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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 | 쿠바 리포트 : 여전히 미지의 나라,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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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7-12-09 11:28 조회75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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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지의 나라, 쿠바

 

김 해 완

 

  12월, 아바나는 관광 시즌과 연말 시즌을 함께 맞아 들썩이고 있습니다. 대학교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고요. 친구들이 말해주길, 우리끼리 몇 번 같이 갔던 유명한 클럽은 요즘 관광객으로 꽉 찬 까닭에 지난주에 입장하는 데에만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더군요. 11개월 전 저와 룬핀과 루시벨도 딱 이런 겨울 관광 시즌에 아바나에 방문했었습니다. 우리 세 명도 이렇게 흥분된 얼굴을 하고 돌아다녔을까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 제 눈에 아바나가 어떻게 보였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흥분해서 여행기를 장장 세 편이나 남겼는데, 지금 보면 마치 딴 사람이 쓴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아바나가, 또 아바나의 사람들이 혼란스럽습니다. 몸은 나날이 더 적응하고 있지만 마음은 더 불편해집니다. 이건 제가 여기 머무른 시간이 짧아서일까요, 제 공부가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정말 쿠바가 혼란의 도가니이기 때문일까요? 확실한 것은 뉴욕보다 아바나가 훨씬 더 어려운 숙제라는 것입니다(ㅠㅠ).

 

 

사람이 정보다

  아바나에 막 도착한 사람은 멍청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첫째는 필요할 때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짧은 영어조차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공간의 문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벌벌 떨면서 뉴욕에 도착했던 첫 날을 기억한다. 해외여행을 거의 해본 적 없는 우리는 JFK 공항을 통과하고 택시를 타는 데까지 참으로 많은 난관을 맞닥뜨려야 했다(주로 의사소통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일단 도심에 도착하자 우리는 영어 한 마디 하지 않고도 필요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편의점에 가면 샴푸가 있었고, 스타벅스에 가면 와이파이가 있었으며, 슈퍼마켓에 가니 쌀과 과일과 심지어 김치도 있었다...... 이런 질서정연함은 아바나에서 절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이곳의 상권에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란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가정집 같은 모양새 아래 숨어있기 마련이어서, 아바나에 처음 도착한 외국인은 이 속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바나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 1번은 사람이다. 사람은 정보(앎)의 원천이다. 이 경구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령, 친구가 어제 새로 가본 일본 식당이 맛있었다고 이야기하면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그 식당의 주소를 받아적는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몸소 개척해서(?) 전해준 친구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아바나에서 괜찮은 아시아 식당을 하나 더 안다는 것은 (특히 나 같은 동아시아 출신 친구들에게) 인생의 낙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제 갔던 시장에 배추가 있었다는 정보, 학교 식당 앞에 있는 마켓에 닭가슴살을 뼈에서 분리해서 따로 판다는 정보, ‘하몬 이 아구아’ 가게에 드디어 키친타올이 들어왔다는 정보, 쿠바의 전설적인 살사 그룹 ‘로스 반반’이 1달러에 공연을 개최한다는 정보.......이 모든 것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귀하고 따끈따끈한 정보다.

  버스 노선표도 마찬가지다. 아바나에는 버스 노선도가 없다. 버스정류장에는 이름조차 없는 경우도 많고, 정류장 표지판에 적힌 버스가 절대로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맨 처음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 내게 구아구아(쿠바에서는 버스를 이렇게 부른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바나에 대한 공간감각도 없고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매치기로 꽉 찬 구아구아를 타면 돈만 털린 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아구아는 진정한 로컬 쿠바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산이었다. 결국 나는 주인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구아구아를 타기 시작했다. 모든 노선을 한 눈에 파악하는 대신에, 어디를 가야할 때마다 노선 하나씩 개척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식이었다.

 

  “아바나 비에하 갈려면 뭐 타야해요?”

  “아바나 비에하 어디?

