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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 이성의 개념화를 바꾸는 것이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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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能今 작성일17-12-15 09:32 조회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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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의 생리적 메커니즘 – 도담강의



이성의 개념화를 바꾸는 것이 공부다!


박윤미 정리

 

 

‘신화화’ 된 개념의 아우라
 사람은 기호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잘 바꾸지 않는다. 기호를 한번 개념화해 버리면 그걸 여간해선 잘 바꿀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위에서 ‘개념화의 아우라’라고 언급했던 개념화와 연쇄효과들은 대개 자기 복제를 통해 지속된다. 자기 복제 아시죠? 이것은 주체는 늘 시간과 함께 변형이 되는데 자기 복제로 변형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변형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난주에 배웠던 자연의 단절과 도약에 어떤 동기화를 하지 않고 이런 리듬을 매번 놓치고 사는 겁니다. 내가 기존에 이루어 놓았던 개념화가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렇지만 때로는 개념화의 아우라가 변형되기도 한다. 첫째는 C씨가 후자를 선택하는 경우와 같이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하는 경우다. 그것은 주체의 변형과 함께 일어나며, 기호해석에 대한 기존의 프레임을 능동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해되시죠. ‘아 이것은 보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즐긴 것이오’ 라고 얘기하는 순간 개념화가 일어나면서 주체의 변형이 일어나죠. 그러면 화병은 낫는 거예요. 억울하지 않으니까. 다만 화증은 남아 있을 수 있어요.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화병은 아니라는 거예요. 화증도 뭔가 이제 일에 대한 개념화가 달라지면 나을 수 있죠. 일은 그렇게 해야지 뭔가 된다는 게 내 안에 있는 거예요. 일이라는 개념화 안에 ‘일은 몰아서 해야 돼’ ‘몰아서 해야지 뭔가 시원해’ 이런 것이 들러붙어 있겠죠.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화라고 하는 어떤 증상이 일어나지 않겠죠. 그러니까 이 개념화의 작업, 이성적 작업이 치료과정인 거예요. 이게 의역학이에요. 의역학이라는 것은 어떤 치료제, 어떤 침과 뭔가 약을 꼭 쓰지 않고도 생활의 패턴을 바꿔서 아니면 사유의 어떤 것을 바꿔서 치료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성의 개념화를 바꾼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얘기잖아요. 개념화를 바꾸려면 새로운 개념적 정의라든지 어떤 새로운 언어가 또 필요하니까. 그래서 그 말은 뭐냐면 ‘공부로 질병이 낫는다.’ 이런 말도 가능한 거예요. 또 한 가지 이 변형이 일어나는데 개념의 아우라에 변형이 일어나는데요. 주체의 변형과는 완전 반대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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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학이라는 것은 어떤 치료제, 어떤 침과 뭔가 약을 꼭 쓰지 않고도
생활의 패턴을 바꿔서 아니면 사유의 어떤 것을 바꿔서 치료를 할 수 있다.




