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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불온한 자가 꿈꾸었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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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9-20 01:39 조회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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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6)-『바울 다시 읽기』

 

 


불온한 자가 꿈꾸었던 공동체

 

김지숙

 

 

 느닷없는 계시, 인식의 전복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카렌 암스토롱, 『바울 다시 읽기』, 훗, 2017, 50쪽)

 자칭 ‘흠 없는 유대 가문이며 토라를 엄격히 지켜 스스로를 매우 성공적인 유대교인’이라는 이 남자. 이것만 봐도 그가 유대교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하다는 바리새파의 열성 당원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론 ‘예수 추종 운동’을 박해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이랬던 그가 유대교에서 얼굴을 돌려버리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예수 추종자들을 뿌리 뽑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말이다. 왜 자기를 박해하느냐며 다메섹에서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위 ‘계시’를 받은 것이다. 이 남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기독교 탄생의 주역이자 니체로부터 격렬하게 비판받았던 사도 바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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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

 

 

유대교 전통에서 볼 때, 계시는 예언자들의 절실한 어떤 마음이 ‘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를 테면, 예언자 아모스나 이사야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을 아주 슬퍼했다. 하루 빨리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그들의 마음이 결국 환상과 환청으로 나타났고, 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를 추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예수 운동을 탄압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와 토라, 음식에 관한 규제를 엄격하게 준수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약속이자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희망과 기대 속에서 유수의 삶을 견뎠다. 하지만 그것이 형식으로 흐르면서 본질이 사라져버리는, 전도된 상황이 속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제들은 로마의 관리들과 결탁하면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이를 거세게 비판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제의적인 세부 내용을 강조하는 대신에 선지자들의 윤리적 통찰력에 관심을 보이며 자비와 박애를 강조했다.”(46쪽 재인용)  

 

  바울이 이것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신비론자들은 신을 밖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다. 그러니 바울이 형식에 얽매이며 도그마로 흐르고 있는 유대교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더 빨리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를 탄압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하느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개인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전통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물며 옳은 말을 하고 있는 예수 추종자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고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어쩌면 바울은 이미 예수 운동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환청이 들렸다는 건 그것을 경계하고 배제하는 마음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느닷없이 닥쳐온 계시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는 바울. 그렇담 다메섹의 환청을 통해 그가 깨달았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바울은 자신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토라를 흠 없이 지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즉, 토라의 기본적인 원칙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까맣게 잊고서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폭력을 거리낌 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선’을 쌓는다고 했지만 도리어 ‘악’을 범하면서 그것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의 환상은 ‘훼손된 시신과 십자가형’에 대한 의문을 결정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십자가형에게 처해지고 새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은 통념적으로 볼 때 불경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예수가 하느님 오른 편에 들려져 있다는 것은 바울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일말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나’라는 자아를 내세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기꺼이 불경한 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자기를 비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그런 예외적인 위치로 승격되었던 것이다.”(65쪽) 이것을 깨닫게 되자 바울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다시 성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세속의 기준으로 인간성을 판단하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 조롱받고 열등한 자들과 함께하는 그런 분이었다. “옛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것인가? 누가 실제로 하나님과 가까우며 누가 멀리 있는 것인가?”(66쪽) 비유대인이라면 무조건 열등하고 불경하다는 인식이 전복되는 순간이었다. “권위의 개념과 무엇이 진정으로 신성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했다.”(162쪽)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싹트고 있었다. 

 


유대교를 탈영토화하다


  사역의 삶은 유대교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했다. 사실 바울은 여전히 자신을 신실한 유대교인이라고 믿으며 토라를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째 비유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일해왔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변화의 경험은 토라의 의례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97쪽)것을 확신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만이 최후에 남는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에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가난한다는 건 ‘올바르고 의롭다’는 것이지 물질적 빈곤이 아니다. 바울은 말한다. “예수의 케노시스를 자신들의 일상적인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들은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영적인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 것”(112~113쪽)이라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그렇다면 그토록 토라와 할례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성찬식에서 성령의 강림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성찬의 예식이지 토라와 할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토라를 지킬 것을 강요하고 할례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라가 자신들을 우위에 있게 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오만이었다. 이것은 유대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역 종교로 머물게 한 요인이었다. 결국 바울이 토라와 할례의 문제를 정리해줌으로써 많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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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클레시아

 

  다메섹의 깨달음은 바울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경계를 허물고 그들 간의 차별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세웠던 공동체 에클레시아(회중)는 평등과 상호 연대의 공동체였다. 거기에서는 여자건 남자건 그리스인이건 이교도들이건 상관없이 모두 똑같았다. 바울은 그들과 한데 어울려 식사를 했다. 사역에 동참했던 베드로도 이 문턱만큼은 넘지 못했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다 하나라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다. 

 

  바울은 직접 생계를 꾸리면서 공동체를 운영했다. 일하다가 중간에 이교도들을 모아놓고 조용히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은 로마의 후원을 받으며 거대하고 웅장한 회당에서 강론하는 사제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실 대부분의 유대 귀족들이나 사제들은 로마의 경제적 도움에 의존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부정한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후견주의’의 문제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평등을 조건으로 하는 사회통제 기구”(138쪽)일 뿐이었다. 즉, 제국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의식, 다른 언어, 다른 옷, 다른 음식으로 자신들을 차별화하며 신민들의 충성을 강요했고,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십자형에 처하는 잔혹함이 있었다. 이런 것이 천국의 속국이라고? 저런 사람들이 지도자라고? 바울은 끈질기게 후견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며 기꺼이 ‘부정한 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 체제에서 독립을 선언하라고 촉구하며 제국의 불온한 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에클레시아는 로마의 후견주의 때문에 흔들렸다. 다시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돈 앞에서 이토록 인간은 쉽게 무너지는 존재였던가. 결국 사역의 완성은 공동체의 완전한 독립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물질적‧경제적 독립이 되지 않을 때 곧바로 예속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하여 바울은 ‘헌금’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각기 동등한 입장의 한 메시아 회중이 다른 회중에게 보내는 “선물”(카리스)이”(184쪽)이자 아가페의 실천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한 개인의 사역에 의해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적 호소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데다 그렇다고 이슬람처럼 제국을 형성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바울이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끊임없이 유대교를 탈영토화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즉, 상호지원과 평등의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노예 근성과 인종적 편견”(120쪽)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을 일깨웠고, 결국에는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모습은 바울의 에클레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교회는 비대해졌고 위계적으로 변했으며 예수의 케노시스는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종교로 인정받았다는 것, 다시 말해 종교가 제도화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독교는 거기에 맞춰 급진적인 것들을 걸러내야 했다. 제국이 유지되려면 가족이 필수여야 하니 평등 대신 권위와 위계를 내세우며 가부장적인 질서 속으로 편입해야 했다. 그리고 제도화된다는 것은 권력과 물질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뜻한다. 사실 바울의 에클레시아에는 대표나 중심이 없었다. 공동체가 안정되면 바울은 곧 다른 곳으로 떠났기에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았다. 헌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모이면 다른 회중으로 보내버리니 돈이 넘치는 일이 없었다. 이처럼 제도는 흐름을 막아버린다. 어쩌면 불온한 자, 바울이 꿈꾸었던 공동체는 사라지고 왜곡된 모습만이 오늘날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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