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자유를 향한 희생의 길 (3) > 호모큐라스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5/27 일요일
음력 2018/4/13

절기

호모큐라스

생생(生生) 동의보감 | 요가, 자유를 향한 희생의 길 (3)

페이지 정보

작성자 MVQ 작성일18-04-17 07:56 조회153회 댓글0건

본문

 

 

 

 

요가, 자유를 향한 희생의 길

 



박정복

 

 

좌법이 자연스럽게 되면 호흡을 중심으로 수행한다. 호흡도 숨을 오래 멈추는게 목표이다. 인도사람들은 의식과 숨과 정(精정액)은 같이 간다고 본다. 숨을 쉬는 한 우리의 의식도 같이 활동한다. 마음이 산란할 때 호흡이 빠르고 마음이 안정되면 숨이 느려지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욕심에 물든 의식을 통제하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한다. 처음엔 천천히 마시고 쉬는 연습을 하다가 참는 연습도 한다. 예를 들어 교호호흡은 오른 손 엄지로 오른 코를 살짝 누른 상태에서 왼쪽 코로 마신다음 중지로 왼쪽 코를 눌러 오른 코로 내쉰 다음 참는다. 내쉰 오른 코로 마시고 오른 코를 눌러 왼 코로 내쉰다. 다시 왼 코로 마시고 오른 코로 내쉰다. 이러기를 점점 참는 시간을 늘려간다. 그러면 나디(기의 통로)와 차크라(기가 모이는 중심점)가 깨끗해진다. 우리가 보기엔 숨을 못 쉬어 죽을 것 같지만 나디가 깨끗해지니까 오히려 더 몸이 좋아진다고 한다. 성욕도 절제가 되어 정을 보존할 수 있다.

  

 

 

9e23046134973450e4dfa879310ccf83_1523919

 

 

이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 6단계, 7단계, 8단계 까지 진전한다. 수행의 성공은 거의 호흡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호흡을 대단히 중시한다. 숨을 참는 시간이 배로 늘어날 때마다 한 단계씩 전진한다. 우리가 보기엔 그렇게 숨을 안쉬면 죽는거 아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기가 새어나가지 않고 안으로 기가 모아져서 더 성성해진다. 호흡이 깊어지면 항문도 막아서 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물라반다) 이렇게 일상의 호흡과 완전히 다른 이 통제된 호흡은 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의 안정과 환희는 더 커진다. ‘웅장함, 광활함, 고귀함을 느낀다.’ ‘뭔가가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드디어 숨을 참는게 12시간 정도가 되면 완전한 집중이 돼서  비로소 날씨도 환경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게 되어 5, 6, 7단계를 거쳐 삼매에 이른다. 그때는 그 무지와 욕심으로 떠오르는 의식이 사라지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의식이 된다.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제 지성은 에고의 렌즈를 벗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다. 이 때상키야 철학을 따르는 사람은 비로소 푸루샤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일상의 기쁨과는 완전히 다른 황홀경이다. 고(苦)가 사라진 경지이다.  

  

그러면 비로소 알게 된다. ‘아 이게 절대 자유의 경지인 푸루샤구나. 이게 내 안에 있다는 걸 에고 때문에 몰랐구나! 그 동안 나는 착각했었구나.’ 무지가 깨지는 것이다. 이건 머리로 안게 아니라 직접 자기 몸을 실험해서 자신의 몸의 변화로 아는 거니까 확실해서 다시는 무지에 빠지지 않게 된다. 완전히 업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요가 혹은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지성은 이처럼 몸을 통과하고 몸에 새겨져서 아는 직접 지식을 말한다. 

  

이 때 몸의 생리적인 기능은 어떨까? 인도인들은 수많은 나디중에 몸의 중심을 흐르는 두 개의 나디 즉 이다(왼쪽), 핑갈라(오른쪽)와 그 가운데를 흐르는 수슘나를 가장 중시한다. 이 곳의 가장 아래 꼬리뼈 부근(물라다라 차크라)에서부터 정수리(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이르기 까지 에너지들의 집합체인 7개의 차크라들이 위치해 있다. 중앙, 가장 아래 물라다라 차크라에는 우주적 에너지인 쿤달리니가 잠들어 있다. 

