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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生生) 동의보감 | 요가, 자유를 향한 희생의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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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02-20 07:00 조회4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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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자유를 향한 희생의 길 

 

 

 

박정복

 

 

 

 

요가의 추억

18 년전 40대 후반이었을 때 나는 허리가 너무 아파 누워있기조차 힘들었다. 일어나 걸으면 조금 괜찮았다가 금방 다시 아파와서 걷지도 눕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인이 요가를 권했지만 그 때는 지금처럼 요가열풍이 불지도 않았던 때라 몸을 꼬으는 이상한 동작일거라는 생각에 망설이다가 병이 서러우니 가게 되었다.

  

하지만 요가를 한지 얼마 안되어 허리 아픈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요가 동작들(아사나 asana)을 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처음엔 다리 하나 뻗기도 힘들었고 명현반응도 심하게 겪었지만 한 동작이 되자 다른 동작들도 줄줄이 되어 갔다.

  

그 동작들은 거의가 동물이나 새의 움직임을 모방한 것이었다. 네발 동물들의 척추모양(파스치모타나사나). 코브라가 몸을 세운 모양(브장가사나), 고양이 자세(캣 포우즈), 개 자세(아도묵하스바나사나), 비둘기 모양(라자 카포타)등. 이 외에도 수십개의 아사나를 했는데 왠지 어떤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개였다가 고양이로 코브라로 원숭이로 박쥐로 변신을 거듭했다. 동물들만이 아니었다. 물고기와 새들도 되고 선 채로 상체를 뒤로 넘겨 손으로 바닥을 짚는 차크라 자세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유연성과 하체의 힘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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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원에선 날마다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았다. 날마다 다른 고양이었고 다른 코브라여서일까? 하루라도 앞으로 숙이는 깊이, 뒤로 꺾는 길이, 옆으로 비튼 각도 가 같은 날이 없었다. 또 요가를 하다보면 자신의 한계를 조금은 넘고 싶어진다. 어제와는 다르게 조금은 깊이 하고 싶어진다.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느껴지는 고요함과 뿌듯함. 여럿이 같이 하면서도 혼자 하는 듯한 고요함.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은근한 기쁨이었다.

  

게다가 요가 후에 마시는 뜨거운 차는 또 어떻고? 빙 둘러앉은 우리에게 선생님은 차를 달여주고 우리는 담소를 나누었다. 그 후엔 우리 아줌마들은 몰려가서 밥을 사먹고 수다를 떨고서야 헤어지곤 했다. 모두 몸이 아파서 왔지만 지금은 다들 건강해졌다면서 좋아했다. 우리는 절친한 사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한편으론 요가에 대한 묘한 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요가를 하니까 병이 나았고 일이 척척 풀린다며 새 사업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맨 앞줄 정중앙 자리에 앉으려고만 고집했다. 사이가 나빠진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자 자리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또 동작할 때 선생님이 누구는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잡아주고 자신은 잡아주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차(茶)를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선생님은 상황에 따라 양(陽)의 행법과 음(陰)의 행법을 섞어가며 우리를 지도 했고 때로는 묵언(黙言)을 시키기도 했지만 스승이 어떠해도 제자들은 사고를 치곤 한다.

  

나도 이 한복판에 있었다. 나는 지인에게 돈을 꾸어준게 문제였다. 그가 파산하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여 그 집에 가고 말았으니 그 때가 생각나면 몸이 움츠러든다. 그 분위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처참했다. 잘못 왔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갔다오고 나서 나는 몹시 아팠다. 꾸어주면 이미 그것은 내 돈이 아니다. 받으러 갈 일이 아니었다. 요가 7년동안의 가장 아픈 기억이다. 

  

이 모든 것이 몸이 오히려 좋아지니까 생긴 일들이다. 그 때 우리는 에너지가 성성했다.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몸이 건강해진건 좋은데 그로 인해 아집은 더 공고해지는 느낌이었다. 뭐가 잘못 됐을까? 이번 학술제 기회에 묵혀두었던 문제를 추억하며 요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가-마음의 고삐를 묶어라   

요가는 고대 인도에서 인생을 고(苦)로 보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인들은 인간이 변한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태어나도 결국은 늙고 병들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괴로움을 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절실했다. 물론 기쁘거나 즐거울 때도 있지만 그 역시 일시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 기쁨 역시 괴로움일 뿐이었다. 인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을 벗어날 것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했는데 그들은 우선 그 원인을 헤아려보았다. 

