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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의역학 | 권력의 의존성과 폭력의 상관관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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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아 작성일18-03-23 07:41 조회6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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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권력관계

 

 아동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유괴하여 자기 자식으로 키우고 싶어 한 엄마를 다룬 드라마 마더를 보았다. 아빠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사는 게 너무 버거운 아이의 친모는 그냥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저 아이 때문에 남편은 떠났고 자기는 발이 묶였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행복한 삶이란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알콩달콩 사는 것이기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현재의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남편 혹은 남자친구란 존재가 없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동거인이 자기 아이를 학대해도 모른 척 한다. 그가 떠나가는 게 더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받아야 행복하다는 표상에 너무나 집착하여 의존하다 보니 그걸 어렵게 만든다고 여기는 자기 자식에게는 폭력적인 어머니가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뭔가에 의존적인 사람이 더 폭력적으로 되는 게 너무 리얼하게 나와서 지금 내가 기대고 있는 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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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행복한 삶이란 이런 모습?​

마더에서 더 슬픈 건 아이에게 부모는 너무나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는 부모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자기가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드라마에서는 엄마가 자살을 하자 아이의 마음속에 자기가 죽지 않아서 엄마가 죽었다는 죄책감이 깊이 자리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기가 뜨거운 미투 운동을 보면서 피해자가 받았을 상처들은 하나같이 모두 가슴 아프지만, 그 중 가장 안타까운 건 성희롱, 성폭력을 자행하는 상대가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폭력을 자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자, 학자, 정치가로서 명망이 높을 경우 피해자 입장에서는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져서 자괴감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에 나온 엄마처럼 미투 운동의 가해자들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강력하게 근거 짓고 있는 게 있었던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예술, 학문,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명분들에 의존하여 그 외의 삶의 문제는 함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여겼던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권위를 희석시키는 인류학적 사례들

  권력관계 중에서도 마더에서처럼 상대가 나의 존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거나, 미투 운동에서처럼 어떤 식으로든 위엄이 있는 사람이 폭력을 행사할 경우, 인과가 묘하게 전도되어 피해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고 이로 인해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다. 그래서일까? 인류학적으로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권력관계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사례는 아무래도 주술사와 관련된 지점일 텐데, 부족민들의 주술사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양가적이다. 병이 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주술사에게 의존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주술사는 거처도 언덕과 같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부족들과 일상적으로 섞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래동화처럼 이야기 속의 조롱거리로 만듦으로써 그에게 있는 아우라를 걷어내기도 한다.

 

인디언들로서는 샤먼과 재규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경의를 문제 삼아 그들의 눈으로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샤먼이나 숲에서 만난 재규어를 죽이는 현실적인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웃음으로써, 즉 신화를 통해(이 경우 신화는 탈신비화의 수단이 된다) 사람들이 조롱할 수 있는 샤먼이나 재규어의 변종을 만들어내는 상징적 방식이다. 신화 속의 샤먼이나 재규어는 현실의 속성을 잃어버린 마을의 조롱거리로 재탄생한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이학사, 182)

여기에서 우리는 이른바 신화의 정화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신화는 이야기 속에서 인디언의 열망인 두려운 대상을 조롱하고자 하는 숨겨진 강박관념을 해방시킨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강박관념을 언어를 통해 평가절하하고, 웃음 속에서 어떤 죽음의 등가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인디언들이 어떤 대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곧 그것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같은 책, 184)

일반적으로 주술사는 누군가 병이 나면 그의 영혼을 찾아 떠나야 한다. 병자의 영혼을 찾아서 병자의 몸에 결합시켜야 병이 낫는 것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힘과 접하여 생명을 구하는 것은 역으로 죽음의 세계도 자유로이 접촉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부족민은 그에게 경외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이야기를 통해서 주술사에게서 권위를 걷어낸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주술사를 탈신비화함으로써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고자 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장치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외 부족사회에서는 샤먼이 아니어도 자기 작물 또는 씨앗을 지키기 위해,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등 각각의 상황에 맞게 모든 사람이 다양한 주술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주술이 방어용으로 쓰이지 않고 타인을 직접 공격하거나 그에게 일정한 행위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 강력한 사회적 금기가 형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농작물을 훔치기 위해 밭에 들어간 도둑을 가둬놓는 주술은 허용범위 내에 있지만 주인이 올 때까지 침입자를 일하게 만드는 주술은 사술로 여겨졌으며, 독살만큼이나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그런데 사실 위의 예시에서도 몸을 묶어놓는 것과 일하게 만드는 것 사이의 경계가 그다지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감정이 깊이 개입되는 애정 주술의 경우 단순하게 상대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를 넘어 성적 욕망과 소유욕이 뒤섞여 폭력성을 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사술로 의심되기 쉽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부적절하게 타인을 조종하는 주술의 힘이 너무 세면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그 주술에 먹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녀란 자신이 행하는 사악한 주술에 장악당한 사람이다. 이들은 악의와 원한에 사로잡힌 채 타인을 해치려 들다가 자기 우드의 힘에 눌려 동류와 함께 악행 자체를 즐기는 패거리를 이루고야 만다.

여자가 애정 주술을 너무 많이 쓰거나 너무 센애정 주술을 손에 넣게 되면 결국 자기 주술의 힘에 말려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략) 영에 씌인 마녀들은 자기 행동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의식조차 못한다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드의 힘이 이끄는대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집을 내팽겨친 채 다른 마녀들과 만나 악행을 한다는 것이다. (가능성들, 데이비드 그레이버, 그린비,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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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Francisco Jose de Goya)의 <위대한 산양 악마 혹은 마녀집회(The Great He-Goat or Witches Sabbath>

이렇게 보면 주술사에게서 아우라를 걷어내는 것은 그가 권력에 역공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 주술사가 치유능력이라는 자신의 권위에 기대는 순간, 위험은 이미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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