개념화의 아우라가 숭배와 진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치 외부의 세력을 차단하고 은둔해 있는 사이비 종교단체처럼. 이것을 ‘신화화’라고 한다. 신화화된 아우라에서는 어떠한 회의와 의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체가 매번 복제가 되지만 시절인연에 의해서 이게 주체를 변형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기도 하는 거예요. 왜냐면 회의라는 것이 들잖아요. 사람이 살다보면.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이 이게 아닌가봐 하면서 개념화가 다시 정리되잖아요. 내가 뭐 사랑을 좀 상처를 받고 그러면 사랑은 이런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개념화의 우상이나 어떤 이런 대상이 되어버려 신화화가 되어 버리면 여기에 그런 회의가 들어갈 여지가 차단이 된다는 거죠. 외부의 이러한 길항장치를 제거한 목책, 목책이란 울타리 같은 거예요. 목책 안에서는 맹목과 무지의 기운들이 이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교리와 신앙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선민사상 아시죠?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의 예를 들어보자. 선민사상은 대개 지배세력에 의해 탄생된다.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던 자들은 스스로에게 신의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부족 구성원을 감정적으로 동요시켰다. 그러니까 선민사상이라는 개념적 정의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거기 무엇을 또 덧씌웠냐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신의 은총이 내리는 선택된 민족인데 나는 뭐냐면 그 민족을 다스리는 어떤 신의 대리인이야. 그러니까 이제 나를 통해서 신을 만나게 되는 어떤 하나의 특혜를 입은 거죠. 이 민족은. 그러니까 내가 특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이 권력을 인정해야 돼요. 우월감이 생기면 배타적인 마음이 분명히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 안에 배타적인 마음이 싹 일어날 때 우리 안에 우월감이 있는지 또 들여다봐야 되요. 반대로. 배타적인 마음이 일어나고 경계가 세워진다. 대개 좋은 집은 이렇게 담장이 높잖아요. 그리고 왜 그런 거 TV에 가끔 나오는데 이쪽은 대개 좋은 아파트인데 여기는 임대아파트야. 그래가지고 중간에 담이 있는데 그 담에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막아버렸어. 이게 실제 있던 이야기예요.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 학교가 여기인데 옛날에는 이 문으로 왔다 갔다 했는데 사람들이 이 문을 막아 버렸어. 왜냐면 못 사는 사람은 우리 쪽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그래서 이렇게 돌아다녀야 하는. 이런 것이 우월감은 목책을 세운다는 얘기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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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감이 생기면 배타적인 마음이 분명히 일어난다.  

 

 


견고한 목책이 놓이면, 방금 언급했던 맹목과 무지, 교리와 신앙의 코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왜곡된 힘들은 고스란히 지배세력에 흡수되어 신화화된다. 신화화는 새롭게 개념화하려는 주체변형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채 더욱 강력한 습속 안으로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사람은 갇혀 있을 때 환영을 볼 가능성이 높다. 오랜 기간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환영을 경험한다고 한다. 제가 EBS에서 인터뷰 하는 것을 들었는데 독방에 갇히고 일주일이 좀 넘으면 귀신을 본다고 합니다. 귀신이 나타나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자기를 죽일까봐 자살충동이 일어난다고 해요. 되게 재미있죠. 죽을까봐 죽고 싶어! 죽을까봐 죽고 싶은 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런 충동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우리도 집에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잖아요. 망상이 일어나요. 때론 환영이 보이기도 해요. 예속된 존재에게는 환영과 망상이 일어난다. 욕망이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환영과 망상은 욕망이 현실화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일종의 보상기전이다. 이는 비단 거시 권력에 의한 예속만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나 개인의 습속에 예속되었을 경우에도 그러하다.

 

 

 


