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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2) - 유학은 어떻게 제국의 철학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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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9-03-10 16:49 조회5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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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 (2)
- 유학은 어떻게 제국의 철학이 되었나? -
 

 

 

 

강보순

 

유학이 정착할 수 없는 형세

 

  두태후가 붕어한 이듬해인 원광 1년, 한무제는 현량천거(추천제도)로 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손홍을 발탁했다. 무제는 이번에도 유학자였다. 주지하듯 무제가 처음 즉위하여 뽑은 인재들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무제 2년에 뽑은 당시 조관, 왕장 등의 유학자들은 두태후의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전원 침몰한 바 있었다. 당시 유학은 왜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일까?

  숙손통이 漢의 국가 예의를 제정하여 태상에 임명되었고 함께 제정에 참여한 여러 제자들은 모두 인재로 선발되었는데, 고조는 유학의 쇠퇴를 탄식하며 학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었고 천하가 완전 평정된 뒤에도 학교나 교육을 행할 겨를이 없었다. 효혜제나 고후 시절에 공경은 모두 무력의 공신이었다. 효문제 때 제법 文學之士를 등용했다지만 문제는 본래 법가의 학설을 좋아하였다. 효경제때에도 유생을 등용하지 않았고 두태후 또한 황로술을 좋아했기에 여러 박사는 자리나 채우고 하문이나 기다렸으며 높이 등용된 자도 없었다.

「유림전」, 『한서』8권, 명문당, 211쪽

  사유는 형세에 의존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유라 하더라도 그 사유가 형성될 수 있는 형세가 마련되지 않으면 뿌리 내릴 수 없다. 한나라의 초기는 그러한 사유와 형세와의 관계를 정확히 보여준다. 한고조는 통일이후에도 여전히 제후국 및 흉노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유학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고, 혜제와 여태후 시절에는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공신들이 모두 한고조를 도와 무력으로 일어난 인물들로 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태평성대를 일군 문제는 법가의 학설을 좋아했으며, 그의 부인 두태후는 황로술을 숭상해 아들 경제치세의 대부분과 손자 무제 섭정 6년간을 황로의 무위정치로 다스렸다. 한나라 초기에는 이렇듯 자의든 타의든 유학이 안착할 수 없는 형세였다. 그 덕분에 백성들은 쉬면서,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중서가 보기에 지금은 달랐다. 오랜 안정은 성장의 욕구를 낳고, 풍요는 사치를 낳는 법이다. 백성들은 점점 공검(恭儉)을 잊고 사치의 욕망을 내비쳤다. 황로의 정치가 작동할 수 없는 형세가 아래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一郡이나 一國의 백성 중에서 조서에 응대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왕자가 곳곳에서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폐하께서 태학을 진흥시키시고 명사를 두어 천하의 인재를 양성하시면서 자주 그 인재들을 시험하시고 자문하신다면 영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태수나 현령은 백성을 거느리는 장수이며 폐하의 뜻을 받들어 널리 교화를 펴는 사람입니다. 만약 백성을 인솔한 장수가 어질지 못하면 폐하의 덕을 펼 수가 없고 은택도 아래로 흐르지 못할 것입니다.

「동중서전」,『한서』4권, 명문당, 388쪽

  동중서가 본 황로의 무위정치는 백성들을 쉬게 할 수는 있었으나, 인재 양성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는 ‘오초7국의 난’ 이후 제후를 견제하기 위해, 승상 뿐만 아니라 2천석 급의 관리들을 모두 중앙에서 뽑아 지방에 파견해야 했기에, 유례없이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는 황제의 조서에 즉각 응대할 수 있는 관료가 없을 정도로 인재가 부족했다. 제도를 정비 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뽑아 놓은 ‘소리(小吏-말단관리)들은 학식이 얕아서 그 뜻을 다 알지 못하기에’ (「유림전」,『한서』8권, 명문당, 217쪽) 황제의 명령을 온전히 이행할 수조차 없었다. 그 결과 황제의 명령이 곳곳에서 단절되어 지방의 백성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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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명령을 온전히 이행할 인재가  부족했던 당시 한나라


