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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와 함께 | 법의 힘 - 「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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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01-24 07:00 조회6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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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힘 - 「법 앞에서」

     






오 선 민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단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법 앞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미완의 세 장편은 모두 한계의 문턱 앞에서 자기 운명을 시험하는 K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가 쓴 일기, 단편, 편지 등 많은 글이 철저하게 ‘할 수 있음과 없음’, ‘들어갈 수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황 자체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주어진 삶, 허락된 생활에 대한 철저한 인식. 카프카는 아버지와 아들, 학교와 회사, 사무실과 침실, 낮과 밤, 먹음과 굶음, 심지어 생과 사처럼 당연해 보이는 모든 경계가 실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법’이라며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법의 한계를 문제 삼는 일에 집중합니다. 카프카에게 법이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는 왜 삶의 온갖 경계들을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고, 그 엄연한 힘 앞에 버티고 서 있으려고 했던 걸까요? 오늘은 그의 법을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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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계는 카프카에게 무엇이었을까요?

 

 

 

 

1. 언어의 聖事?

   

카프카가 법을 이해하려면 그가 내놓은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합니다. (물론 카프카는 ‘법’만이 아니라, ‘변신’이나 ‘출구’, ‘읽기’나 ‘쓰기’, ‘문학’이나 ‘예술’과 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여러 겹의 알레고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카프카의 법철학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법 앞에서」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골 사람이에요. 세상 물정 모르는 그는 법의 문을 넘어가기 위해 일생을 노력합니다만, 결국 그 입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법의 문이 닫혀 있었느냐고요? 아니에요. 법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골 사람은 왜 법의 문을 넘어가지 못했을까요?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한 일이지”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에.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혀 문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문지기가 그것을 알자 큰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알아 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단지 최하위의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봐도 벌써 나조차도 견딜 수가 없다네.” 시골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을 예기치 못했다.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법 앞에서」 

 

표면적인 이유는 문지기에게 있습니다. 시골 사람은 스스로를 장사라고 소개하는 문지기의 말을 곧이곧대로 지키려다가 스러지는 것이지요. 세상에! 신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고, 겨우 최하급 문지기가 아닙니까? 이 문지기가 협박이라도 한 것일까요? 물론 문지기는 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문이,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문이 있어 점점 더 힘이 센 문지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힘이 세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말에 지나지 않지요. 그것은 입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는 문지기는 『실종자』에도 나옵니다. 

 

 

“어떤 의미에선 수위장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상관이야. 왜냐하면 수많은 작은 문들과 문이 없는 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정문, 세 개의 중간문, 열 개의 옆문, 말하자면 이 호텔의 모든 문들이 내 관할 하에 있거든. 물론 모든 종업원들은 나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호텔 관리부가 내게 준 이런 커다란 명예에 부응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를 보내지 못하게 할 의무를 지고 있어.”

『실종자』

 

또 문지기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데, '지금은 안 돼'라니요? 생각해볼까요? 실제로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공간은 ‘지금’ 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언젠가의 지금이었으며, 미래 또한 그 어느 날의 지금입니다. 문지기의 말을 따른다면 시골 사람은 이 생에서 절대로 그 법 너머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세 번째 문지기의 말도 이렇게 모순적인데, 하물며 그다음 문지기, 그다음 문지기의 말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래 『실종자』의 인용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됐건 문지기의 말이란 결국 온갖 외국어가 뒤범벅되어 있는, 심지어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웅얼거림에 불과합니다. 시골 사람은 이런 난감한 말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말만으로는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수다를 떨었다. 특히 그중 한 사람은 얼굴 전체에 검은 수염이 덮여 있는 우울해 보이는 수위인데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안내를 했다. 그는 끊임없이 테이블 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는 테이블 판을 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질문자들의 얼굴도 보지 않고, 단지 자기 앞만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건 그가 힘을 저장하고 모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수염으로 인해 그의 말은 약간 알아듣기 어려웠다. 비록 영어식 음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용했던 언어들이 외국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알은 그의 옆에 서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말한 것 중에서 아주 일부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하나의 안내가 쉼 없이 다른 안내와 연결되어 곧바로 다음의 안내로 넘어가기 때문에, 질문자가 아직 자기의 안내라고 생각하여 긴장한 표정으로 경청하다가는 잠시 후에 자기 용건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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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안 돼!' - 우리는 모순된 문지기의 말을 지키다가 죽습니다


 

카프카에 따르면 법이란 오직 말입니다. 우리는 도처에 포진해 있는 문지기의 말을 지키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진실되어야 할 그 말에는 그 어떤 성스러움도 없지요. 과연 카프카는 어처구니없는 이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법을 권위를 깎아내리려 했던 걸까요?     

