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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정치를 말하다 | 세포들로 이루어지는 유기체, 그리고 사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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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7-12-06 07:00 조회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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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들로 이루어지는 유기체, 그리고 사회 - (2)

 

 

 

 

 

 

 

김태진

 

 

 

 

옛날 사람들은 심(心)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혹자는 복부(腹部)에 있다고 하고,
또 혹자는 두부(頭部)에 있다고 해서
끝내 의견을 통일할 수 없었다.
이는 인신(人身)의 생리(生理)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마츠고로(山口松五郞), 『사회조직론(社会組織論)』(1882)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스펜서의 「사회유기체설」(Social Organism, 1860)이 일본에서 번역되었던 것은 1882년 야마구치 마츠고로(山口松五郞)에 의해서였다. 『사회조직론』(社会組織論)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서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심(心)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혹자는 복부(腹部)에 있다고 하고, 또 혹자는 두부(頭部)에 있다고 해서 끝내 의견을 통일할 수 없었다. 이는 인신(人身)의 생리(生理)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궁리(窮理)가 정교해져 사람들 모두 이를 알 수 있게 되니 인간에게 공이 가히 크다고 하겠다. 요즈음 민간에서 주권을 말하며 혹자는 국회에 있다고 하고, 또 혹자는 군주에 있다고 하고, 또 혹자는 양자의 사이에 있다고 하니 의견이 일정하지 않다. 이 또한 사회의 생리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의 생리를 심해(深解)해, 즉 주권이 있는 곳 역시 이로 말미암아 명확해지니 세상에 이로움이 참으로 적지 않다. 독자 여러분이 이를 살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조직론 초판 서문ⅰ-ⅱ

여기서 역자는 스펜서의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주권을 논하면서 신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심(心)이 어디에 있는지 옛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누구는 심이 배에 있다고 하고, 누구는 머리에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것은 ‘인체[人身]의 생리’가 밝혀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것 역시 ‘사회의 생리’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따라서 주권이 국회에 있는지 혹은 군주에게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양자 사이에 있는 것인지 밝히기 위해서 인체의 생리를 밝히듯이 사회의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해 발행된 재판 서문에서도 나타난다. 초판이 발행된 지 1년 만에 재판을 발행하게 된 과정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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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주권이 국회에 있는지 혹은 군주에게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양자 사이에 있는 것인지 밝히기 위해서 인체의 생리를 밝히듯이 사회의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 

국가를 가지고 인신(人身)에 비유해 그 이해와 화복[休戚]을 논하는 것은 학자의 상습(常習)이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반드시 양자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국가와 인신을 비교해 그 유사점을 논하는 책은 옛날부터 드물게 보이는 바로 대개 부회(附會)의 망설(妄說)일 뿐이다. 따라서 이를 상세히 할 수 없음이 내가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였다. 지난해 초여름 영국의 홍유(鴻儒) 허버트 스펜서씨의 저서 Illustrations of Universal Progress를 읽고 Social Organism이라는 제목의 사회와 인신과의 유사점을 논한 글 한 편을 얻었는데 그 논리의 정확함이 나의 결망(缺望)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조직론 재판 서문 ⅰ-ⅱ

국가를 신체에 비유하는 것은 전통적인 동양의 고전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논리였기 때문에 새로운 논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유사점을 논함이 대개 부회에 빠져 오류를 면하기 쉽지 않아 항상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데 스펜서의 이 글을 읽고 논리의 정확함에 감탄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주권을 밝히기 위해서 사회의 ‘생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스펜서의 논리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스펜서의 논리와 얼마나 같고 다른가?

유기체란 무엇인가  – 『The Social Organism』과 『사회조직론』

그렇다면 우선 스펜서에게 유기체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스펜서는 처녀작인 『사회정학(Social Statics)』에서 이미 유기체에 관한 맹아적 발상을 보인다. 그는 생물의 진화란 그 기능의 개별화(individuation)와 상호의존(mutual dependence)의 종합이라고 주장해, 인간 사회의 진보 역시 이러한 분리성과 통합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유기체의 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이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기 전에 이미 진화론적 법칙에 따르는 나름의 보편적 법률을 제시한 것이었다. 스펜서는 『사회정학』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친 사색을 통해 사회유기체를 그의 철학체계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사회유기체설」(The Social Organism)이라는 논문이었다. 『사회정학』의 말미에서도 단일구조로부터 복합구조로의 진화를 설명하며, 이러한 진화가 개인유기체와 사회유기체가 동일하다라는 인식이 보이지만, 그의 특유의 사회유기체설이 처음으로 상세히 서술된 논문이었다. 스펜서는 『자서전(An Autobio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회유기체라는 개념이 진화론적이라는 것은 그 말 자체에서 이미 함의하고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제작(manufacture) 혹은 인공적인 배치(artificial arrangement)와 같은 개념을 배제함과 동시에, 자연적인 발전(natural development)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사회정학』 중에서 간단히 표현되었는데, 그사이에 진보해 이제서야 조심스러운 형태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사실은 사회유기체가 개체유기체와 본질적인 특징 면에서 같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성장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 복잡해지면서 그 부분들은 더욱 많이 상호의존적이 된다는 것, 그리고 생명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단위의 생명보다 더 길다는 것이다. 사회유기체와 개체유기체 둘 다 이질성(heterogeneity)의 증가에 따라 통합(integration) 역시 증가한다.