 신화는 계속해서 변형, 치환되는 것
 인류의 지성이 폭발하던 시기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무렵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였고, 이쪽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의 깨어 있는 사상가들은 오랜 예속과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했다. 그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화된 세계를 벗어나려 했다. 탈레스는 신과 정령에 빗대어 자연을 설명했던 신화 전통과 결별하고 보편적인 원리로서 자연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래서 밀레토스학파라고 이야기하죠. 비슷한 시기에 공자는 신을 등에 업고 통치했던 당시 정치태도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귀신에 대해서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붓다)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다 이런 어떤 신화화된 환상과 싸웠던 거죠. 이 시기의 사상가들이 펼쳐 놓은 사유의 향연이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이 시기를 칼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 부른다. 어떤 학자는 인류가 축의 시대의 통찰을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축의 시대는 인류 지성사의 큰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이성적 통찰은 단번에 신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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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일어난 이성적 통찰은 단번에 신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런 식의 신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주 크게 이성이 신화의 어떤 한계를 확 넘었을 뿐이지 완전히 절단 된 건 아니에요. 신화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미시적 거시적으로 일어나고 거기에 또 이성적 어떤 결단과 변형이 또 일어나고. 이런 것이 계속됩니다. 민족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종교를 둘러싼 분쟁들이 그런 예들이다. 심지어 “20세기의 여러 정치 이론에서는 신화적 사고가 이성적 논리적 사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에른스크 카시러, 심철민 옮김. 『상징 신화 문화』, 아카넷, 364쪽)고 카시러는 말한다. 신화를 예속의 장치로 쓰려는 정치적 욕망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이 만든 환상 역시 시대와 관계없이 늘 존재해왔다. 인류는 신화화된 환상에서 보편적 이성으로 큰 변혁을 이뤄냈지만 이성은 다시 개별적 개념화를 통해 다시 신화를 창조한다. 이러한 맞물림은 축의 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존속된다. 다만 축의 시대의 지적 혁명은 그 이후의 개념화의 변화에 새로운 동력을 주었다. 그 힘을 통해 더 강력한 주체의 변형을 이뤄낼 수 있는 논리와 이치를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축의 시대의 스승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신화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성이 어떤 신화로부터 어떤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하면 또 다른 신화를 만들기도 하고 또 그것을 깨고 다른 이성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우리가 여기서 신화라고 하는 개념을 사실 조금 부정적으로 쓰고 있잖아요. 신화 자체는 사실 그런 건 아니에요. 굉장히 포괄적인. 그러니까 신화는 어떻게 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신화는 굉장히 개별적이고 그다음에 확장되고 또 아주 구체적이고 서사적인 거예요. 그리고 이성은 그런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서사적인 것에서 어떤 공통적이고 추상적인 것, 이런 이치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신화, 신화학은 이성이죠? 그렇죠. 신화를 가지고 어떤 공통된 이치를 끄집어냈으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신화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냐면 계속해서 변형, 치환이 돼요. 하나의 신화와 비슷한 신화가 있는데 그것이 다 달라요. 그렇죠. 그런데 비슷하기는 한데 다 민족마다 다른데, 또 지방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르고.




여러분 할머니마다 다르죠. 그렇죠.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던 도깨비 이야기가 있는데 아마 생전 처음 듣는 도깨비일 걸요. 우리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라 도깨비와 신앙이 결합이 된 그런 얘기를 해줘요. 예를 들면 그리고 항상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이거는 실화라고 이야기하죠.(하하하) 자기 얘기가 아니라 친구 얘기야. 친구가 그러는데 둘이서 길을 가는데 하나는 천주교 신자인데 하나는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가다가 도깨비를 만났어요. 도깨비가 있어서 천주교 신자가 성호를 긋네. 성호를 그으니까 도깨비가 “저건 불칼이다. 어서 피하자.”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이 신자의 친구가 혼자 길을 가게 됐어요. 혼자 길을 가는데 저기 도깨비불이 막 있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 생각, 성호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하는 줄을 몰라. 그래서 아무렇게나 했어, 막. 야구 싸인처럼 아무렇게나 했어. 그런데 이제 도깨비가 그러더래요. “저게 불칼은 불칼인데 자루도 없고 불도 없고. 저게 뭔가? 그런데 어쨌든 불칼이니까 가까이 가지는 말자” 그러고 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성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이런 거. 이런 것을 민속신앙과 가톨릭 신앙을 결합한... 처음 듣죠, 이런 도깨비 신화는. 그러니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변형, 치환이 돼요. 이것이 신화자체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그냥 외부로 퍼질 뿐이에요.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이런 힘이 있기 때문에 이성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또 다른 변형, 치환을 이뤄내고 이 이성이 만든 신화를 또 깨는 힘이기도 해요. 신화 자체가. 그러니까 이게 이상하게 맞물려 있어요. 이성은 신화의 편견으로부터 어떤 추상화, 편견이라기보다 신화의 구체성으로부터 추상화를 이뤄내고 거기에서 이 어떤 예속적 장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거고요. 이성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신화는 신화라고 하는 장치가 또 다른 자유를 주기도 하고 이렇게 맞물려 있어요. 그래서 신화라고 제가 이야기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신화 자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굉장히 드넓은 대지라는 것을 또 아셔야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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