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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자비, 존재의 근거이자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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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12-13 07:38 조회3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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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10)-『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자비, 존재의 근거이자 원리

김지숙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둘러보라!’ ‘자신을 사랑하라!’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라!’ 한 때 이런 말을 듣고 가슴이 뛴 적이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였고, 저대로만 한다면 삐거덕거리는 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힐 말들의 향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를 읽으면서 알았다. 자비란 실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위의 것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영적 존재로의 도약, 뇌의 다른 회로를 켜다

 

본성적으로 인간이 실제로는 무자비하리만큼 이기적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자기중심주의는 약 50억 년 전, 살아남기 위해 태고의 진흙탕에서 몸부림치던 파충류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생명체들은 오로지 생존만을 목적으로 신경과학자들이 ‘네 가지 F’라고 부르는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 즉, feeding(먹이), fighting(투쟁), fleeing(도망), fuxxing(번식)이 그것이다.(카렌 암스트롱,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돋울새움, 2012년,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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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렌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무자비한 것은 파충류의 신경학적 체계를 물려받아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호모사피엔스는 살아남기 위해서 4F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해서 이기적인 감정과 태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뇌의 스위치를 켜왔다는 것이 카렌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류가 그런 쪽으로만 뇌를 발달시킨 것은 아니었다. 즉각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에서 한 발 떨어져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뇌의 영역도 개발해 왔음을 카렌은 지적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면서 산다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잘못했건 안 했건 싸우고 나면 기분이 일단 좋지 않다. 뿐만 아니라 몸이 아프다. 몇 날 며칠을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자기도 한다. 이것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4F의 스위치를 끄고 뇌의 다른 회로를 개발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이타적인 뇌의 활동’인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방편이었다. 한편, 그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 애쓰게 한다거나, 삶의 비극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이끌어 주었다. 말하자면 뇌의 다른 회로를 켜게 되자 인식이 달라지고, ‘자기위주’의 삶에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존중과 공감’의 영역이 확대될 수가 있었다. 동물들이 단순히 먹잇감이었던 것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희생된 것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게 되자 사냥할 때 잔인함이 대폭 줄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F의 스위치가 빨리 작동하거나 아예 그것만 켜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생존을 위한 경쟁과 다툼을 생각하면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렌은 축의시대를 더욱 주목한다. 이 시기는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던, 그야말로 잔인무도의 극을 달리던 시대였다. 하지만 축의 시대의 현자들은 하나같이 ‘황금률’을 강조하면서 그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는 황금률은 자비의 다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자비와 공감’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종교의 전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신이었던 야훼가 어느 순간 사랑과 정의를 강조하는 신으로 바뀐다. 그건 광포한 신 보다는 자애로운 신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신을 끝까지 숭배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실 기독교가 탄생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기치로 삼고 사랑의 공동체를 꾸려가는 것에 헌신을 다했다. 성경도 그것에 초점을 맞춰 해석되었다. 이슬람교는 ‘과부나 고아, 가난한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라’고 강조하며 움마의 공동체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서양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폭력이 극으로 치닫고 있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맹자, 순자, 묵자, 장자 등이 나서서 예, 자애, 겸애, 양보, 무위를 설파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아힘사’, 즉 ‘불살생’의 에토스를 삶에서 제거하는 시도가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영적 활동들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 중 명상과 요가를 통해 인간의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자비가 존재의 근거이자 원리’라는 것을 밝힌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처였다. 

 

  사실 부처 이전 만해도 인도의 현자들은 ‘존재의 핵심’이라는 아트만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에 집착했다. 하지만 존재는 연기법에 의해 매 순간 변하므로 고정된 실체란 없다는 것을 부처는 깨달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자기에 집착하게 되고 자기 아닌 것들을 타자화하면서 번뇌를 일으키게 된다. 부처는 ‘자아 없음’ 즉 ‘무아’를 주장하며 기존의 관념들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실제로 부처는 명상을 통해 ‘무아’를 직접 체험했다.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 즉 ‘나 없는 상태’인 ‘삼매’에 들어가게 되니 ‘있는 그대로’ 실체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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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우리가 온전하게 세상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건 착각이다. 우리는 자기의 생각이 투영된 ‘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처의 설명이다. 그러니 나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고, 남의 생각이 틀렸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다 연결되어 있다. 혜민 스님 말씀대로 존재는 ‘내가 아닌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내가 곧 너라는 얘기다. 이럴진대 과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까. 따라서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존재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이것을 깨닫게 되자 사무량심, 즉 우정의 감정, 고통의 공감, 공감의 기쁨, 그리고 완전한 평정상태를 명상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카렌이 제시한 12단계의 지침들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바로 사무량심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자비에 이르는 일상의 12단계 훈련

 

