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 시대-⑧ 철학의 모험 > 글쓰기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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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축의 시대-⑧ 철학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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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6-07 00:53 조회3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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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축의 시대-⑧ 


 철학의 모험

-기원전 400년~300년경-


김지숙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양자, 혜자, 장자, 맹자에 의해 혼란스러운 정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새로운 철학이 시도 되었다. 인도에서는 불살생을 두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지면서 그것에 대한 철학적 해법을 찾고 있었다. 한마디로 철학의 모험이 일어나고 있었다. 

 

 

역설과 무위, 그리고 자애


 여전히 중국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통치자들은 권력을 독점하는 데에만 열중했고 남의 부를 가로채기에 바빴다. 경제적 호황임에도 불평등은 심해졌다. 사회적으로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인 도대체 무엇이냐고, 이 나라는 실망의 진창’이라며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자살했던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숲으로 들어갔다. 무위로 통치했던 신농을 영웅으로 받들며 전원의 삶을 살았다. 이들 중 한명이 철학을 발전시켰는데 그가 양자였다. 양자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곤경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도나 정치가 사람들에게 개입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따를 것이 아니라 쾌락과 감정을 따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향락만을 추구한 압제자는 하늘에 더 가깝고, 쾌락을 거부하고 덕을 쌓는데 힘 쓴 왕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묵가, 양가, 유가의 열띤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은 변증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혜자는 ‘역설’로 유명한 변증가였다. 언어나 문자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던 혜자는 ‘상대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이를테면 세상의 중심은 어디냐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월나라와 연나라를 이었을 때의 가운데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중국인의 관점을 버리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얼마나 편협한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그래서 혜자의 “명제 열 가지는 초월과 자비의 관념이라는 틀 안에 있다.”(501쪽) 이런 점만 보면 혜자와 장자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자는 혜자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묵가였던 혜자는 다른 철학이 옳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서 왜 자기 철학만 옳다고 다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중심주의의 발로”(502쪽)가 아닐까. 자기 중심주의라는 점에서는 묵가나 유가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개입해서 정치를 바꾸고 인간의 본성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오만중의 오만이라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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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다스리지 않는 ‘무위’의 정치를 믿었다. 자연이라는 측면에서나 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변화’일 뿐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큰 앎’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전제나 관념이 옳다고 상대에게 강요하고 간섭하고 있으니 장자가 볼 때는 너무나 웃기는 일이었다. 장자는 “자기 중심주의는 깨달음의 장애”(506쪽)라고 확신했다. 해서 자기를 굶길 것을 주문했다. 자기의 에고를 해체하고 자기를 완전히 잊음으로써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않게 되어 결국에는 공감이라는 영성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자는 규칙도 억지스러운 관심도 필요 없다. 그저 “ 큰 앎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자의식 없이 자비를 베푸는 기술을 획득한 셈이기 때문이다.”(512쪽)


  이 시기에 활동했던 또 다른 철학자로 맹자가 있었다. 맹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은 성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700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는 성군이 나오지 않는 상황. 맹자는 자신이 평민 출신이기에 성군은 될 수 없지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위임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왕에게 ‘자비와 정의’를 보여줄 것을 제안했다. 요순임금처럼 백성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의 곤경을 두고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말이다. 한마디로 군주에게 필요한 덕은 ‘자애’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왕도 맹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믿었다.”(516쪽) 사람들 마음 안에는 인, 의, 예, 지의 싹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단지심, 시비지심이라는 사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잠깐이라도 소홀히 하면 사단의 싹이 시들거나 죽게 되니 말이다. 물론 맹자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노력만하면 사람은 누구나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결국에는 맹자가 그토록 원하던 호연지기를 갖춘 군자가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군자는 황금률을 아는 사람이었다. 즉 군자는 “너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들을 대접하려고 최선을 다하면 이것이 인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임을”(519쪽)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자애로써 성군을 대신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맹자는 확신했다. 