─자서전, 55–56

여기서 유기체로서 사회는 성장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스펜서에게 사회와 개체라는 유기체의 본질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즉 성장한다는 점, 성장하면서 복잡해진다는 점, 복잡해지면서 부분들이 더 많이 상호의존적이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스펜서는 집합적 신체로서 정치체를 설명하는 사상의 역사 속에서 그의 유기체론을 정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치체(body politic)를 문자 그대로 사용, 국가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a living organism)으로서 유비해 정치체를 말한다. 번역문에서도 이를 ‘사회’라 번역하여 사회와 일반 유기체 사이의 유사성이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사회와 일반 유기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설은 얼마간의 고인이 생각하던 바로, 고서에서 왕왕 보이는 바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은 망상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어찌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당시 이 양자 사이의 존재하는 진실한 유사를 식별할 수 없었던 까닭은 아직 생리학이 미개했기 때문으로, 특히 최근 동학에 적용하는 개괄법 즉 만물로부터 일정의 이치를 검출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조직론, 20–21

스펜서는 정치체(body politic)와 살아있는 개인 신체(living individual body) 사이의 유비(analogy)가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는 유기체로서 개체적 유기체(individual organism)와 사회 유기체(social organism)의 공통점을 발견한 사유들의 선구자로 플라톤과 홉스를 꼽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스펜서가 플라톤과 홉스의 논의를 ‘구성상’으로는 사회와 인체의 유사성을 지적하지만 ‘연혁상’으로는 기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자서전에서도 밝혔듯이 사회를 인공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에 대한 스펜서의 반론이었다.

이처럼 기존의 신체와 사회 사이의 유비는 그 동안 모호하고 다소 추상적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이는 생리학(physiological science)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파악한다. 기계론적 정치체라는 관점에 대해 비판한 스펜서는 새로운 생리학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 사회와 일반 유기체 사이의 유사성을 네 가지 제시한다. 즉 유기체는 생장한다는 점,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한다는 점, 각 부분의 활동은 다른 부분의 활동에 의지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는 점, 부분에 변경이 있다 해도 전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이 개체와 사회유기체의 공통점이다. 이처럼 개체와 사회를 유기체의 특성으로 파악해 생물학적 관점 속에서 통일시킨 것이 스펜서 논리의 핵심이었다.

물론 유기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유기체가 아니며, 사회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회는 아니다. 원시사회는 하등동물과 마찬가지로 각 부분들이 서로 의존하지 못하고 고립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분할하거나 그 ‘요부’(要部)를 제거해도 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개명사회, 즉 발전된 사회는 분할하거나 요부를 제거하면 고등동물이 그런 것처럼 반드시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쳐 분란을 일으키거나 파괴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원시사회가 분리가능한 사회로서 그 수명은 오래 유지할 수 없는 반면 개명사회는 분리가 쉽지 않아 오래 유지될 수 있다. 이처럼 고등동물과 개명사회의 공통점은 그것이 보다 분리 불가능하며 상호연관적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유기적이라 파악된다. 여기서 보듯 스펜서에게 유기적 생명이라는 의미는 각 부분이 서로 긴밀한 의존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이며 이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스펜서가 유기체를 말할 때의 의미는 바로 상호 의존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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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가 유기체를 말할 때의 의미는 바로 상호 의존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회로서의 유기체와 개체로서의 유기체가 같은 것만은 아니다. 첫째, 사회는 특정한 외형적 형태는 갖지 않는다. 둘째, 개체유기체를 구성하는 조직은 영속적인 일체를 이루고 있지만, 사회의 제요소는 일체를 이루지 않고 지표 혹은 부분에 산재하고 있다. 셋째, 개체유기체의 여러 단위는 많은 경우에 일정의 장소를 점하고 있지만, 사회유기체의 여러 단위는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넷째, 동물체에서는 특수한 조직만이 감정을 부여받았음에 반해, 사회유기체에서는 전 구성원이 감정을 부여받았다. 이때 스펜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는 감각을 갖는 세포로서 구성되어 있다는 네 번째 차이이다. 그는 생물에서는 감각을 갖는 세포와 그렇지 않은 세포로 나뉘지만, 사회에서는 모두가 감각을 갖는다고 말한다. 생물은 ‘신경’(nervous system)을 통해 부분의 쾌락이 전체의 쾌락과 연결된다. 하지만 사회유기체는 일반 유기체와 다르다.

