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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꺽정시대 | 후기, 삶을 버티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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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차리 작성일19-02-06 23:35 조회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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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리뷰 ⑮

 

후기, 삶을 버티는 힘

 

성승현

 

 

 

이날 밤 여러 두령이 꺽정이 사랑에 모여서 이야기들 하는 중에 박연중이의 처신하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서림이가 명철보신이라고 칭찬하다가 꺽정이가 후기 없는 늙은이의 일이라고 타박하는 바람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고 우물쭈물 자기의 말을 거두어치웠다. (『임꺽정』, 194쪽)

운달산 도적으로 유명한 박연중이를 두고 서림이와 꺽정이가 입장을 달리 말하는 중이다. 서림이는 박연중을 두고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 자기 몸을 보신하는 사람’이라고 평하고, 꺽정이는 ‘참고 버티어가는 힘이 약한 사람’이라 평하고 있다. 

 

박연중은 을사년에 지은 죄를 용서 받았는데, 그럼에도 산중에 들어앉아 사십여년 동안 자행자지하며 지냈다. 지금은 대당의 괴수 노릇을 했음에도 발을 씻구 나와서 여생을 안온하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후기’라는 것이다. 후기란, 삶을 살아가며 참고 버티는 힘을 말하는데, 똑같은 박연중을 두고 서림이는 높이 여기고, 꺽정이는 낮춰 본다. 왜 그럴까? 

 

 

서림, 후기가 없는 자 

 

“지모가 비상하니까 교사두 비상하거든.”

김산의 말이다. 청석골에 놀러온 친구 이춘동에게 서림에 대해 이같이 설명한다. 서림은 표리부동한 사람인데, 지모 하나는 비상하다는 것. 하지만, 그 지모가 교활하게 남을 속이는 데 쓰이기 쉬우니 말 한 마디도 삼가야 한다는 뜻이겠다. 

 

서림에게 지모는 삶의 방편이다. 청석골에 입성하게 된 것도 ‘지모’ 덕이었다. 청석골의 모든 전술과 전략을 짜고 있기에 어느새 임꺽정도 그를 의지하게 되었고, 또 그만큼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나름 평온한 삶이었다. 그런 서림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장모의 부탁을 받아 서울에 나갔다가 좌포청에 잡히게 된 것이다. 서림은 약한 몸에 날아오는 방망이질을 참기 힘들었고, 햇빛이라고 들어올 틈도 없는 동굴 같은 감옥도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은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포교들에게 잡히는 순간부터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이 국면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에 골몰했지만, 슬기 구멍이 막혔는지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았다. 국면이 전환될 것 같지 않자, 제 버릇이 나오기 시작한다. 포도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라 “소인이 죽기 전에 꺽정이를 잡아서 나라에 바칠 생각이 났소이다. (중략) 꺽정이 같은 나라와 백성의 큰 화근을 없애구 죽사오면…”(258쪽)이라며 임꺽정이 마산리에 들러 신임 봉산군수 이흠례를 엄습해 죽이려 한다는 것을 고해바친다. 

 

서림이는 김산이 데려온 이춘동에 대해서 유일하게 의심을 놓지 않았다. 다른 두령들은 이춘동을 허물없이 대하고, 임꺽정은 마치 동무처럼 대하며 집에 돌아가겠다는 그를 잡아두기까지 했는데, 서림은 그의 언행을 살피고 살핀 후에야 의심을 놓는다. 서림이가 청석골에 입당할 때에도 호불호는 갈리었다. 곽오주는 지금까지도 꾀 많은 서림을 믿지 못하고 타박을 일삼는다. 서림이 입장에서는 억울했겠지만, 곽오주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서림이의 지모는 상황이 변하자, 너무도 쉽게 얼굴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저 혼자의 안위를 찾아보겠다는 심보밖에 쓸 수 없다는 것, 지모 하나 믿고 살아가는 자의 슬픈 말로가 아닐까. 지모는 참고 버티어 가는 힘을 주는 방편이 아니다. 그보다 힘든 길을 피해가도록 한다. 그러니 서림이 입장에서는 자기 몸 보신 잘하는 박연중의 삶이 높아보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박연중, 후기가 약한 자

 