  “까삐똘리오요.”

  “그러면 27번 버스 타면 돼. P4도 가긴 가지만 까삐똘리아에서 너무 멀어.”

  “동물원은요?”

  “그것도 27번 버스. 대신 반대방향으로 타야 해.”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내 질문에 답이 막힌 적이 없었다. 아바나에 오래 산 노인분들이야말로 정보통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살아있는 버스노선도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자 두려움이 좀 가셨다. (부모님과 연락하면서 버스 노선표에 대해 투덜거리자, 어머니가 한 마디 하셨다. 한국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고. 내가 혼자서 버스를 탄 시간이 15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사람을 통해 이룬 또 하나의 쾌거는 앱 이모(imo)였다. 쿠바는 요새 와이파이가 많이 활성화되어서 신호가 잘 터질 때는 인터넷 전화도 걸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전화를 걸어도 내가 인터넷에 항시적으로 접속할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연락기능은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상대방과 타이밍만 잘 맞으면 와이파이 값만 내고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그런데 10월부터 갑자기 내 핸드폰에서 카카오톡이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문자는 잘 갔지만, 전화만 하면 먹통이 되었다. 처음에는 인터넷 신호의 문제인 줄 알고 인터넷이 빵빵하다고 소문한 고급 호텔을 모조리 순회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내고 호텔 커피를 마시면서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카카오톡은 작동하지 않았다. 페이스북도, 위챗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았지만 내 주위에 나 같은 문제를 겪은 사람이 없었다. 다들 핸드폰 문제 아니냐며 반문했을 뿐이었다.

  내가 절망에 빠져 핸드폰을 집어던지기 직전에 이르렀던 날, 테오가 한국어를 공부했던 중국인 지인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오후에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꼬뻴리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쿠바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이 중국인 친구는 몇 달 전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모(imo)를 깔자 다 해결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길로 핸드폰에 이모를 깔았고, 곧바로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남길 수 있었다. 고민 해결!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언제나 이 친구에게 참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역시 사람은 많이 사귀고 봐야 한다!

  

 

이 사람의 말은 진실일까?

  공부를 하면서 나는 사람이 곧 정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쿠바혁명사를 설명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혁명 정부가 10년마다 대담하게 (과격하게) 감행한 경제 실험에 질려버렸다. 말이 쉽지, 실제로 이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변화였을까? 내가 이 시기 쿠바에 태어났다면 정말로 버텨낼 수 있었을까? 그러자 거시적인 역사 한 꺼풀 아래에 숨어 있는 일상 생활의 변화를 추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는 테오와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과외선생님께 순진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정보를 조사할 수 있을까요?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되나요? 그리고 둘 다 내게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음...... 그런 정보는 기록으로 거의 없단다...... 혁명 정부가 기록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더러,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이 정부에 빚이 있기 때문에 그런 책은 잘 안 썼어......... 그냥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결국 이런 전문적인 정보도 사람의 입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소리다. 사실 쿠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공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때로는 멈추지 않고 말을 해서 곤란하다.) 그래서 내게 쿠바의 첫인상이 좋게 남았던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거의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뉴욕 사람들에 비하면, 쿠바 사람들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이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쿠바인이 내게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경험에서 ‘진실’을 반추해 보기에는 그들이 마음 속에 꾹꾹 눌러둔 감정이 너무나 깊다는 뜻이다. 무력감, 열등감, 자격지심, 창피함, 무료함,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일관성이 없다. 그 대신 드라마틱하다. 이 나라의 상황을 미친 듯이 비관하다가,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갑자기 피델과 체의 용기를 치켜세운다. 쿠바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다가도, 아바나 바깥에서 사는 시골 사람들은 나라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이나 다름없다며 모멸차게 지역감정을 드러낸다. 사회의 시스템에 절망해서 일하지 않고 기타를 치며 놀기만 하는 젊은 세대에 분노하면서, 젊은 시절을 혁명 정부를 위해 헌신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가난한 자신의 인생에 또 분노한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속에 쌓인 감정만 내게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 중국 음식에 대한 시덥잖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빠삐는 말했다. “중국은 대단하지. 파키스탄이나 인도를 봐. 자본주의를 택했지만 여전히 가난하잖아? 중국이 그 수많은 인민들을 먹여 살리면서 부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래.” 나는 오늘날 중국이 빠삐의 상상과 거리가 한참 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을 만큼 (그리고 어떤 말을 하든 할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큼) 할아버지와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50년생, 9살에 혁명을 목격하고 완전한 혁명 지지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분. 혁명 전사로 뽑혀서 앙골라에서 3년이나 복무를 했던 분. 그 여파로 평생 수술을 17번이나 하신 분. 외국인을 대상으로 카사를 운영하는 것은 정부에 연이 닿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경쟁력이 세다던데, 아마도 이런 평생의 ‘노선’이 작동했을 게다. 오늘날 카사 주인은 쿠바에서 굉장히 잘 사는 중상류층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삐와 까리는 늘 돈이 없어서 쩔쩔맨다. 이런 분에게 진실은 무엇일까? 이게 다 쿠바의 경제 봉쇄를 풀지 않는 미국의 탓인가?