그러나 이에 관해 사회와 일반 유기체 사이에 자못 반대되는 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반 유기체는 각 세포가 상쾌한지 아니한지가 신경의 상쾌 여부와 관련되어 신경이 상쾌하면 각 세포가 모두 상쾌함을 느끼고 신경이 상쾌하지 않다면 각부 모두 불쾌를 느낀다. 반면 사회는 세포 모두 감각력을 갖고 있어서 전체에서 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각 세포의 고락이 전체의 고락에 관계함이 극히 적다. 고로 일반 유기체에서는 전체의 명맥은 주로 각 세포의 수명을 따른다. 사회에서 각 세포의 수명은 주로 전체의 수명을 따른다. 사회가 일반 유기체와 닮지 않은 한 가지로 항상 우리의 주의함을 요하는 것이다. 정부를 건설하는 목적은 인민을 보호하는 것으로 정부가 쓸데없이 사회의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인민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이성이 용인하지 않는 바는 이 이치에 기초하는 것이다.

─사회조직론, 49–50

여기서 감각기관이 사회 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반 유기체에서 감각이 ‘독점화’(monopolize)되어 있어 모든 부분의 복지가 ‘신경 시스템’(nervous system)에 종속되기 때문에 부분은 전체에 통합될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의 구성원은 개인의 의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전체는 통일적 의식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인민의 행복이 사회의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될 수 없는 것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특성이 일반 유기체와 달리 각 세포가 모두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감각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단지 머리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 모두가 감각을 할 수 있다는 발상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특징으로서 개체 중심적, 자율적인 상이 그려지고 있다. 우리가 유기체라고 일반적으로 파악하는 방식과 스펜서의 유기체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스펜서에게 사회로서의 유기체는 단순히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을 넘어 각각의 세포들이 자유롭게 결합한, 즉 각각의 부분들이 모두 감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의회와 두뇌

스펜서의 『사회유기체론』에서 사회와 생물 사이의 유사성은 국회와 두뇌의 기능간의 비교로까지 나아간다. 
  

고등 동물을 특징짓는 가장 발달한 신경절(ganglia)은 시스템의 각 부분으로부터 전송된 다양한 감각들을 해석하고 종합하여 부분들을 적절하게 다루어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 본성(nature)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발달한 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발달한 입법체는 모든 계급과 지방들의 바람들을 해석하고 종합하여, 이를 일반적인 바람과 조화시켜 법을 만드는 것이 본성이다. 우리는 두뇌(brain)의 역할을 육체적, 지적, 도덕적 생활의 이익을 평균화(averaging)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좋은 두뇌란 각 부분의 이익에 맞는 욕구들이 균형을 이루고, 각각의 이익이 지시하는 행위가 부분 중 어느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회의 역할 역시 공동체 내의 다양한 계급의 이익을 평균화하는 것이다. 좋은 의회란 각각의 이익에 답하는 정당들이 균형을 이루고, 그들의 입법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나머지의 주장과 가능한 일치 하도록 하는 기관이다.

─사회유기체론, 302–03

야마구치는 『사회조직론』에서 이 머리와 의회의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대뇌는 천서만단(天緖萬端)의 사고가 나오는 곳으로 그 생각은 모두 인신전체의 이해 득실에 관계해 참으로 신경에서 추요(樞要)의 지위를 점유하게 된다. 고로 우리는 그 직무로서 지(智), 인(仁), 용(勇) 기타 제덕의 이해를 균일하게 해 피차 경중이 없도록 용무를 이루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로 대뇌가 건강하다면 사람의 행위로서 지에 치우쳐 인을 잃고, 혹은 용에 치우쳐 지를 잃는 일 없이 제덕을 겸용해 과실에 빠지지 않게 된다. 또 국회는 천서백단의 의논이 분기(紛起)하는 곳으로 그 논의는 실로 사회전체의 이해득실에 관계해 정부의 구조에서 추요의 지위를 점유하게 된다. 고로 우리는 그 직무로서 사농공상의 이해를 평등하게 해 피차 경중이 없게 용무를 이루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로 국회가 선미하다면 사(士)에 손해가 있어도 농부에게 이익이 되는 율령을 만들고 혹은 상인에게 이익이 있어도 장인에게 해가 있는 법률을 정함 없이 상호 양해 가능하면 이를 양해해 각자의 이해를 균일하게 해 공정무사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다.

