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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와요 함백산장 | <함성에세이> 내가 나 아닌 나로 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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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영주 작성일18-01-01 15:40 조회7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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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아닌 나로 변하기

 

고영주

 

  신의 죽음을 알리는 자 차라투스트라

 

 

   2017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나게 되어서 기뻤다. 니체라는 인물에 대한 기대감과,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세이 시작 전부터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써보겠다고 겁 없이 다짐하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에만 반했을 뿐, 나의 문제의식이 닿고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니 에세이의 출발이 순조롭기는 만무했다. 에세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 가던 중, “도대체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해 보기로 했다. 

 

  올 한 해 일요일 하루는 감이당에서 공부를 하며 보냈다. 애초에 나는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감이당에서 공부하는 내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어려운 책과, 힘든 에세이까지 써가며 공부를 했다. 공부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기존의 내 모습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나답다고 느낄 때는, 여러 사람이 나를 찾아 줄 때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부탁을 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할 때가 가장 기뻤다. 설령 내 몸이 피곤하더라도, 부탁받은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지켰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 모습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고 나서 공부하기 전의 내 모습에 대해 조금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중 어느 지점에서 이런 의구심이 생겼을까. 그래서 먼저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본래 페르시아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대립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교이고, 지금의 기독교와 비슷한 종교이다. 차라투스트라야 말로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차라투스트라와는 확실히 상반된 인물이었다.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하는 도덕적인 차라투스트라가 니체를 만나 도덕적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존재로 재탄생된 것이다. 도덕적 가치는 인간에게 가장 선한 가치이자, 가장 필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그 가치를 파괴해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새로운 가치는 ‘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죽기 전에 신은 인간에게 어떠한 존재였을까. 당시 서구 사람들에게 신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왜 탄생했는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에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은 신이 가르쳐준 도덕적 가치 중 하나였고, 가장 나다운 모습이었다. 이 가치는 나에게 신처럼 자리 잡았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길 원한다. 그래야만 ‘자기극복’한 자 위버멘쉬(초월적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안에 ‘신’ 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내가 가진 ‘연민’에 대해 들여다보았다. ‘연민’이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동시에 주변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들과 웃고 즐기는 생활이 나에게는 ‘연민’이었다. 내 연민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은 나를 더욱 찾아주고 필요로 했다. 누군가에게 필요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연민은 신이 가르쳐준 것이며 동시에 신을 죽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연민은 신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나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와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황당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연민의 감정이 나로부터 도망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나는 정말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에만 신경 썼을 뿐 정작 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열 번 너 자신과 거듭 화해해야 한다. 극복이란 것은 쓰디쓴 것이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자는 단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 세상, 2017, p42)

 

 

  회사를 가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잠을 더 자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과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을 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나에게 실망스러웠다. 동료들의 술자리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날 세운 계획들이 무너지는 날들이 빈번했고, 그때 마다 내 마음은 후회로 가득 찼다. 술로 인해 몸은 점점 망가져 갔고, 그날 세운 계획을 수행하지 못한 나의 모습에 점점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나를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나 자신과 화해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나와 화해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내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철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마음을 굳건히 해야 했다. 하루는 일부러 회사 동료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일이 너무나 마음에 걸려 자는 순간에도 거절한 일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생각이 났고, 나는 다음날 출근하여 동료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까지 사과를 했고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진 것과 동시에 나는 내 자신에게 또 다시 화가 났다. 이렇게 내 안에 있는 연민은 매번 나를 화나게 했다. 

 

 

  

  내가 나 아닌 나로 갔던 한 해    

 


그대들이 일찍이 어느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  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고,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 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 세상, 2017, p531)

   

 

  작년까지 주말에도 하루 이틀 정도는 감이당에서 공부를 했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세미나를 하며 보냈다. 하지만 짧게 짧게 하는 세미나로는 나의 모습을 바꿀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과 친한 관계가 되자, 참석하려는 의무감만 생기게 되었고 공부와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내 안에 있는 나의 연민은 내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칭찬받는 것이 공부보다 더 좋았다. 왜 나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아닌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둘 수는 없었을까. 내가 나 아닌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공부하는 삶으로 살자”라고 마음을 먹고 겁도 없이 ‘감이당 대중지성’을 신청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의 회식 제안에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중에 술을 마시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공부도 힘들었지만, 공부 때문에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대중지성을 하는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에세이도 쓰고, 외우지도 못하는 암송과 낭송을 하며 또 다른 나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대중지성에서 하는 작업(?)은 내가 나와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공부는 나를 변화시켰다.

 

  쓰디쓴 세 번의 에세이가 끝나고 벌써 4학기 에세이가 마무리되어간다.(3학기 에세이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처음 조원들과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했던 순간이 아득하기만 한데 어느새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중지성에서 했던 경험들이 나에게 무척이나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나의 삶과는 전혀 다른 순간들로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출들이 나는 기뻤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자기극복은 이 낯선 순간들이 연출될 때마다 그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원들과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 기뻤고, 깨지고, 부서지는 쓰디쓴 코멘트를 들으면서 에세이를 발표하는 것이 기뻤다. 그동안 회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만 신경 썼던 나는 그것과 전혀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냈다. 나는 자기극복한 자 위버멘쉬가 된 것일까.

 

  “2017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나게 되어서 기뻤다. 니체라는 인물에 대한 기대감과,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세이 시작 전부터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써보겠다고 겁 없이 다짐하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에만 반했을 뿐, 나의 문제의식이 닿고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니 에세이의 출발이 순조롭기는 만무했다. 에세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 가던 중, “도대체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를 시작할 때 떠올랐던 생각이 에세이를 마무리하는 지금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처음 에세이를 써야 할 때 느꼈던 고통과 힘든 시간이 다시 한 번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일 년 동안 대중지성을 공부했던 시간은 지금까지의 내가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년에도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만약 다시 한 번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부를 하는 순간이 되돌아온다면 나는 그 순간을 기뻐할 것이다. 내년에는 올해와는 다른 모습에 나로 변해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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