 

 

 

2. 우리는 모두 실종자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말처럼 힘센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인류의 원초적인 욕망과 무의식의 보고인 동화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잖아요. 굳이 마녀가 나와서 저주를 걸지 않더라도, 동화 속 주인공들 대부분은 ‘말을 지키라’는 미션을 수행합니다. 저 유명한 개구리 왕자의 사례를 한번 떠올려 볼까요? 물가에서 공을 잃어버린 공주는 놀잇감을 되찾아오겠다고 하는 개구리에게 결혼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공주는 공을 갖고 돌아온 개구리를 보자 도저히 결혼은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녀는 개구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우물에 가두는 등, 온갖 음모를 다 꾸미지요. 하지만 말은 말! 아버지이신 국왕조차도 ‘공주의 말’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반 일리치와 베리 샌더스에 따르면, 구술 문화의 영역에서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나의 맹세는 그대로의 진실이었습니다. 12세기가 한참 지난 뒤에도 자유인을 상대로 한 소송은 어떤 경우라도 맹세로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3세기에 이르러 대륙의 교회법에 따라 판사가 나타나 말의 진위를 심문하기 전까지, 말은 표면과 이면이 따로 놀지 않는 그 자체로 완전히 진리값을 갖고 있었습니다.(이반 일리치·베리 샌더스『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물론 지금은 문자 문화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말보다는 쓰여진 것, 기록된 것이 증거가 되고 권위를 만드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좀 다릅니다. 문자도 말 못지않게 허위롭습니다. 만약 문지기가 말하는 대신, ‘지금은 안 돼’라고 쓰어진 문서를 보여주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까요? 문지기는 법 저 너머에 계신 상급자들을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에요.  

    

카프카는 말의 세계만큼이나 문자의 왕국도 텅 빈 기표들이 서로를 걸고 넘어뜨리면서 돌아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정작 바다 풍경은 구경도 못 한 채로 끝없이 쌓여 있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으며, 『성』의 베스트베스트 백작은 누가 썼는지, 어디에 도착중인지 파악되지도 않는 서류들 사이에서 하나의 텅 빈 기호로서 마을을 지배하고 있거든요. 

 

 

이와는 달리 소르디니는 우리의 답신을 받자마자 의심을 품었어요. 그래서 수많은 서신이 오가게 되었지요. 소르디니는 어째서 별안간 측량사를 초빙하지 말자는 생각이 났는지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미치의 뛰어난 기억력의 도움으로, 처음에 관청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고(물론 우리는 다른 부서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 까맣게 잊었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소르디니는 관청에서 서류를 보낸 이야기를 왜 이제야 꺼내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시 나는 이제야 그 서류 생각이 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르디니는 참 이상한 일이라 하더군요. 나는 너무 오래 질질 끌던 문제라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소르디니는 이상하다며, 내가 생각나게 한 그 서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몽땅 분실되었으니까 물론 서류가 없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르디니는 그래도 첫 공문을 보냈다는 메모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소르디니의 부서에서 깜빡 실수를 저질렀다고 감히 주장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

    

마을에서 측량사의 존재는 서류 속에서 나타났다가, 서류와 함께 실종됩니다. 이 이야기는 「황제의 칙령」을 떠오르게 합니다. 황제는 궁궐의 방과, 왕성의 문과, 수도의 담 사이에서 결국 실종되고 마는 칙령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사실, 누구도 황제가 무얼 말했는지 알 수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칙령을 가지고 올 전령사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지요. 왕국의 신민들은 죽은 왕의 말을 매개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이로 남습니다.   

 

 

황제가-그런 이야기가 있다-한낱 개인에 불과한 ‘그대’에게, 그것도 황제의 태양 앞에서는 아주 먼 곳으로 피신한 왜소하고 초라한 신하, 바로 그러한 ‘당신’에게 임종의 침상에서 칙명을 보냈다. 그 칙사를 황제는 침대 옆에 꿇어 앉히고 그의 귀에 그 칙명을 속삭이듯 말했다. 그 칙명이 황제에게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그는 칙사에게 그 말을 자신의 귀에 되풀이하도록 시켰다. 그는 머리를 끄덕여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시인했다. 