  

쿤달리니는 아사나와 호흡억제에 의해 깨어난다. 요기가 삼매에 이를 때는 쿤달리니가 깨어나 각 차크라들을 관통하며 정수리에 있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도달해 그것과 하나가 될 때이다. 삼매는 결국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이는 결코 쉽지 않아서 요기들은 거의 일생을 이 수행에 바친다. 길고 긴 통과의례 같기도 하고 한 번, 아니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제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길게 숨을 참는 호흡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 달라서 우리의 생리적 기능들과 에고와 욕심을 우주에 희생물로 바치는 ‘내적 희생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숨을 희생으로 바친다. 진실로 호흡을 하는 동안에는 그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말을 희생으로 바친다.’(『요가』 110쪽) 몸과 우주는 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요가는 보여준다. 

  

저 고대 희생제가 인도의 역사에서 줄기차게 반복, 언급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위기 때마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영감을 준다. 어쩌면 이 라자요가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고대의 희생제의식의 면면을 체계적인 룰로 바꾸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 변화된 철학이나 수행을 언제나 고대의 제의(베다)와 연결시키며 베다의 완성으로 포용하는게 인도의 힌두교이다. 라자 요가는 우리의 아집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인 동시에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에고를 희생물로 바치는 제의라고도 할 수 있다. 

 

 

 

낭송요가, 글쓰기 요가

  

나는 요가가 이처럼 에고를 격파하는 수행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아니 선생님은 늘 내려 놓으라는 말을 했지만 우리 아줌마들은 그 말씀을 새기지 못했다. 우리는 숨을 참는 수련은 안했지만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여러 동작들을 했다. 또 동작들을 천천히 하여 호흡이 느려지도록 유도했다. 아마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건강은 좋아졌을 것이다. 나디의 순환이 순조로왔을 것이고 차크라가 제대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우리 아줌마들처럼 인생고의 해탈이라는 요가의 본래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건강이나 미용에만 집착한다면 고의 해탈은커녕 요가가 그토록 경계하는 에고가 더 강해질 수 있다. 건강과 탐욕, 이 둘다를 다 갖겠다는 탐욕으로 말이다. 

   

파탄잘리의 8지 요가가 인도인들의 보편적 요가 수행법이긴 하지만 꼭 이렇게만 수련하는 것은 아니다. 요가는 방법이고 기술이며 테크닉이기 때문에 그 목적은 고(苦)를 해탈하기 위한 것으로 변함이 없지만 시대와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인도에는 성스러운 소리로 불리는 여러 소리들이 있다. 옴, 암, 램등. 이 소리를 발성하면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에 주력할 때는 ‘만트라 요가’라 한다. 사랑과 헌신으로 대상과 하나됨을 수행하는 요가는 ‘박티요가’이다. 심지어 인도인들은 성교를 요가(탄트라 요가)로 개발했을 정도인데 이럴 때 조차도 그들은 스승의 엄격한 지도아래 계율을 중시했다. 그 옛날 석가모니는 상키야 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푸루샤는 인정하지 않았고 삼매만으론 해탈이 안된다는걸 알고 자신만의 요가인 ‘샤티(알아차림)’요가를 창안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어떤 요가라도 8지 요가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9e23046134973450e4dfa879310ccf83_1523919

 

 

우리 감이당에서도 밀가루 음식을 간식으로 하지 않는 등 나름의 계율이 있다. 문득 우리가 하는 낭송이나 글쓰기도 요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 곰샘 강의에 따르면 글은 기승젼결을 구사하고 차서를 만들면서 쓰는 건데 이는 체계적으로 자신의 아집을 벗겨내는 수행이 아닐까? 결국 ‘자의식과의 전투’가 아닐까? 에고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제의말이다. (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