  첫 번째 단계에서는 자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비와 자선을 혼동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만해도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들을 자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도 보았듯이, 자비란 그런 것이 아니다. 타인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자기를 비우는 것이 자비다. 명심해야 할 것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4F로만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음을 기억하자. 이를 확실히 인지해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자기 개발서나 인간관계 개선을 위한 책에 나오는 얘기들이 읽을 때뿐이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둘러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을 객관화하라는 뜻이리라. 자기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타인에게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기고, 그 때 비로소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멈추면 보인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을 공감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마호메트가 산에 올라 2년 동안 침묵의 시기를 보낸 것을 떠올려 보자. 고독의 시간을 통해 마호메트는 사회적 정의가 사라진 아라비아 반도의 당시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결국 아랍민족의 대통합을 이뤄낼 종교적 비전을 계시 받으며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발견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며 후회한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하하는데 까지 이른다. 분노, 증오, 두려움, 질투 등의 감정에 빠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인간의 뇌는 파충류의 뇌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담담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중단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다. 그리고 자기가 빠져 있는 감정들도 실제로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런 감정과 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억하자. 자아란 없다! 그것은 일시적 조건 속에서 나타난 현상과 감정일 뿐이다. 그러니 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라’는 것. 사실 나 살기도 힘든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타인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인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보살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게다가 고통을 공감하는 것은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이성적 능력을 배양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기에서 벗어나는 비판적 엄격함이 없다면 타인의 곤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통해 타인을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성적 사고 덕분이었다. 사실 고통을 공감하라는 것이 감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보시다시피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가운 이성이 작동될 때 케노시스라는 자기비움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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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자칫 잘못 이해하면 자기에 집착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다. 자신이 일으키는 마음,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자비와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여섯 번째 단계에서는 황금률을 소소한 일에서부터 적용해 보는 것이다. 수녀원에 있을 때, 카렌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원장 수녀였다. 평소에는 까칠하기로 소문난 그녀였지만 카렌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었고 죽기 전에는 카렌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별 말 같아 보이지 않지만 카렌은 힘들 때 마다 그녀의 말을 기억하며 버틸 수 있었다. 카렌은 황금률의 실천을 “누군가의 인생에 ‘소중한 시점’을 만들어주기 위한 기회”(142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사실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험담하고 싶을 때 만약 내가 그 누군가에 해당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자. 상대의 괴로움을 이해해주고 헤아려주는 마음이 지적하고 다그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일곱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던 것은 ‘당신은 알고 있는가’였다. 우리는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깨우쳐주려고 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라 존재의 도약이라는 대반전을 뜻한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에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리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겸손함과 동시에 존재의 충만함은 더 커지게 된다. 

 

  여덟 번째 단계에서는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비판과 다툼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자기는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남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상당한 진실과 동기를 발견해야 한다.”(172쪽)는 미국의 철학 교수인 도널드 데이비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과연 내가 상대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온화한 태도’로 답변해야 한다고 한 것은 스스로의 무지를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태도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타인을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공자도 제자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으며 그들을 다그치거나 몰아붙이지 않았다. 부처님 역시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바로 지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보게 했고, 그가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홉 번째 단계에서는 누구든 낯선 곳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최근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사실 그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설령 관심이 없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막상 우리나라에서 일이 터지게 되자 사람들은 그들을 사회악으로 몰아갔다. 멀쩡하게 잘 살다 자기 나라에서 벗어나자마자 범죄인으로 취급되는 그들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단순히 아랍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86쪽) 이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언제든지 우리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카렌은 이 단계에서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연습할 것을 제안한다. 가령, 아침에 먹은 청포도에는 미국 농부, 그것을 포장한 노동자, 배에 싣고 그것을 한국까지 운반해 준 사람들, 배를 만든 기술자 등등 수많은 인연이 들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마움을 느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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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번째 단계에서는 상대를 알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매스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정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짜 뉴스가 왜 판을 치는가. 정치적, 민족적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진실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발로 뛰며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면서 그것들을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테면 무조건 이슬람이 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것, 일본이 저지른 만행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 대해 우리나라가 저지른 과오를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 등등. 이런 훈련은 자기를 비우고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열한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 뜬금없는 얘기로 들릴 수가 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얘기하다가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라니 말이다. 그런데 카렌은 그것이 같은 얘기라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대면하다보면 타인의 고통을 품어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 영적 존재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이다. 

 

  열두 번째 단계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앞서도 보았지만 모든 단계에서의 훈련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원수를 받아들일 때 완벽하고도 완전한 황금률의 실천이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225쪽)가 된다. 이 단계가 바로 부처가 말한 사무량심이 아닐까.

 

  그렇다. 이 일련의 지침들은 자기를 비우고 무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공자가 말한 대로 매일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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