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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다시는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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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04-12 18:17 조회5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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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 -(1) 『마음의 진보』



다시는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김지숙

 

  『마음의 진보』는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두 번째 자서전이다. 첫 번째 자서전은 이미 절판 되었는데 이에 대해 카렌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출판사의 요구에 맞춰 쓴, 말하자면 상업적이기만 할 뿐 전혀 솔직하지 않은 책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잡고 싶어서 썼던 글이 그저 “화려한 과거를 자랑하는”(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교양인, 2014, 366쪽) 책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물론 오해해선 안 된다. 첫 번째 자서전에서 언급된 사건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카렌 자신의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마음의 진보』는 자서전이라는 글쓰기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보통의 자서전처럼 단순하게 시간 순으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마음의 유동과 변화를 직시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쩌면 ‘마음의 진보’라는 제목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7년간의 수녀원 생활을 정리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카렌은 너무나 막막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런 자신의 삶이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고 카렌은 고백한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것만 같아 절망감과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고 말이다. 언제 출구가 나올지 모르는 일, 그렇다면 차라리 내려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 때 카렌을 뒤흔든 것은 엘리엇의 시, <재의 수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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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

있는 것은 오직 한 순간

한 자리에만 있다는 걸 알게 되리니

나는 있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좋고

거룩한 얼굴에 연연하지 않으리

목소리에도 연연하지 않으리

다시는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그래서 즐겁다. 즐거워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니까  (T.S.엘리엇, <재의 수요일>, 일부)

  아무리 현재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 갈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미래로 날아갈 수도 없다. 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이다. ‘다시는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할 수 있는 건 조금의 보탬도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거룩한 얼굴에도 거룩한 목소리에도 연연해서는 안 되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도 말하지 않던가. 의지처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고. 어쩌면 카렌이 나선형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그런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뿅 가고 싶다!


그것이 별난 선택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수녀원 부설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에서 수녀가 된 학생은 아마 내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물론, 나는 조금이라도 튀고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대 분위기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푹 젖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나 끝난 직후에 태어난 내 또래의 젊은이는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아련한 욕망을 나처럼 품고 있었다.(7쪽)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은 세계의 패권을 미국에 내 주고 있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변화된 세계정세를 직시하지 못하는 조국에 대해 실망했다. 그 때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8쪽)이는 로큰롤 음악의 등장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젊은이들은 그것에 뿅 갔다. 섹스도 마음껏 하고, 군대를 거부하고, 부모의 말에 반항했다. 한마디로 로큰롤 음악은 그들에게 신세계이자 해방구였다. 이런 분위기에 카렌도 압도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로큰롤 음악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카렌의 눈에는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행동이 방종처럼 보였다. 그런 대열에 합류할 리 만무했다. 대신 수녀가 되는 것만큼 안성맞춤인 것도 없었다. “정념에서 벗어나 금세 지혜롭고 똑똑한 여자가 되”(6쪽)기를 원했던 카렌은 신에 뿅 가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고 다르게 보이고 싶었던’ 카렌의 아련한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그것만큼 좋은 선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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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신을 ‘황홀경’의 체험으로서 만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뿅 간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상태의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약물이나 술, 본드 등에 의존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종종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예술가들의 마약범죄도 약물로서 황홀경을 느끼기 위한 극단적 선택이다. 작품 활동에서 오는 공허와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서구에서 학생 운동이 실패하자 히피문화와 약물이 그들의 삶을 잠식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성을 황홀경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설령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샤먼적 체험”(고미숙 샘 강의)쯤 될 것이다.

 

  카렌도 환속한 후에 딱 한번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보기는 봤다.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간질 발작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었다. 카렌은 말한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잠시 방향 감각을 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123쪽)고. 그렇다면 “카톨릭의 이미지로, 성자들의 삶과 본보기로, 장엄한 미사의 모습으로 꽉 찼던”(11쪽), 그래서 “언젠가는 사춘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더없는 만족감을 주는 무한한 신비의 품에 안기리라고 믿었”(6쪽)던 카렌이 수녀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가. 

