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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전작 스케치 | 무엇이 성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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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8-10-11 01:41 조회6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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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7)-『성서』

 

 

무엇이 성서인가

 

김지숙

 

 성경은 세계적인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과연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사실 나로선 성서를 읽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것을 펼쳐보지만 창세기를 읽다 그냥 헛웃음 치며 덮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신약을 읽을 때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다시 펼쳐보게 하는 책은 결코 아니었다. 앞뒤가 전혀 맞지도 않는 것 같고 구성도 헐렁해 보였다. ‘제기랄, 성경이 왜 이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거야?’ 차라리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했다. 몇 번 되지도 않는 성경 읽기는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났다. 대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니,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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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탈영토화, 생성으로서의 성경


  성서는 신의 말씀인데, 구전으로 전해지다 어느 순간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문제는 기록자가 여러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관점에 따라 내용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성경책이 앞뒤가 안 맞고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가 한 몫을 한다. 그런데다 100% 완벽하게 신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언어는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갖는 한계였다. 특히 신의 말씀이 '초월'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 너머의 의미를 사유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 적용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에스라의 낭독은 고전 유대교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계시의 수용과 보존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재해석을 포함했다.(‧‧‧)그가 경전을 설명할 때, 그의 주석은 아득한 과거의 모세로부터 온 원래의 토라를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즉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창조해냈다. 성서 저자들은 이처럼 그들이 전해온 것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개정했다. 계시는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며 끝없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항상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새로운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카렌 암스트롱, 『성서』, 세종서적, 2015, 46쪽)

  토라 전문가였던 에스라 역시 모세의 율법을 전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덧붙였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이 성서에 투영되다보니 모세의 율법을 변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계시는 늘 일어나는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고민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에는 율법서인 토라와 예언서인 느비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문서들을 재해석한 성문서인 크투빔이 있다. 「역대기상하」가 바로 그것이다. 즉, 「사무엘기상하」, 「열왕기상하」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이 「역대기상하」로 크투빔의 일종이다. 이제 “학자들은 단순히 예언자들에 대해 배울 뿐만 아니라, 주석으로 인해 자신들 또한 예언자가 되었다.”(51쪽) 요컨대, 유대인들은 성서를 축자적으로 읽지 않았다. 

 

  유대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필론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는 성서를 역사적 맥락을 넘어 실재적 차원에서 해석하였다. 말하자면 원문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 좀 더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알레고리아적’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을 통해 「창세기」는 완전히 다르게 읽혀졌다. 1장은 로고스의 창조를, 2장은 물질적인 우주의 창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단순히 형제간의 다툼이 아니라 신의 사랑이 파괴될 때 발생하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며 영적인 삶을 묵상할 수 있었다. 

 

  복음서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과 맞물려 성서를 재해석한 결과였다.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성전 파괴를 지켜봐야 했던 유대인들은 성서에서 메시아의 존재를 찾아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2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종’은 메시아적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동일한 ‘혼동을 주는’ 기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고난 받는 종’을 비교함으로써 ‘고난 받는 메시아’란 개념을 정립했다.”(83쪽) 게다가 예언서와 율법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예고되어 있었다.  마가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에는 「마가복음」이라는 성서를 남길 수 있었다. 

 

  랍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드라쉬’라 불리는 그들의 독특한 주석은 『미쉬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경전을 낳았다. 미쉬나는 '반복을 통한 배움'이라는 뜻인데 미드라쉬의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성서를 읽는다고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성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파격성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 바리새파 사람들, 랍비들 등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이들의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활발하게 토론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119쪽) 수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랍비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토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들은 ‘토라의 해석’이 그것이라고 답한다. 

 

  루터는 「시편」에 나오는 ‘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기독교의 타락을 간과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밤낮으로 성서를 묵상하면서 ‘신의 의’란 신적인 자비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여 성서로부터 그리스도를 이끌어 내는 ‘기독론적 해석’ 방식을 창안하는 것은 물론, 다른 학자들의 해석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고해성사하라!’도 ‘네 마음을 바꿔라!’는 것이 잘못 번역된 것임을 지적하며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던 로마 교회에 직격탄을 날렸다. 종교개혁의 신호탄이었다. 더 이상 교회나 성직자들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성서에만 기댈 것을 촉구했던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개인이 혼자 성서를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게 했으니 말이다. 그 결과 성서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개신교의 수많은 분파가 생기며 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 성서에는 한 가지 해석만이 존재할 수 없으며 성서가 성서를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의 탈영토화, 생성으로서의 성경!’ 이랬기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가 아직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카렌도 말한다. 전에 쓰인 말씀들은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하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즉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해석의 문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서인가. ‘성서의 해석’, 바로 그것이 성서다.

 

 

자비, 성서의 시작이자 끝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아무리 성서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지만 그것으로 인한 분쟁이 만만치 않다는 것. 개신교의 수많은 분파라는 것도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들 간의 갈등을 보여줄 뿐이다.  

 

성서를 이해한다는 사람의 해석이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그자는 성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비를 구성하는 데 유용한 가르침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나, 설령 성서의 저자가 그 부분에서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속은 것이 아니다. (146쪽 재인용)

  인용문은 성서를 읽고 해석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서 이해에 있어 결정적인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개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이 성서 접근을 방해하면서 예수가 전하려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로 꽉 차 있어서 성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급하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자비인 은총을 발견할 때까지 묵상해야 한다고, 그 어느 누구도 기록된 것에 관해 자신의 형제에 대항하여 자존심을 세우지 말라”(145쪽 재인용)고 당부했다. 내 해석이 옳고 네 해석이 틀렸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직관이 부족했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영적 탐구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 자비의 실천이라는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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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특히 중세의 수도사들은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라는 성서 읽기의 영적 기술을 발전 시켜왔다. 그것은 조용히 성서를 낭독하면서 신의 말씀을 몸에 새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낭독의 리듬에 빠져들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서 이야기에 몰입하였다. 그것은 성서의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행위였다. 일반 신도들에게는 ‘미사’가 렉치오 디비나였다. 미사를 통해 예수의 삶을 묵상하면서 신과의 합일에 이를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성서를 축자적으로 읽으려는 움직임이 강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 탓이었다. 이제 “성서는 그것이 정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있는 책이 되었다.”(204쪽) 하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곧 깨달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성서는 모순덩어리였고 신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영혼 없는 해석의 결과였다. 결국 기도와 행위를 통해서만이 성서의 초월적 영역을 경험할 수 있다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때 의례를 중시하는 옛 방식으로 돌아갔던 것도 그런 이유다. 기도문 읽기, 집중하기, 침묵과 금식과 암송 등의 의례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신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상에서의 자비와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함세웅 신부님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성서를 단지 과거 얘기가 아니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시대의 명령으로 읽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성서를 읽는 것은 자아 성찰의 과정이며 자비는 성서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성서는 정보 전달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책으로 전락하게 된다. 

  

  

  

 

댓글목록

김삼봉님의 댓글

김삼봉 작성일

고해성사를 하라!가 네 마음을 바꿔라!였다니. 기존에 "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갑갑한 이미지와 정말 다릅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해석으로 바라보는 종교라니, 탈영토화로서의 성경이라니? 정말 새롭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명령이나 맹목이 아닌 "영성" 좀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영성이 뭔지 잘 아는 건 아니지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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