 

 

《마하라바타》, 크샤트리아의 고민을 담다


  중국에서는 축의 시대의 이상이 꽃피고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약간의 혼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불살생이라는 이상과 선한 행동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왕, 크샤트리아, 바이샤는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크샤트리아의 고민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심각했다.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다보면 전쟁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행동은 비폭력과 더불어 언제나 엄격하게 진실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는 요가의 에토스와 양립할 수가 없었다.”(521쪽) 다음 생에 출가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말고 다른 해법은 없는 것일까. 크샤트리아의 이런 고민을 담고 있는 서사시가 바로 《마하라바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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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라바타》는 판다라와 카우라바 두 집안의 격렬한 싸움 이야기다. 판다라 집안의 장남 유디슈티는 전쟁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전사의 에토스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축의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의에서 도전장을 내미는 카우라바 집안과의 대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는 고귀한 전사 비슈마와 드로나를 죽여야 하는데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크리슈나의 교활한 전략에 의해 유디슈트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두 장군을 죽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로나의 아들 아스와타만이 지독한 광기에 사로잡혀 판다라 집안의 사람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제 판다라 집안의 가장 위대한 전사 아르주나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두 사람은 엄청난 무기인 브라마시리스를 발사했다. 그 때 출가자 두명이 “모든 생명체와 모든 세상의 행복을 바라는 축의 시대 정신으로 두 전사에게 무기를 거두어줄 것을 요청했다.”(530쪽)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평소 요가를 수행했고 신성한 삶을 살아왔던 아르주나는 분노를 제어할 수가 있었기에 그의 무기를 거두어들일 수가 있었다. 그와 달리 아스와타만은 격분을 참지 못해 무기를 거두어들이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이 방향을 틀어 판다바 형제의 부인들의 자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판다바 집안의 혈통은 끊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인류 전제가 소멸될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누가 나서서 이것을 끊지 않으면 악순환의 반복을 계속된다. 《마하라바타》는 전사가 축의 시대의 정신에 다가갈 때 폭력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로 올라간 철학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플라톤은 정치에 대해 환멸과 회의를 느꼈다. 그렇다고 완전히 정치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통치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플라톤의 결론은 철학자가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철학자일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처럼 ‘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달리 행위가 아닌 관념으로 즉, 이데아(형상)로서 상정했다. “이데아란 영원하고 변함없는 형상으로 물질 세계에 있는 모든 것에 존재하는 것이다.”(536쪽 재인용) 그것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받은 지성이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다.”(538쪽) 훈련받은 지성이란 다름 아닌 철학자이다. 그래서 통치를 하는 사람은 ‘선 이데아’를 발견하고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사실 이데아를 찾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영적 탐구와도 같았다. 물론 그것은 종교적 깨달음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이성이 아주 중요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사상은 축의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버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성적이지 못한, 다시 말해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가》에는 덜 유능한 사람들의 생식을 막고, 결함이 있는 아기는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똑똑한 아이는 폴리스에 데려와 끈질긴 교육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사실 자기 중심주의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모든 사람들이 플라톤의 전망을 따라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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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뿐만이 아니다. 플라톤은 비극도 거부했다. 비극이 불러오는 감정을 플라톤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감 따위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향한 슬픔이나 타인을 행한 동정은 통제하고 제어해야 했다.”(545쪽)  잘못하다가는 분노를 조장하거나 절제를 넘어서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서다. 《법률》에서 보여준 생각 역시 축의 시대와는 반대편에 있었다. 플라톤에게 종교는 믿음이 먼저고 실천은 나중이었다. 종교가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축의 시대 사상가들은 어느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리적 행동이 믿음보다 먼저였다. 

 

  결국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종교를 전적으로 지성적인 것으로 만들”(551쪽)면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철학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는 이성을 앞세워 수학이나 과학, 변증법에 놀라운 발전을 보이기는 했으나 영성과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땅으로 내려온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뛰어난 제자였다. 하지만 스승의 이데아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데아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552쪽)기 때문이다. 관념의 세계는 비현실적이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차라리 동물이나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었다. 플라톤에 의해 하늘로 올라갔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에서 이성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이란 “분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연구하고,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었다.”(554쪽)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신성을 느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성은 불멸이며 생각은 존재의 최고 상태를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로고스의 인간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러나 플라톤처럼 감정을 무시하거나 비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분노하지 않을 정도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극을 통해 자기의 감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신에 대해서도 초월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자’라고 명명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영적탐구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현실적이었고 실용적이었다. 그는 “서구를 과학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그 길은 첫 번째 축의 시대 이후 거의 2천 년 만에 제 2의 위대한 변화를 부르게 된다.”(5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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