  

BC 7세기의 인도 6파철학중의 하나인 샹키야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인간의 고(苦)는 인간 지성(의식의 앎/ 붓디 buddhi)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하는 지성의 작용 즉 대상을 구별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느끼는 감정을 ’내‘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착각이라고 한다. 마치 밤길에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할 수 있듯이. 사람은 육신 뿐 아니라 그 마음(지성)까지도 물질(자연=프라크리티)로 되어 있다. 물질은 변하게 마련이고 변하는 것은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니다. 참나(푸루샤)는 내 안에 따로 있다는 것. 그것은 프라크리티 때문에 가려져 있어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 참나는 물질이 아닌 정신이어서 변하지 않아 괴로움이 없는 절대 자유의 경지라고 한다. 이 푸루샤가 있다는 것을 지성이 모르고 일상의 나를 참나로 착각해서 자의식(아함카라)이 생겼다는 것. 자의식은 고정된 내가 있다는 의식인데 이게 있는 한 인간은 자신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우월하고 싶은 갈망이 있게 마련이고 그 갈망으로 세상을 대하기 때문에 세상은 인간 각자의 갈망의 렌즈로 본 제각기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자신의 무지의 렌즈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무지와 욕심이 세상을 창조해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러한 무지와 환상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는 또 그 만큼의 결과를 유발한다. 그 결과는 다시 다른 말과 행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이러기를 반복하면서 우리 삶은 계속된다. 이처럼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체의 행위를 카르마(업,業)라 한다. 이 업은 계속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일으킨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업의 반복으로 인해서 생노병사를 반복(윤회=삼사라) 할 수 밖에 없는 괴로움에 처해 있다고 상키야 철학은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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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이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내안의 푸루샤를 만날 것인가? 상키야 철학은 그 해법도 역시 지성에서 찾았다. 지성의 무지에서 괴로움이 비롯되었지만 그 무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지성이라고 보았다. ‘나는 절대 자유의 경지인 푸루샤가 내 안에 있다는 걸 몰랐구나! 일상에서 보고 들으며 판단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 나를 푸루샤로 착각했구나!’ 하고 알면 된다는 것.

  

하지만 이걸 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무지에서 비롯된 업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그것이 기억에 잠재되어 있다가 끊임없이 의식으로 떠오르고 그것에 지배되어 또 말과 행동을 유발하고 다시 그것은 잠재의식(바사나)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출몰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통제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푸루샤를 알 수 있을지, 업을 끊어낼 수 있을지 그 방법 즉 테크닉을 인도인들은 강구했는데 그들은 이를 ‘요가(yoga)’라 했다.

 

 

전차(戰車)에 타고 있는 것은 아트만

네 육신은 그 전차/ 

 

네 지성은 그 전차의 운전자,

마음은 그 고삐임을 알라.

모든 감각의 견고한 제어 

이것을 그들은 Yoga라 하네.

마음이 다시는 산란해지지 않는다네. 

 

이것을 아는 자는 

그의 마음에 동요가 없고 

그의 감각은 훌륭한 말이 된다네.

 

이것을 아는 자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목표에 도달한다네.

 

마부를 이해하는 자

마음의 고삐를 쥐고 있는 자

그는 여로의 목적지에 이른다. 

 

 『요가』 117쪽에서 재인용, 엘리아데, 고려원, 

 

  

우리가 산다는 것은 결국 눈, 코, 귀, 입, 피부등의 감각기관과 의식(지성)으로 외부의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무지와 욕심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이러한 감각활동을 제어, 통제해야 한다. 수레와 말은 달리기 위해 결합되었지만 마부가 고삐를 단단히 수레에 메어버리고 말에 멍에를 씌워버린다면 감각의 말은 달리지 못할 것이다. 요가의 어근(유즈 yuj)이 ‘단단히 붙들어 메다’, ‘멍에를 지우다’에서 온걸 보면 요가는 감각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통을 벗어나는 테크닉인 것이다.

  

오래 전 인도의 전사(아리아인)들은 전차를 타고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했다. 요가는 “습격 전에 전차를 끌 짐승을 매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축의 시대』, 카렌 암스트롱, 교양인 334쪽) 그러나 기원전 6세기가 되자 이 말은 내면을 통제하는 의미로 변하게 된다. 전사들은 이제 요가 수행자가 되어 자신의 “내적 공간 정복에 나섰다. 그들은 전쟁을 하는 대신 비폭력에 헌신했다. 요가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근본원인인 무의식적인 정신에 대한 습격이나 다름없었다.”(위의 책, 334쪽)​ 

 

 

 

->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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