 

 

 내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참회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신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현존을 체엄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자아의 완전한 포기가 내게는 요원해 보였기 때문이었다.(41쪽)

  황홀경으로서 신을 만나는 일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한 또는 뇌가 잘못 되지 않는 한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초월적 신이 나를 도약 시켜줄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는 한 신을 만난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다. 성인들은 ‘자아의 포기’, 즉 자기를 내줄 때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카렌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으니 왜 신을 만날 수 없느냐고 절규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환속, 그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제도는 다 똑같다

 

  카렌이 신을 찾지 못해서 환속했다지만 과연 그것만이 이유일까.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이었다. 결국 수녀원에서 받은 교육이 주효했던 것이다. 애정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퇴화하거나 심하게 훼손되어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심장이 돌덩어리로 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안에 새로 생긴 이 냉담함이 차갑고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몸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잃어버린 듯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제 나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뚜껑을 닫은 우물이었다.(69쪽)

  카렌이 환속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경직된 몸’때문이었다. 카렌은 점점 생기를 잃고 감정 또한 메말라 가고 있었다. 부모님을 만났는데도 “그분들의 애정에 제대로 반응할 줄”(69쪽) 몰랐다. 카렌의 말대로 수녀들을 단련하기 위해 고안된 냉정과 거듭되는 불친절은 감정만 훼손시켜 그것을 질긴 스테이크 조각처럼 만들어버렸다. 카렌은 사랑하는 법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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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수녀원에 막 들어왔을 때 카렌은 세속의 삶보다 더 경직되고 폐쇄적인 분위기와 불합리한 행태들을 목도하고 깜짝 놀랐다. 허나 카렌은 이것을 ‘신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한 훈련으로 믿으며 올라오는 의구심을 꾹꾹 눌렀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바늘도 안 달린 재봉틀을 죽어라고 밟았던 것도 역시 교육 과정의 하나”(82쪽)라고 받아들였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그것은 “워털루 전쟁처럼 역사적으로 아무런 논란도, 문제도 될 것이 없는 것처럼”(78쪽)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카렌은 그것들에 대해 따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매서운 눈초리뿐이었다. 수녀원에서 질문은 금기였다. 침묵만이 허용되었다. 수녀원에서 배운 것은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과연 수녀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카렌이 ‘발작’ 때문에 상담치료를 받았던 병원도 그랬다. 그녀의 주치의 수다박사는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한 사건에 대한 자기의 해석과 자기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한 자기의 평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223쪽)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만 병을 바라봤다. 그래서 카렌을 수녀원에서 단순히 여성성을 억압받은 노이로제 환자로 몰아갔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하소연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카렌이 쓰러지는데도 뇌 검사를 의뢰하지 않은 건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우는데 급급해서였다. 환자를 배려하거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노력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수다 박사, 그는 병원이라는 제도 안에 갇혀 환자와 교감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 의사였다. 이런 의사한테 기댄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카렌은 더 이상 수다 박사에게 자신의 병을 의뢰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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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이뿐이겠는가. 교수 임용에 탈락하고 여학교에 부임했을 때 카렌이 목격한 것은 수녀원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교장의 예민함 때문에 모두가 긴장하고 교사들 간식비를 똑같이 분담하면 될 것을 일일이 노트에 자기가 먹은 것을 적으라고 하는 등 학교는 정말 숨이 막히게 하는 곳이었다. “자연히 만감이 교차했다. 고장난 재봉틀이 생각났고 자존심과 고집을 꺾는다는 명분으로 우리에게 퍼부어졌던 꾸지람도 생각났다.”(342쪽) 학교나 수녀원이나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가르치는 것을 좋아해도 이런 환경에서 카렌은 버티기가 어려웠다. 몸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쉽게 피곤하고 발작도 잦아졌다. 결과적으로는 건강문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카렌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수녀원도 병원도 학교도 모두 같은 곳이었다. 권위와 규율을 강요하는 ‘제도’안에서는 마음이 흘러갈 곳이 없다. 자기의 영토를 지키느라 급급한데 어떻게 타인의 얘기가 들리겠는가. 제도권에서 교감과 소통은 너무나 생경한 단어일 뿐이다. 제도는 사람을 목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 카렌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닥치면 그냥 참고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서 나오면 더 나빠질 것이고 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카렌은 제도권의 실상을 보고나서 “아무리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남한테 내 인생을 맡길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끌어안고 가야”(246쪽)한다고 결심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카렌은 자신의 병을 온전히 껴안고 살아갈 수 있었고 글쓰기라는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 설 수 있었다.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순종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연함이 낳은 고귀한 성취였다. 

