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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계보학 | 자연주의와 계보학(5)-참된 역사, 수사학적 방법과 정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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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09-28 08:18 조회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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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계보학 (5) 

 

 

 

 

  _Christopher Janaway

 

4. 참된 역사


『즐거운 학문』에서 인용된 위의 구절과 『도덕의 계보』 서문 7을 함께 살펴보자. 니체는 이 서문에서 파울 레에 대한 방법론적 비평을 하며 위의 구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두 구절 모두에서 니체는 레가 역사에 대한 더 나은 개념을 갖기 바랐기에 그가 자신의 빈약한 개념을 버리기를 헛되이 희망했었다고 한다. 얼핏 보면 레가 니체의 두 조언 모두를 따른 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두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니체에게 “실제적인 도덕의 역사”란 “문서로 기록된 것, 실제로 확증할 수 있는 사실, 실제로 있었던 것”(『도덕의 계보』 서문7)이다. 그러므로 레가 “실제적인 도덕의 역사를 하고자 한다면 그가 하고 있는 ​푸른 하늘을 헤매는 가설을 중단해야만 한다. 레가 어떻게 해야 “참된 역사”를 추구하고, 실제로 있던 것을 조사하며, 그와 동시에 냉정한 객관성을 버리면서 “자신의 운명, 자신의 고통, 그리고 자신의 최상의 행복”(『도덕의 계보』서문7)이 되어버린 문제에 개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가?

 

나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레가 자신의 개인적인 정동적 상태를 심오하게 검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결국 “참된 역사”를 하지 못했다고 본다. 나는 레의 것보다 좋은 니체의 방법이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 논증을 위해 우리는 먼저 니체가 말하는 “참된 역사”“실제로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인지해야 한다. 

 

 

이 모든 사태와 더불어 그리고 그러한 사태 아래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 자기를 괴롭히려는 저 의지가 내면화되어 자기 안으로 내몰린 동물적 인간, (중략) 고통을 주려는 의욕이 좀더 자연적인 출구가 막힌 후에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양심의 가책을 고안해냈다. – 양심의 가책을 지닌 이러한 인간은 자기 고문을 소름끼칠 정도의 냉혹함과 준엄함으로 몰고 가기 위해, 종교적 전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도덕의 계보』 II. 22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참된 역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갖는 태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인간이 갖고 있던 정신적 상태, 행위, 그리고 충동과 메커니즘이 하는 다양한 작동을 재구성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 인간이란 구체적이고 특정 시대의 인간이라기보다, 권력관계와 문화적 유산이 갖는 어떤 특정한 역학 안에서 어떤 특정한 심리적 유형이 행동하고 느끼는 인물을, 투영적 재구성을 통해 포괄적으로 고안된 인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정동에 대한 강조를 주목하라 : 공포, 고통을 가혹하게 만드는 것, 자기 고문의 날카로운 통증 : 그리고 위의 구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탐구자 또는 독자의 정동에 대한 강조. “인간 안에 소름끼치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중략) 암담하고 음울하고 쇠약해진 슬픔을 띠고 있기도 때문에, 억지로라도 너무 오랫동안 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삼가야만 한다.” 니체는 레에게서 볼 수 없는 문제와 탐구자간의 개인적 관계가 어떤 것인지 예를 통해 보여주고 그것을 하도록 장려한다. 이제 나의 중심 질문에 도달한다 : 니체의 “참된 역사”는 그것의 탐구자에게 개인적이고 정동적인 반응을 요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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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사학적 방법과 정동들

 

나는 이전에 한 에세이에서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사용하는 선동적 수사학이 독자들의 정동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도구이며, 이 도발은 니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재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Janaway 2003 참고) 여기에서 나는 그 주장을 요약하고 확장하겠다. 

 

먼저,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도덕의 계보』를 설명할 때, 그는 심리학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 용어가 갖는 강력함과 동일하게 강력한 예술적이고 수사학적 용어로 그 에세이들의 업적을 제시한다. 그들이 갖는 전반적인 음악적 형태와 분위기, 그들의 반어적 기만, 그리고 예상 못하는 독자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계산된 강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감정적 효과. 

 

 

이 『도덕의 계보』를 구성하고 있는 세 편의 논문들은 그 표현과 의도와 놀라게 하는 기술면에서 지금까지 씌여진 것들 중 가장 섬뜩한 것이다 (중략) 각 논문들의 시작 부분은 매번 사람들을 오도해야 하기에, 냉정하고 학적[wissenschaftlich]이며 심지어는 아이러니컬하기조차 하며, 의도적으로 강조도 하고 의도적으로 질질 끌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점차 동요가 커진다 : 산발적으로 번개가 치기도 한다 : 아주 기분 나쁜 진리들의 둔중한 으르렁거림이 멀리서부터 점차 커지고 –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앞으로 내모는 폭풍 같은 거친 속도에 이른다. 마지막에는 매번 지독하게 전율스러운 폭발이 일어나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새로운 진리가 하나 눈에 보이게 된다.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도덕의 계보』 첫 에세이에서 귀족들이 하는 폭력적 행동은 현대 후기-기독교적 독자를 불안에 움찔하도록, 분노에 발끈하도록 만들기 위한 계산된 용어로 묘사된다. 그와 동시에 그 용어는 자기 규칙을 만드는 귀족만이 갖는 정신적 건강을 감탄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노예는 경멸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제시된다. 이 에세이의 예술적 정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약자에 대한 잔혹한 힘의 방출에 대한 혐오감은, 기독교 창시자들이 자신의 주인을 예속시키는 방식에서 그것과 궁극적으로 비슷한 힘이 방출되는 것을 보며 그것에 대한 혐오감과 연결된다. 이는 정동적 혐오“호기심 많은 모험가(Mr. Rash and Curious 『도덕의 계보』 I 14)”라는 인물로 각색되었는데, 이 인물은 독자의 대리인으로 도덕적 이상이 만들어지는 동굴 같은 작업실로 내려가지만 그곳에서 나는 나쁜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도덕의 계보』 I 14) 우리는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온 첫 에세이와 관련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다. 내가 나의 글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해 주길 바란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출발은 “선함”과 같은 단어가 갖는 문헌학적이고 역사학적인 기원에 대한 논고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일종의 역사학 혹은 인류학, 냉철하고 니체가 말하듯 학적[wissenschaftlich]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자의 정동들이 의식되도록 불러일으켜진다. 묘하게 놀라운 것은 처음에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 귀족적 방식으로 하는 평가와 노예적인 도덕에서 나온 원한감정 – 독자들에게 불안과 감탄이 비슷한 비율로 혼합된 감정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불안은 커진다. 독자에게 이제 자신의 기독교적 혹은 후기-기독교적 도덕 가치에 대한 믿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에서 섬뜩한 폭발이 일어나 독자는 자신의 정동이 이러한 반전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새로운 진실은 자욱한 구름 사이에 있는데 이는 이러한 새롭게 불러일으켜진 감정들이 처음에는 독자의 나머지 사고와 통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Jan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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