  또한 동중서는 백성들을 교화시켜야 하는 주체인 태수와 현령의 자격과 자질 역시 문제 삼았다. 현재 태수나 현령으로 복무하고 있는 자들의 본업이 ‘장수’라는 것! 전장에서 최적화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장군이, 개국공신이라는 이유로 전혀 다른 전문성이 요구되는 관리직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동중서는 지적한 것이다. 동중서가 보기에 장군 출신이 태수가 된다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만 백성을 다스리게 위임한’ 형국으로, 이 관료 배치는 결국 덕이 아닌 형벌에 의지하겠다는 의도와 다르지 않았다. 하여 동중서는 그들을 교육할 시스템도, 교육할 인재도 없는 상황을 문제 삼아 무제에게 지금이야말로 황로의 질서가 아닌 유학적 질서로 천하를 바로 세울 기회라고 간언한다. 무제 역시 이러한 황로 정치의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 무제는 왜 다른 사유가 아닌 오직 유학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제국을 다스리는 수성의 정치학, 유교

  유학자 숙손통이 한고조에게 “유생은 앞으로 나아가 얻지는 못하지만 이룬 것을 함께 지킬 수 있습니다. 신이 魯의 유생들을 데려다가 저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제정하고자 합니다.” (「숙손통전」,『한서』3권, 명문당, 141쪽) 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유학은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수성의 정치학이다. 주지하다시피 제국을 통합하는 힘과,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는 힘은 전혀 다르다. 진나라가 최초의 전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했음에도 15년 만에 망한 이유는 전국을 통일한 바로 그 엄격한 법가의 힘으로 제국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나라는 ‘수성의 정치’로의 모드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다. 무제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나라가 태평하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황로정치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유학의 무엇이 수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동중서가 ‘道란 것은 정치에서 따라가야 할 바른길이니 仁義禮樂은 모두 그 도구입니다. 옛날의 성왕은 다 죽고 없지만 그 자손이 수백 세 걸쳐 오랫동안 편안할 수 있던 것은 예악과 교화의 결과입니다.’(「동중서전」,『한서』4권, 명문당, 362쪽) 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유가에서 사용하는 수성의 도구는 인의예악이다. 유학은 인의예악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학문으로, 유학이 바로 세우고자 하는 질서는 군신의 질서, 부자의 질서, 부부의 질서, 친구의 질서, 장유의 질서와 같이 나라 구성원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질서다. 유학은 무엇을 공부하기에 이런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일까?

  『역경』은 천지와 음양과 사계와 오행을 확실하게 드러내었으니 변화를 아는데 도움이 되며, 『예경』은 인륜의 기강을 세웠으니 행실에 유리하고, 『서경』은 선왕의 정사를 기록하였으니 정치에 도움이 되며, 『시경』은 산천과 계곡, 금수와 초목, 자웅과 암수 컷을 묘사하여 풍교에 이로우며 『악경』은 입언을 즐긴 것이니 화해에 도움이 되고, 『춘추』는 시비를 가린 것이니 치인에 이롭습니다.

「사마천전」,『한서』5권, 명문당, 172쪽

  유학자는 6경을 통해 인의예악을 공부한다. 역경은 우주변화의 질서가, 예경에는 인륜기강에 대한 질서가, 서경은 정치질서가, 시경은 풍교질서가, 악경은 화해의 질서가, 춘추는 시비의 질서가 담겨 있다. 즉 6경은 질서를 공부하는 커리큘럼인 셈이다. 이러한 유학은 흥미롭게도 당시 황로학과는 달리 시험을 통한 수준 가늠과 관찰을 통한 능력 검증이 가능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인의예악이 측정 가능한 도덕적 소양이라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경을 두루 섭렵하지 않고, 1개 커리큘럼의 전문성만 인정받아도 인재로 쓰일 수 있었다. 예의 전문가, 시경 전문가와 같이 말이다. 황로의 사유를 중심으로 『사기』를 썼던 사마천이 보기에도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실질적 학문이었다. 


