를 통해 영감을 받은 현자들은 폭력의 원인이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 때문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즉 세상은 누군가의 희생에서 탄생했다는 것, 그러니 타인에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에게 양보하라는 것이 시기의 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추방기간동안에도 바빌로니아가 잘 되기를 기원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현인들은 전사의 에토스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아힘사, 즉 불살생을 실천했다. 부처는 자비를 설파했고, 공자는 남이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제시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며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자기를 고집하지 않게 되고 진정으로 자기를 낮출 수가 있으니 말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텅 빈 상태는 곧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장자나 노자 역시 자기를 비울 것을 요구하며 무위를 실천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율과 능동성을 존중하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기에 탄생한 종교들은 하나같이 ‘자기 버리기’라는 영성을 강조했다. 그러지 못할 때 종교는 힘을 잃고 만다. 

 

  이스라엘이 축의 시대와 단절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오직 유일신 야훼만을  숭배하며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에고를 강조기에 급급했다. 타인을 배제하고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물론 이들 종교는 초월성이 아닌 ‘행위’ 그 자체에 방점을 찍었는데 신화를 창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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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원래 유대교 랍비였는데 바오로가 예수의 삶을 신화로 만들면서 세계적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바오로는 “역사적 사건이 신화화되지 않는 한, 그것은 종교적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115쪽)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의 신화는 기독교인들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을 변화시켰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중 루리아는 아예 정통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다. 창세기 1장처럼 질서 잡히고 평화로운 세계가 아닌 울퉁불퉁하고 고난에 찬 세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부여하며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호메트의 상승신화는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 즉 이슬람을 상징했다. 이것은 자신들을 낮추고 타인을 배려하는 실천적 행위로 드러남으로써 삶의 실재가 되었다. 신화가 진실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신화의 죽음? no! 


  신화가 종교탄생의 원천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신적 이야기나 판타지로 치부되기도 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에서 발전된 이성적 합리주의의 탓이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자기 버리기와 공감이’라는 축의 시대의 이상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적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로고스에 의지하며 서양을 과학의 길로 이끌어갔다. 이는 ‘신화적 사유와의 단절’을 뜻한다. 신화를 이성과 과학에 입각해서 바라보면 그것은 터무니없고 황당한 얘기에 불과해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충동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이성적 타락으로 해석한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다 거짓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아예 신화가 죽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낳은 물질문명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화는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연 그럴까. 

 

  최근 강원도에서 탄광이 무너진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밖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이 탄광 안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고 발파 스위치를 눌러서였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멀쩡하게 길을 가고 있던 사람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살하기 위해 뛰어내린 사람과 부딪쳐 사망하는 일, 봉사를 갔다가 엄청난 폭우로 친구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 어금니 아빠 사건 등등, 이런 사건들을 과연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비참한 형편에 놓인 인간을 보면서, 나는 죽은 듯한 우주 전체를, 그리고 어둠 속에 홀로된 인간을, 누가 그를 거기에 데려놓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죽으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우주 한구석에서 길을 잃고 있는 그런 인간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런 인간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떤다.(137쪽)

  파스칼은 현대 과학 속에서 공포를 느꼈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인간의 근원적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스칼 자신은 수학자였지만 이성적 사고뿐만 아니라 미토스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전히 신화는 필요하며 유효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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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렌은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신화를 예술에서 발견한다. 이를테면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현대인들이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데 희생제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고 있지만 결국 나 역시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고통과 연민을 공감하기에 충분한 그림이다. 신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현대 소설 역시 고대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다고 카렌은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신화를 창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조건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탐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늘 신화를 창조해왔으며 “신화를 만드는 존재다.”(145쪽) 신화의 죽음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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