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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축의 시대 -⑦ 사유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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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5-31 03:30 조회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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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2)『축의 시대』- 

 

 

 사유의 혁명

-기원전 450년~398년-


김지숙

 

 

 지난 시기에서는 4개의 지역에서 공감의 정서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마음의 흐름이  보인다. 이스라엘에서는 축의 시대 이상이 사라지고, 그리스에서는 합리적 철학이 탄생한다. 중국에서는 좀 더 급진적인 황금률을 주장하는 묵자가, 인도에서는무아를 설파하는 부처가 등장한다. 사유의 혁명이다. 

 

 

 축의 시대의 막이 내리다


  바빌로니아의 통치가 끝났지만 이 시기에 이스라엘에서는 축의 시대의 전망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배타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처음 한 일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외부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귀환자들을 제외한 사람들과는 일체의 어떤 교류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니었다. 해서 느헤미야는 외국인과의 결혼은 물론 추방당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결혼도 금지시켰다. 에즈라는 훨씬 더 엄격했다. 아예 외국인 부인을 내보낼 것을 지시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사실 이런 극단적 지침은 ‘고통과 억압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니체가 말한 약자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식의 폐쇄적 태도를 견지하도록 한다. 한마디로 “고난과 지배가 방어적인 배제를 낳은 셈”(423쪽)이다. 

 

  물론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관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 민족에 대해서 아주 포용적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요나》에는 이스라엘을 파괴한 아시리아를 구하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전망이 우세해서 요나의 열린 전망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단 지성 소피스트들의 등장


  기원전 5세기 후반, 그리스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논,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의 자연과학 철학자들의 한계에서 출발했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상식에서 동떨어진, 그래서 공상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환상을 심어주는 철학 대신 삶에 유용한 철학이 필요했다. 이런 요구에 부합하며 등장한 집단 지성이 바로 소피스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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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스트들은 “소수의 특정 엘리트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해방을 향한 욕망, 자율성, 개인주의,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 등 축의 시대의 여러 주제를 건드렸다.”(430쪽) 하지만 새로운 인간 개발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 삶의 기술을 끌어올리는 것이 소피스트들의 목표였다. 수사학이나 설득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소피스트 주위로 몰렸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에서는 말을 잘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피스트들이 그것에만 역량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프로타고라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진리의 본질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라고 가르쳤다.”(432쪽) 물론 답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신은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며, 오직 개인적 경험과 판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진리란 저 너머의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마음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

 

  에우리피데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극작가였다. 그는 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메데이아》에서 주인공 메데이아는 신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로고스에 따라 행동했다. 그녀는 남편 이아손을 벌하기 위해 이성을 끌어들였다. 즉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성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은 메데이아나 헤라클레스(광기에 빠져 자신의 부인과 아이를 처참하게 죽임)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의 삶을 통제한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오이디푸스가 누구인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자’다.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앎’이 그의 생을 비극으로 몰아넣고 마는데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만다. 그러나 시력을 잃게 되자 오히려 그 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고스로 꽉 차 있던 오이디푸스가 “파토스를 배웠”(438쪽)던 것이다. 공감 능력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자신의 고통보다 두 딸의 슬픔에 더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 청중 역시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범죄는 잊고 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다. 비극을 통해 오이디푸스는 성스러운 인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종교의 논리에서 보자면 그는 터부(taboo)가 되었다.”(439쪽)


 

소크라테스, 무지를 깨우쳐 주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그가 활동 했던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라고 알고 있지만 그건 오해다. 실용적 지식을 주는 것이 목적인 소피스트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것에 사명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처럼 돈벌이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왜 무지인가. 

 

  자신이 알고 있던 관념이나 지식이 깡그리 해체될 때 무지가 드러나는 데, 그 때 “철학적 탐구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442쪽)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집요하리만큼 사람들을 물고 넘어졌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완전히 박살난 사람들은 그 때부터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앎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는 일이었다. 무지를 통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다. 결국 앎은 덕이자 도덕이며 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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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행동이었기에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선’과 ‘영혼’에 모아졌다. 그래서 삶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했다. 유익한 영혼을 위해서였다. 악한 행동이나 복수는 삶에서 배제해야 할 행동이었다. 

“복수를 신성한 명령으로 여기는 그리스 관점에서 멀어지는 길이었다.”(445쪽)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것을 잘 보여주었다. 재판 과정에서 억울할만한데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며 죽음에 초연했다. “‘선’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은 것이다.”(453쪽)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달리 그리스 사회는 축의 시대와 멀어지고 있었다. 전쟁과 과두 정치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중심주의로 빠져들었다. 다른 폴리스를 공격하고 착취를 일삼았다. 《바코스 여신도들》에서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을 때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도 자기 오만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겸애라는 급진적 황금률


  춘추시대를 지나 중국은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주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 위, 조, 초, 진, 제, 연의 7웅이 할거하는 무시무시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쟁 자체가 바뀌었다. 전차를 몰던 예의 바른 전사들이 관용과 예의에서 누가 더 나은지 경쟁하던 제의화된 대결은 이제 사라졌다.”(455쪽) 예전에는 여자, 아이, 부상자, 병자를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를 죽이든 개의치 않았다. 전쟁을 위해 자연이 이용되었고 전차 부대대신 기병 부대가 도입되었다. 기습공격이 가능했고 새로운 무기도 개발로 멀리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호전적인 왕들의 사치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예전의 상나라 후반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 난국을 해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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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때,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바로 묵자였다. 묵자는 주나라의 전례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정교한 예를 지킬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임금을 가장 좋아했다. 홍수를 막아 사람들에게 실용적 이익을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왕들도 전쟁을 중단하고 사치를 줄이며 요순임금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때 묵자가 내세운 논리는 ‘겸애’였다. 묵자가 볼 때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공자의 ‘인’이라는 자비의 윤리가 가족에 한정되면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묵자는 친족 이기주의를 전체를 향한 이타주의로 대체하고 싶었다.”(461쪽) 자기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겸애란 보편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관심이었다. 한마디로 하면 ‘정의’쯤 되지 않을까. 이것은 공자의 황금률에 비해 훨씬 급진적이었으며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사실 “다른 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존중하라. 다른 가족을 네 가족처럼 존중하라.”(462쪽)는 묵자의 주장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보다 전체를 앞세우며 공리를 추구하는 것에는 피곤함과 삐걱거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이미 차별인데 무차별적 평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주 혁명적인 발상임에도 묵자의 사상이 오래 가지 못한 것은 이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아의 발견


  기원전 5세기 말, 인도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크샤트리아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를 단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타마는 다른 출가자처럼 요가도 하고 극단적 고행을 했다. 요가를 하는 동안 황홀경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았다. 고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해도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문득 어렸을 때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쟁기질에 의해 어린 풀이 뜯겨나가고 벌레가 죽는 것을 보면서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감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순간 기쁨이 솟아오르면서 황홀경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던 고타마. 결국 고타마는 이런 기쁨이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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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자들은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타마는 “‘깨어있음’을 훈련함으로써 인간이 늘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482쪽) 즉 영원한 자아라는 푸루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순간 변하는 것, 무아가 존재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고타마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자아라는 것이 없는데 자기를 앞세울 일이 있을까. 소중한 자기를 위한답시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집착하는 일이 일상다반사! 그것이 바로 고통이 아니겠는가. 

 

  자기를 앞세우는 일이 없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리를 내 줄 공간이 생긴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수 가 있으므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반인도 자기 탐닉에서 벗어나 자비라는 핵심적 가치에 이르게 된다.”(487쪽) 부처는 누구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폭력 없이 다른 존재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위대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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