  무제는 이 유학적 질서를 공부한 유학자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 많이. 이 부분은 훗날 영토확장과 연결이 되는데 우선 여기까지만 알아두자. 무제는 이렇게 교육된 유학자들을 통해야만 비로소 사해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선정을 전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중서의 유학,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어보자. 왜 무제는 다른 유학자들의 유학이 아니라 하필 동중서의 유학이었을까? 무제는 동중서의 유학이 마음에 들었다. 동중서의 유학은 무엇이 특별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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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는 어떤 점이 달랐을까?


  한나라의 시대는 바야흐로 음양론과 자연학이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던 시대였다. 황로학이 위정자와 백성들에게 두루 전파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양론과 자연의 논리로 어필했기 때문이다. 동중서의 유학은 시대의 흐름과 발을 맞추었다. 당시 유가에서 생소했던 음양의 이치, 즉 천인감응, 동류상동 등의 개념을 가져와 유학의 질서에 접목한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유가’와 더불어 ‘도가’ ‘법가’를 음양의 이치로 통합하고, 황제의 권력은 천명 즉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주장한 이가 바로 동중서다. 이것은 당시에 무척 파격적인 사유였는데, 왜냐하면 동중서 이전에는 그 어떤 유자도 음양의 논리와 유가를, 천명과 황제를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중서가 해석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특히 이 질서 하에서 황제는 하늘과 연결된 존재로, 기존의 황로와 유가에서 제시하는 황제의 역할과 그 권위가 달랐다. 동중서가 보기에 하늘은 인간 세상에 영향을 주는 ‘유위’하는 존재이자, 황제에게 천명으로 권력을 일임하는 존재로, 유위하는 하늘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황제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유위해야 하는 자였다. 당연히 정치에도 유위해야 한다. 동중서에게 황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위로운 정치를 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국정의 전면에 나서서 ‘힘써 배우고 노력하며, 바른 도를 행하려 애써야 하는’ 적극적으로 유위해야 하는 자였던 것이다. 여기에 무제는 하나의 개념을 더 얹는다. 바로 무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동중서 이론의 핵심! 그것은 대일통 사유였다.

    춘추의 대일통(大一統)이란, 천지의 근본이며 고금에 통하는 정의입니다. 지금 사부마다 도(道)가 달라 사람마다 이론이 다르며 백가의 처방이 다르고 주장이 같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 하나로 통일된 뜻이 없어 법제가 자주 바뀌기에 아래에서는 지킬 바를 알지 못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육예의 과목과 공자의 학술 이외의 것은 모두 그 도를 단절시켜 같이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릇되고 치우친 주장이 사라진 연후에야 기강이 하나가 되고 법도가 확실해져서 백성들을 따를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동중서전」,『한서』4권, 명문당, 409쪽

  무제는 동중서의 명성을 듣고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자 동중서는 그에 대한 답으로 ‘천인삼책’이라는 그 유명한 대책문을 올린다. 이 ‘천인삼책’에 담긴 유학의 핵심은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학만을 숭상한다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즉 대일통 학설이다! 대일통은 만물이 하나의 도로 귀의한다는 의미로, 지방마다 흩어져있는 도를 하나로 통합하고, 그 도를 중심으로 법제를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일통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제후가 천자에게 귀속되어, 지방에서 제후가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논리적 명분을 마련한 것에 있었다. 무제에겐 지방도 중앙의 확대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은 각각의 지방권력을 긍정했던 황로의 철학과는 다른 배치로, 절대 황권을 기획했던 무제의 비전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중요한 법이다. 무제는 동중서의 유학덕분에 재상권력과 지방권력을 당당히 황제 중심으로 가져오는 마지막 퍼즐을 채울 수 있었다. 


  원광 1년, 무제의 절대 황권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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