박연중은 이춘동 어미 환갑잔치에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임꺽정과 만나 회포를 풀게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박연중 아들과 갖바치 손녀의 혼인 얘기가 나온다. 박연중은 “내 평생에 진정으루 우러러본 인물은 김사성 영감두 아니구 조대헌 영감두 아니구 갖바치 노릇하시던 양선생일세. 그 선생의 손녀를 며느리 삼게 되면 내겐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네.”라며 혼인을 정한다. 이어서 박연중 딸과 꺽정이 아들 백손이의 혼인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박연중은 탐탁치가 않다. 박연중이 생각에 청석골은 불구덩이다. 며느리는 데려오는 것이라 관계없지만 딸은 들여보내는 것이기에 그 불구덩이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여 허심탄회하게 고백을 한다. “나는 대체 자네네 청석골 사업이 너무 큰 것을 재미없게 아는 사람일세. 우리가 압제 안 받구 토심 안 받구 굶지 않구 벗지 않구 일생을 지내면 고만 아닌가. 자네네 일하는 것이 나 보기엔 공연한 객기의 짓이 많네.”(307쪽)라며 봉산군수 죽이려는 계획을 말리려고 든다. 

 

박연중 입장에서 임꺽정은 위험천만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객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복수를 하겠다며 위험을 자초하고, 위험이 앞에 있으면 피하는 것이 아니고 달려드는 것이 객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박연중 생각에는 조용히 사는 것, 그 외에 더 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꺽정이 입장에서는 어떤 것에도 뛰어들지 않고, 안위만 차리는 박연중의 삶은 재미없기만 하다. 힘 없는 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임꺽정, 후기가 강한 자

 

“우리가 도망을 하더라두 관군 온 뒤에 도망하는 것이 관군 오기 전에 도망하는 것과 다르다. 오륙백명이 몰려와서 우리를 보구 못 잡으면 그놈들 낯바대기가 어떻게 될까 좀 생각해봐라.”(314쪽)

서림의 고발로 관군이 이춘동의 집으로 몰려오고 있다. 관군과 싸울까 생각하는 임꺽정에게 박연중은 “자네네가 오륙백명을 능준히 당할 수 있더라두 이런 때야말루 삼십육계에 주위상책일세. 두말 말구 달아나게. 공연한 객기를 부리다가 큰코 떼일 까닭 있나.”(312쪽)며 말린다. 하지만, 임꺽정의 생각은 다르다. 도망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자신은 잡힐 까닭이 없으니 싸울 때까지는 싸워보겠다는 입장이다. 관군 오백여명과 일곱 명이 접전을 벌인다는 것도 그에게는 짜릿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게 싸울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데, 도망부터 쳐야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에워싸든지 막든지 저희 할 수 있는 대루 다 하라게. 그래두 우리는 빠져나갈 테니 염려 말게.”라고. 이 근자감을 어찌 봐야 할 것인지!

 

처음에는 이 장면이 무척 불편한 듯 느껴졌다. 군사가 몰려온다고 하면 도망 좀 가지 싶은데 돌덩이, 질그릇, 잿독 등을 가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질 않나. 수세에 몰려 위험한 듯한데 군사에 에워싸여도 걱정이 없다질 않나. 자신감이 정말 객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도망쳤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항거를 하는 통에 연천령이 몰고 온 군사들이 창피를 보고, 도둑놈을 잡지 못하고 놓치면 서울에 안 가겠다던 연천령은 임꺽정의 칼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다. 일곱명의 도적을 모조리 잡아버리겠다던 그들의 호언장담이 웃음거리가 된 것은, 결국 임꺽정이 가진 객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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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버티는 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자칫 수동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달리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렵고 고단한 삶,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 인간의 삶을 버텨낸다는 것은, 단지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박연중은 ‘압제 안 받구 토심 안 받구 굶지 않구 벗지 않구’ 일생을 지낼 수 있다면 쥐 죽은 듯이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꺽정이에게 말한다. 하지만, 꺽정이 입장에서 박연중의 말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본다. 꺽정이는 압제를 안 받는 것, 토심을 안 받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압제와 토심을 행사하는 ‘권력’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임꺽정의 후기, 삶을 버티어내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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