 

 

인식의 동요를 일으킨 사람들

 

  『마음의 진보』를 읽기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수녀원을 나온 사람이 어떻게 종교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말이다. 다시는 종교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예상과 달리 그것에 푹 빠져 종교 사상가로 사는 카렌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카렌의 인식을 흔든 사람들이 있었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함께 기거해야 할 곳을 찾다 만난 공산주의자 하트 교수 부부. 그들에게는 자폐를 가진 막내아들 제이콥과 영국 반문화 운동의 기수이면서 극단적 성의 혁명을 보여준 큰 아들 애덤과 작은 아들 찰리, 이혼한 딸 조애나, 여전히 그녀와 교류하는 전 남편 앨런이 있었다. 듣기만 해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가족이다. 예상대로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정돈되지 않는 집구석. 놀라기는커녕, 그것은 수녀원에서의 강박적인 청결로 막혔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후련함 그 자체였다. 살아가는데 청결함이 무슨 대수라고 수녀원에서는 사람들을 그렇게 닦달했을까. 결혼하고서도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자는 아들 내외한테 하트 부부는 어떻게 그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성에 대해서 지독하릴 만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카톨릭 교단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타인에게 불관용하고 고집불통인 것이 종교란 말인가.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하고 딱히 믿는 종교도 없지만 돈과 세속적 성공을 거부하면서 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애덤이나 찰리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인 아닐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나왔다. 하트 가족의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마주치는 이질적 세계가 카렌의 인식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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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무신론자인 하트 부부가 제니콥을 성당으로 데려가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카렌은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느낌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 하트 부부가 아들을 성당으로 보내려 하는 것과 성당에 발길을 끊은 카렌을 다시 그곳으로 가게 만드는 이런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그러나 병과 씨름하는 자식이 종교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이념 따위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어쩌면 종교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닐까. 교리를 몰라도 의식을 즐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종교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은가. “종교는 본질적으로 믿음”(210쪽)이라는 확고한 카렌의 인식에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학교에 근무할 때 만났던 샐리는 어떤가. 그녀는 종교에 초연한 사람이었지만 인간의 원죄에 대해 설명하는 카렌에게 강한 펀치를 날렸다 “도대체 무슨 놈의 신이 어쩌다 실수 한번 했다고 해서 인류 전체에 저주를 내리느냐”(352쪽)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렇게 속 좁고 독단적인 신이 인류를 구한다고?’ 샐리 아버지의 날카로운 질문 역시 카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수가 인간과 개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있지도 않은 신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신이란 무엇일까. 그 전까지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붙들려 다른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신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 되는 순간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종교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인생이란 것이 워낙 그렇지 않은가.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놓치고 자기 삶을 놓치는 사람은 그것을 살리기 마련이다. 이것은 신이 자의적으로 정한 계율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조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법칙이었다. 완전히 포기할 작정으로 빵을 강물에다 던지면 비록 모습을 달라져도 그것은 결국 내게 돌아오고야 만다.(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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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설로 얽힌 카오스다. 그것은 신이 정해준 계율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조건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던 종교가 카렌에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줄을. 하지만 스피노자는 말한다. 어떤 것에도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고 말이다. 비록 당장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사후적으로 놓고 보면 그 인과를 다 엮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인생은 필연성이라는 법칙 안에서 굴러간다는 것이다. 

 

  사실 카렌의 “삶은 늘 변했지만 한편으로는 늘 똑같은 주제, 똑같은 문제를 맴돌”(510쪽)고 있었다. 그녀는 ‘종교와 신’에 대한 의문을 한 번도 거둔 적이 없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합당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일상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지나치지 않고 낱낱이 해부하면서 “자기의 미궁을 탐색”(453쪽)하려는 분투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만이 아니라 타 종교에까지 종횡무진하며 종교학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카렌의 삶에 내재된 필연성이다. 결국 신이란 저 너머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가 고양될 때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공감과 자비를 실천할 때 존재는 충만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신성임을 카렌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카렌 스스로가 이뤄낸 ‘마음의 진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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