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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합리와 신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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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8-30 03:25 조회3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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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5)-『신의 역사』③

 

 

합리와 신비 사이에서


김지숙

 

 

신을 증명하라! 


  9세기쯤 되자, 이슬람은 그리스 과학과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팔사파라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했다. 파일라수프라고 불렸던 무슬림 철학자들은 그리스 과학을 종교에 적용했다.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철학의 신이 기독교의 신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철학에서 등을 돌린 것과 달리, 파일라수프는 철학자의 신이 계시의 신보다 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리스 철학의 신과 알라가 같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고, 과학과 이성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고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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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파일라수프는 “종교에 덧붙여 있는 원시적이고 편협한 요소를 제거하여 종교를 정화시키기를 원했”(301쪽)던 것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슬람을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고 싶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종교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성과 논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신을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성은 『꾸란』에 나온 말을 입증하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아무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신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것’말고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담 대체 합리주의적 논의는 왜 필요한 것일까. 이론으로는 신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슬람 사상가였던 알 가질리가 가졌던 의문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는 팔사파를 3년이나 연구하며 『철학자의 모순』을 집필했다. 그 책에서 알 가질리는 “신의 유출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신이 개벽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본편적인 것만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신이 너무나 숭고하여 비천한 실재들을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327쪽)등등에 대해 따졌다. 이것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팔사파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븐 루쉬드는 끝까지 팔사파의 입장을 견지하며 알 가자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앗다.  그는 맹목적 신앙에 저항하며 파일라수프만이 『꾸란』에서 묘사한 ‘참 지식에 깊이 뿌리 받은 자’이며 그들만이 『꾸란』을 해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수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수긍하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자들도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모든 사람이 신비적 수도 원리를 소화할 수는 없으며, 그러다보니 정신 질환을 겪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슬람 신학인 칼람 역시 철학적 지식과 논거 없이 교리만을 따지다 신앙을 떠나게 한다고 이븐 루쉬드는 지적했다. 그는 “맹목적 신앙에 저항한 합리주의의 제왕”(333쪽)답게 교리 신조를 만들어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교조주의로 빠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결국 이븐 루쉬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그렇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아니, 무슬림들은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신 개념을 도출하는 것이 실패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사파 철학의 절정을 이끌었던 이븐 시나도 말년에 신비주의자로 살았다는 것을 보면 팔사파의 한계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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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시나와 이븐 루쉬드 

 

 

이븐 루쉬드에 의해 그리스 철학을 전수받은 서구 기독교 사회의 합리주의적 신 논쟁은 삼위일체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특히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온다고 서방 기독교에서 공인한 것이 문제였다. 인간의 지성과 개념을 초월한 신의 통일성을 주장한 동방 기독교로서는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도무지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갈등이 고조되다 결국에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고 말았다.

 

사실 서구 기독교도 파일라수프처럼 세계적 종교로 도약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분명하고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해명하려면 삼위의 동등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해한 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소원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일찍이 이 점을 직시하고 있었던 켈트족의 철학자 에우리게나는 신을 ‘존재 이상’이라는 뜻으로 ‘무(無)’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신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내재성과 절대적 신비 그 자체임을 밝힌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도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내면적 차원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자들이 “직접 대할 수 잇는 실상만을 볼 뿐, 수수께끼 같은 불가해성의 신비와 거울의 안같이 만질 수 없으나 분명이 현존하는 실상을 깨닫지 못한다.”(352쪽)고 비판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신을 만나다


