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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무신론과 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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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09-06 00:36 조회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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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5)-『신의 역사』 

 

신론과 신의 죽음


​김지숙 


수많은 신 관념의 등장


  자기에게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과학 문명은 “기존 전통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인간 역사의 부단한 진보와 발전에 대한 벅찬 기대감을 심어주었다.”(525쪽) 기술과 효용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에 대한 이해도 합리적인 이해보다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수많은 신 개념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무신론이라고 명명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 관념과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무신론은 신 존재를 일단 상정해놓고 출발하는 것이다. 16세기 말부터 슬슬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근대 계몽주의 기간에 본격적인 무신론자들이 등장했다. 


  그런 점에서 파스칼은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합리적 증명으로는 도무지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파스칼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 곧 구원의 징표이자 신의 현존의식이라고 확신하며 교회라는 권위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게 신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였으며, 신앙은 막연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있는 결단이자 새로운 윤리 의식을 일깨우는 실존적 체험을 뜻하는 것이었다.”(531쪽)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기계공으로서의 신’을 주장했다. 뉴턴은 서로 끌어당기는데도 부딪히거나 거대한 덩어리로 만들지 않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던 중 우주의 운행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것이 바로 신적 존재로서의 기계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뉴턴에게는 우주를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만 신 존재를 알 수 있기에 성서는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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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턴은 훨씬 더 파격적이었다. 『실락원』에 등장한 영웅은 신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사탄은 권위에 불복하고 미지의 세계에 과감히 뛰어들며 인간의 구원에 신이 필요하지 않음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떠나는 선택은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신과의 분리라는 세속화, 즉 이신론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실 이신론이 등장하는 것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의 피로감에서 기인한다. 계몽주의자들은 파멸로 몰아넣는 ‘냉혹한 신’ 대신 ‘지고한 신’을 선택했다. 스피노자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유대교에서의 추방을 경험했던 스피노자는 ‘완전자로서의 신’을 증명해냈다. 그의 신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 그 자체였다. 


  이신론과 더불어 ‘마음의 종교’라는 새로운 신앙형태가 등장했다. 그것은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끊임없이 인간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는 신의 임재를 깨닫는 것으로, 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온유와 인내의 마음으로 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556쪽)이 거듭남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교리보다는 마음을 흔드는 감정이 중요하다보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광란적 무아체험과 예수의 고통에만 집중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급진적 경건주의 신앙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일체의 사유재산과 계급차별을 금지하고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죄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매우 파격적인 궤변 논리를 펴기도 했다.”(565쪽) 사실 이것은 지나친 죄의식을 강조한 청교도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극단적 마음의 종교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을 이끄는데 기여를 한 것을 틀림이 없었다.


  유대교에서는 아주 독특한 변화가 있었다. 자신을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고 믿었던 샤베타이 제비때문이었다. 랍비 니단이 거들면서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아라고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 그는 억압과 추방 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데 샤베타이 제비가 이슬람교로 배교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했다. 스페인에서 살던 유대인들이나 서구 독일과 동구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핍박과 쫓김을 당하기 않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타당성을 확보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즉 샤베타이 제비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574쪽)이라고.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그리스, 터키 지역의 유대인들은 샤베타이를 따르고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사실 샤베타이의 개종은 기독교가 예수라는 메시아를 내세우며 유대교와 결별하면서도 구원을 완성한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결국 ‘샤베타이 숭배’는 성육신과 삼위일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기존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이단이라고 할 만큼 파격적인 행보였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해야 유대인들은 자신이 처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슬람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수피가 우세했던 상황은 서서히 역전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가 덧대어진 신비주의적 관념에서 등을 돌리고 이슬람 초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무함마드 숭배조차도 반대했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함에 따라 제국주의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신으로부터의 독립


  앞서도 보았지만, 무신론은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대적 신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 무신론자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초가 되자 ‘신의 죽음’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역사 속에서 ‘소외’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신은 두려움과 갈등의 상징이었다. 신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인간이 신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합당한 근거를 제시했다. ‘신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낭만주의 사상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사상의 흐름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신의 죽음을 얘기한 신비주의적 시인이었다. 그는 신을 사탄으로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절대 고립자로서의 신은 예수 안에서 죽었으며. 인간 세계와 격리된 절대 초월자로서의 신은 더 이 상 존재하지 않는다.”(608쪽)는 것이 블레이크의 주장이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시에서 냉혹하고 잔인한 신 대신 신의 자기 비움의 행동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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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설파했던 사람들은 철학자 그룹에서 나왔다. “세계에 어떤 절대자도 이성도 신도 정신도 존재하지”(612쪽)않는다고 주장한 쇼펜하우어는 음악이나 미술, 즉 예술을 통해서 구원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신에게 노예처럼 굴종하는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니체는 사람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노동자는 핍박받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는 상황을 어떻게 신이 외면할 수 있는가. 사회적 정의를 중요시하던 아모스나 무함마드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신랄히 비판하며 신 존재를 일축했다. 니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아예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신에게 예속되어 그동안 잠자고 있던 인간의 능동성을 자극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신의 자리에 초인을 앉히면서 강자의 출현을 역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치즘에게 잘못 악용되고 말았다. 독일 민족을 최고의 존재로 각인 시키며 유대인 탄압에 앞장서게 만든 단서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고난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추방에서 한 숨 돌리는가 싶더니 유대인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인이야말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시온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신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신에게 지향했던 마음을 돌려 그들은 현실적 성취에 더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시온 언덕으로 돌아가 유대인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영적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 근본주의 신앙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에는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을 유발시키며 중동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슬람에서도 신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다. 서양의 침략에서 이슬람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과거의 찬란한 문명은 과거의 향수가 되었고 서양의 과학 기술은 신세계로 비쳐졌다. 지식인들은 서구의 발전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다. 전통을 무시하고 과거와 단절하면서 무슬림들은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서구에서 ‘신’은 인간 소외의 원인으로 이해되었으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식민지화 과정의 주도자로 이해되었다.”(624쪽) 모든 이슬람의 현대화를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꿈틀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20세기 끝이 다가왔을 때, 신의 부재는 오히려 유신교보다 더 종교적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막는 신이 왜 필요했겠는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신으로부터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통과 공허함은 계속되었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들은 다시 신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신 개념이 인간 사회에 중요한 본질이며 종교가 삶의 유한성을 자각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사회 이론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신 개념이 사라질 때, 윤리는 단지 인간의 변덕스러운 기분 문제로 전락하고 정치도 권모술수로 변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667쪽)고 생각했다. 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비와 공감을 통해 인류가 삶의 폭력에 맞설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신 관념은 수 없이 바뀌었다. 하지만 신비주의적 신과 합리적 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론이 한참 주가를 올릴 때도 한 쪽에서는 유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하나의 신앙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결국 “힘차게 살아 숨 쉬는 신앙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신의 역사the history of God가 주는 여러 신앙적 교훈과 경고를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6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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