─사회조직론, 106

대뇌와 의회는 직무상 유사한데, 둘 다 사고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전체의 이해득실을 판단한다. 번역본에서 의회의 기능에 대해 추가적으로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점은 그들이 국회 개설의 정당성을 가지고 오기 위해 스펜서의 논의를 끌어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펜서와 번역본에서 보이는 이러한 논리는 다양하게 분기하는 의견들을 종합하는 대뇌=의회의 통일적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는 앞서 사회와 일반 유기체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사상감각을 하는 것이 뇌수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 세포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스펜서의 논의와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스펜서와 논쟁을 벌인 진화론자 토마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는 이러한 스펜서의 내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스펜서의 철학 안에 국가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논리와 이 유기적 은유가 완전히 반대됨을 주장한다. 즉 스펜서가 「사회유기체론」에서 뇌가 개인의 생명, 신체, 지성, 도덕, 사회의 각각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처럼 정부 역시 공동체 내의 다양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각 개별 세포들의 자립적 역할을 강조하는 스펜서의 자유방임주의 철학과 상호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헉슬리의 이러한 비판은 스펜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펜서가 뇌를 강조할 때 이는 각 세포의 감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번역본에서는 대뇌의 지각을 오관(五官)의 신경과 구별해 ‘대지각(代知覺)’으로서 설명된다.

대뇌는 외물로부터 직접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간접적으로 이를 받을 뿐인데 이는 이미 성리학(性理學)상에서 보통의 진리이다. 고로 대뇌의 지각을 오관신경절(五官神經節)의 지각과 구별하기 위해 이를 대지각(代知覺)이라 부르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 영국의 하원의 직무를 판연하기 위해서 하원을 대의원(代議院)이라 칭하는 것은 참으로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원에서 상의(相議)하는 바 이해득실은 인민 스스로 출석해 이를 명언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대의사(代議士)로서 이를 대언(代言)하게 하는 것으로, 국회가 대뇌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조직론, 108

오관이 신경을 가지고 직접 감각하지만 대뇌는 이러한 감각들의 ‘재현’(representation)을 받아 대리로 감각한다. 이는 정치에서 ‘대의체/대의기관’(representative body)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대리로 인민들이 바라는 바를 발언하는 존재다. 대뇌가 직접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해서 감각하는 기관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 역시 인민들의 욕구를 대리해서 수행하는 존재다. 이처럼 대뇌는 신경이 직접 느끼는 것과 달리 간접적으로 느끼는 ‘대代-지각’으로서 정치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대신 말하는 존재로서 ‘대代-의사’의 기능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represent’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보다 더 정치적인 맥락과 관련된다. 흔히 대의/대표/재현 등으로 번역되는 represent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쓰일 때 인민들의 뜻을 어떻게 대의/대표/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즉, re-present란 말 자체에서 보듯이 어떻게 그것을 다시(re) 현재화(present)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없는 것을 다시 눈앞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공의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이를 대리-지각하는 두뇌와 대리-의사하는 국회의 원리를 설명하며 신체의 논리를 가지고 온다. 즉 대뇌는 세포들을 ‘대신’(代) 지각하는 것처럼, 국회는 인민들을 ‘대신’(代) 의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펜서에게 중요한 것은 국회가 단순히 일반 인민들을 ‘대신’해서 논의한다는 점에 있지 않다. 대표한다는 것은 그들의 의사를 대신 논의케 한다는 것 말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욕망과 감각을 ‘재현’해 낸다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펜서의 논의를 국회의원에게 대신 정치를 맡긴다는 의미에서의 ‘대의’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의미로 읽기에는 스펜서의 논지와 다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스펜서에게 대의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데 최선의 수단으로서만 의미 있기 때문이다. 스펜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자유의 법칙’으로 사회는 단위로서 개인들의 행복이 유일한 목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에 대한 최소한의 간섭만을 허용하는 자유방임적(laissez-faire) 유기체론이었다. 스펜서가 대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국회라는 기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기보다, 오히려 대지각하는 머리와 마찬가지로, 대의하는 기관인 국회는 세포들 즉 인민들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보자. 서문에서 옛날 사람들이 심(心)이 복부에 있는지, 머리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주권이 국회에 있는지, 군주에 있는지, 혹은 양자 사이에 있는지 밝혀지지 못했던 것을 독자에게 물을 때 그들이 스펜서를 경유해 찾은 대답은 주권은 국회에 있다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스펜서에게 주권은 국회에 있는 것일까? 이는 주권을 두뇌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신체를 파악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  이 글은 『Trans-Humanities』 9권 2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자세한 주석이나 참고문헌은 그 글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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