[…]

칙사는 여전히 심심 궁궐의 방들을 헤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 방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가 설령 궁궐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득도 없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와 싸워야 할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다. 궁궐의 정원은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원을 지나면 두 번째로 에워싸는 궁궐, 또다시 계단과 정원, 또다시 궁궐, 그렇게 수천 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가 가장 외곽의 문에서 밀치듯 뛰어나오게 되면-비로소 세계의 중심, 침전물들로 높이 쌓인 왕도(王都)가 그의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뚫고 나가지는 못한다. 비록 죽은 자의 칙명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그러나 밤이 오면, ‘당신’은 창가에 앉아 그 칙명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

「황제의 칙령」  

   

‘K가 왔다.’ 이 단순한 사실은 정말이지 많은 문서를 통해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K라는 존재는 서류 속에서 찢기고 헤쳐졌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백작이나 관리들의 서류 없이는 K를 인지하지도 못했어요. 백작의 마을에서 존재와 존재는 실체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언제나 언어에 매개된 채 살아갑니다. 문지기의 권위가 겨우 말에 불과하다면, 제도화된 우리 일상을 채우는 것도 겨우 ‘글’인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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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실체가 아닌 언어로 존재한다

 

 

 

 

3. 목표로서의 자유와 인식으로서의 언어    

 

카프카는 언어를 부정했던 걸까요? 법이란 말뿐인 허상이라며 웃어넘기려 했던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카프카의 문학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겠지요. 카프카는 칙령을 기다리는 저 사람을 ‘당신’이라고 다정하게 호명합니다. 카프카는 법 너머를 꿈꾸는 시골 사람과 K를 바보스럽게 그리지 않았어요. 그들은 모두 언젠가의 그 날을 믿으면서, 언어의 힘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법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은 이 믿음이 정당함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지금은 안 돼’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이 모순된 상황을 모두 긍정하는 걸까요?   

 

 

그는 문지기에 대한 수년 간의 연구로 모피 깃에 붙어 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까지 자기를 도와 문지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의 시력은 약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정말 점점 어두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하게 할 뿐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 어둠 속에서 그는 법의 문으로부터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그 시간 전체에 대한 모든 경험들이 그가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에게로 몸을 깊숙이 숙일 수밖에 없다.

「법 앞에서」

 

카프카의 세 장편은 모두 미완으로 끝납니다. 온갖 한계의 문턱을 넘으려던 세 사람의 K는 아직도 자신의 미션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작품을 완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칙령은 아직도 오는 중이며, ‘당신’의 기다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골사람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사실 끝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카프카에게 참으로 중요했던 것은 한계 앞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법 너머를 꿈꾸는 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진리가 언어를 매개하지 않고 전달되고, 삶이 그 자체로 충만하게 표현되는 자유의 공간에 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 조건이 시골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지금’이 삶을 구속하는 한계라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만약 법 너머의 빛을 보지 못했더라면, 시골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도 문지기의 말이 모순된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저편의 자유가 목표로서 설정되기 때문에 이편의 한계가 인식되는 것이지요. 진리가 매개 없이 전달되고 온 삶이 충만하게 펼쳐지는 시공간이 있을 수도 있음을 설정하기 때문에, 동시에 우리가 결코 지금을 떠날 수 없음도 알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과감하게 지금을 바꾸는 모험에 돌입했습니다. 그것은 말을 바꾸는 일이었지요. 그는 ‘지금은 안 돼!’라는 명령문 앞에서 법을 향한 채워질 줄 모르는 욕망을 안고 “어째서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프카는 쓰지 않는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에 걸친 단식과 불면은 모두 글쓰기를 위한 방편이었어요. 영혼을 나누었던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혼도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란 잘 먹고 잘 자고, 부족함 없이 가정을 꾸려 사회에 안착하는 일을 저 너머로 돌리는 일이었어요. 카프카의 K는 백작을 직접 만날 수 있기를, 하급 관리인 클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문서로 매개된 모든 관계들을 비틀고 짓뭉개면서 마을 사람들 속에서 애인과 친구를 바로바로 구해나갔지요. 시골 사람은 언어야말로 삶을 매개하고 규정짓는 한계라면, 공허해질 대로 공허해진 그 언어를 낯설게 봄으로써, 명령문을 질문으로 되돌림으로써 이 ‘지금’을 새롭게 바꾸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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