이렇듯, 신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 난관에 부딪히게 되자 신비주의적 신앙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종교 역사를 살펴보면 신비주의적 신 관념은 원래 있었다. 사실 야훼의 인격적 관념은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하고, 때로는 인간의 과오를 인정하는 우를 범하고, 때로는 인간 소외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을 인식한 유대교는 인격적 신 관념을 버리고 신비적인 신 관념을 채택했는데 바로 ‘보좌 신비주의’ 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신비주의 신앙은 신화를 종교체험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종교적 표상을 발현시키면서 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신에 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 신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407쪽)뿐이었다. 그래서 신비주의 신 관념에는  보편적인 신 관념이 없다.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이 중요하기에 신 관념도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철학자들은 신을 ‘being’이라고 말하는 반면, 신비주의자들은 ‘nothing’라고 말한다. ‘nothing’이란 없음이 아니라 신에 대해 규정할 수 없음을, 무한한 신 관념이 존재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운동으로 반유대적 정서가 유럽을 휩쓸 때 유대인들의 신앙은 금욕적이고 경건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치욕과 수난에도 초연할 수 있어야 했고, 기도에 몰두하며 신의 현존을 느끼고 깨달으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에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비관주의적 신앙이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박해가 없었던 이슬람 제국의 유대인들은 인간의 내면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카발리스트(유대 신비주의자)라고 불렸던 그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대신 상징적으로 읽어내려고 했다.  카발리스트들은 신비적 체험을 통해 내적 변화를 겪으며 신의 존재를 실감하곤 했다. 유대인들은 추방과 탄압의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더 신비주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갈리리로 이주한 세파르담(스페인과 포르투칼계 유대인)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추방에 대한 자괴감과 모멸감을 치유하기 위한 신앙을 키워나갔다.  유수의 삶을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파일라수프들이 득세했던 이슬람 제국에도 원래 전통적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수피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사실 무함마드도 신비체험을 통해 신을 만났다.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그리스 철학을 접하면서 일시적으로 팔사파들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뿐이었다. 신의 축복을 명상할 것을 강조했던 이븐 알-아라비는 “모든 인간 개인이 독특한 성육신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37쪽) 신성과 인성이 다르지 않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단일한 해석에 매달리는 교리적 종교를 거부하며 개별적 신 체험을 중시했던 것은 당연했다.

 

팔사파의 한계와 몽고의 침략이라는 사건은 더욱 신비주의 신앙에 몰두하게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신은 수피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수피들은 비의적 체험을 통해 신의 속성을 각자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했다. 사회 정의를 앞세우는 이슬람의 비전과도 딱 맞아떨어지면서 수피즘은 제국의 신앙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란의 시아파가 이맘을 내세우면서 순니파와 갈등을 빚었지만 시아파는 기본적으로 신비주의적 영성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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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


앞서도 보았지만, 기독교 사회에서의 신비주의적 신앙은 대부분 동방 기독교에서 볼 수 있다. 동방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통해 신의 역동성을 체험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발리스트나 수피가 그랬던 것처럼 직관적이고 경험적 신 이해를 추구한다. 그래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얽매고 있는 교만과 탐욕, 슬픔, 분노와 같은 ‘정념’을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동방 교회 신비주의자들은 타보르산에서 변형된 예수처럼 신적 ‘역동성’에 의해 변화되기를 원했다.”(410쪽) 카발리스트들이 신과의 합일을 주저한 것과 달리, 동방 교회 신비주의자들은 신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오는 경험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이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으나 신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적 신앙의 지평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동방 기독교의 영성은 오스만투르크족이 비자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러시아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서구 기독교는 교리 해석에 집중하다보니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좀 늦게 나타났을 뿐 서구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신앙이 있었다. 흑사병,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같은 사건은 교회에 대한 불신감과 인간의 무기력함을 낳으며 신비주의적 신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상황과 아주 비슷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고통에만 집중함으로써 신에게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가 분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 신학과 신앙의인’의 교리를 설파했던 루터도 신의 분노를 중심에 두고 신을 이해했다. 칼뱅은 노동의 신성함과 근검절약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곧 신의 심판이라는 ‘신 예정설’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인간소외를 불러왔고 근대 자본주의와 결탁하면서 그것이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사실 칼뱅의 신앙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신과의 관계를 확립하는”(503쪽) 신비주의적 영성이 있었지만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서구 기독교에서는 이성에 의한 신 관념이 재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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