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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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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11-01 03:29 조회13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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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8)-『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라


김지숙



무아(無我)의 발견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의 말을 듣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의 제자가 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것도 모자라 어떤 사람은 자기 제자들을 모두 그에게 귀의시킨다. 어디 이뿐인 줄 아는가. 왕과 부자들은 음식과 사원을 바치며 그를 축복하고 받들어 모시겠다고 난리다. 그를 죽이러 온 암살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회개하고, 그를 밟으러 온 사나운 코끼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한 양이 되어서는 그 남자 발의 먼지를 닦는다. 물론 모두 이 남자의 제자가 되었다. 이쯤 되니 궁금하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아니, 사람이 맞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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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랫동안 인간의 판단을 흐리고 왜곡하는 자기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견지에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을 훈련해왔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느낌을 지탱하기 위해 의존하는 외적인 위업이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타타가타였으며, 그의 자기 중심주의는 ‘사라졌다.’(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붓다』, 푸른숲, 2002, 279쪽)

  그렇다. 그는 자기 중심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비인격적 존재와도 같았다. 그래서 고요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였다. 붓다는 평생을 자기 중심주의와 싸우며 스스로 진리의 몸을 구현했다. 그런데 왜 하필 자기 중심주의였을까.  

 

  원래 붓다는 왕국을 이어받을 고타마라는 이름의 왕자였다. 그에게는 우아하고 세련된 집과 어린 아들, 그리고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게다가 매일을 음유시인과 무희들이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고타마의 눈에는 인간의 삶에서 괴로움의 무자비한 순환밖에 보이지 않았다.”(36쪽)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음이라는 순환 말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타마는 궁금했다. ‘그냥 이대로 살다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괴로움 속에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태어남도 없는, 병듦도 없는, 늙음도 없는, 죽음도 없는 최고의 자유 상태는 불가능한 것일까.’ 고타마는 분명 다른 존재 양식, 말하자면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을 찾고 싶었다.  

 

  사실 고타마의 생각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인도인들은 ‘욕망과 무지’ 때문에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자아’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금욕과 요가에 매달렸다. 특히 요가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부분인 지성을 계발”(91쪽)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고타마 역시 뼈가 드러날 때까지 굶으며 자신을 고통의 극단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자유는 없었다. 요가를 할 때도 그 때 뿐이었고, 돌아오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자아의 해방이 아니라 자아만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것이다. “감정의 혼란스러운 삶, 육체의 무정부주의적인 삶에 시달리는 한낱 인간이 어떻게 이런 소용돌이를 넘어서서 지성에만 의지해 살 수 있겠는가.”(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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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고타마의 머릿속에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함께 밭은 가는 의식에 참석했을 때였는데, 쟁기질에 의해 어린 풀이 뜯겨나가고 벌레가 죽는 것을 보면서 어린 고타마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벌레의 고통이 자기 안으로 들어왔고 그 때 “동정심이 생겨나면서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120쪽) 이것이야말로 영적 해방이 아닐까. ‘나’라는 자아에 집착하면 절대로 타인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지운다면 타인과 공감하게 되고, 그 때 존재가 고양되어 진정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 고타마는 의식의 흐름을 관찰하고 그것에 집중하며 깨어 있으려고 했다. 이 훈련은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 결과 무아(無我), 즉 주체가 없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감정도 연속이 아니라 불연속이라는 것을. 결국 개인적 애착에서 빠져 나오게 되자 “고타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완전한 평형 상태에 이르러 아무런 매력도 반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134쪽) 닙바나(열반, 불의 꺼짐)의 성취였다. 이제 고타마는 자기 중심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자’ 타타가타(여래如來)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었다.”(194쪽) 그런데 오해하지 말자. 자아가 사라졌다는 것은 내가 파괴되거나 말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무아(無我)란 인연 조건에 따라 변하는 자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위대한 담마인 연기법이자 공(空) 사상이다.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라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닙바나에 편안하게 머물면 그것으로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종류의 쾌락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158쪽) 또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다. 사실 소승 불교가 비판받는 것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궁전을 나와 구도의 길을 떠났듯이, 이번에는 자신에게서 나와 구원의 길을 떠날 차례였다. 

 

  앞서도 보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다. 수행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았다. 붓다는 그들 각자에 맞게 설교를 했다. 한마디로 맞춤형 가르침, 대기 설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왜 똑같이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붓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완전한 담마는 집을 나온 수행자에게나 가능하다. 부처 역시 일반인들은 닙바나에 이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애를 낳아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집착과 탐욕에 빠지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는 일반인들에게는 일상에서 공덕을 쌓는, 아주 소소한 것부터 가르쳤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술에 취하지 말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지 말고 등등 말이다. 즉,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이었다. 좋은 조건에서 다음 생을 기약하기 위한 공덕이 아니라 현실에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실천을 강조했다. 하여 “아집의 불을 완전히 밟아 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약화 시킬 수 있었다.”(224쪽)  일반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성을 닦아 나갈 수 있었다. 

 

  붓다에 대한 오해가 또 있다. 여성을 차별했다는 것이다. 여자들을 상가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단적이 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왜 붓다가 그랬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남자들이 깨달음의 문턱에서 무너지는 경우는 대부분 여자, 즉 욕정 때문이었다. 붓다는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구도를 위해 집을 나설 때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은 것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려 주저앉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건 붓다만이 아니라 당시 수도자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여자는 깨달음의 장애였다. 붓다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모두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여자들을 상가에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머뭇거렸다. 물론 나중에는 여자를 받아들이는 혁명적 일을 단행하기는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처는 그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지금 교단에서 일어나는 성추행을 생각해 보면 부처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붓다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허공에 흩어진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난다여, 모두가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의지하며, 다른 누구도 의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 담마를 섬으로 삼고, 담마만 의지하며 다른 어는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264쪽,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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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섬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직접 부딪히며 하나씩 문제를 해결 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앎이 최고의 진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붓다가 자신을 숭배하거나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사실 우리는 붓다만을 숭배하고 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붓다는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 내라고, 자신만을 의지하며 스스로 담마가 되라고 말한다. 그래서 담마를 섬으로 삼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라고 말이다. 부처가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했던 아난다에게 당부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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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봉님의 댓글

김삼봉 작성일

"붓다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허공에 흩어진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와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내라"는 말이 지금의 저에게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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