  카리브해의 생명력을 몸에 품은 쿠바 사람들은 긍정적이다. 많은 이들이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일상의 행복을 찾아내고,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만큼 강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들의 마음이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쿠바, 이곳은 내게 여전히 미지의 장소다.

 

 

 

‘자족’을 향한 끝나지 않는 방랑

  나는 쿠바 혁명에 대해 상식도 로망도 없는 사람이었다. 9년 전, 중학교 때 (문탁쌤의 강제조치로...) 독서클럽에서 체 게바라의 평전을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긴 하지만, 단 한 줄도 내 마음에 발자국을 내지 못했다. 90년대 생 한국 십대에게는 50년 전 카리브해의 섬에서 벌어진 ‘혁명’이라는 사건이 너무나 멀었던 것이다. 머리통이 조금 더 굵어지고 뉴욕도 한 바퀴 휙 돌아보고 온 지금도 내 마음은 이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Yo soy Fidel(나는 피델이다)’라는 슬로건 앞에서 나는 또 다시 이 나라의 정서에서 괴리된다. 

  나는 결국 혁명이 던지는 질문은 ‘자족’이라고 생각한다. 구(舊)식민지 국가 주제에,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자본주의 시장에 반기를 들고, 독립성과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과연 자족할 수 있는가? 쿠바는 이 건방진 질문을 던지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몸소 실천해보였다. 실천은 괴로웠다. 혁명이 유일하게 필요했던 것은 자족이었고, 쿠바 혁명의 유일한 문제도 자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설탕 단일 경제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만인을 굶주림에 빠뜨렸고, 1970년대에는 설탕만 만들겠다고 했다가 다른 경제부문을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1980년대에는 암암리에 퍼진 시장경제를 단속하면서 사회의 고삐를 쥐다가, 1990년에는 쿠바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소련이 무너지면서 극도의 빈곤에 빠졌다. 그리고 21세기에 쿠바는 다시 일어서고 있다. 중국 자본, 관광객 유치, 재생에너지 개발, 그리고 은근슬쩍 도입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서.

  나는 몇 십 년 동안 ‘자족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며 자존감을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십 년마다 생활의 판이 손바닥처럼 뒤집히는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오늘도 양파를 사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외부 사람들이 뭣도 모르면서 쿠바를 이상적인 혁명의 유토피아로 그리면 화가 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를 공부를 하고 나면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국가의 운명을 이해하고 또 슬퍼지지 않았을까? 이 모든 괴로움을 감수하고 혁명을 위해 열일했던 사람조차도, 과거 창녀로 일하다가 외국인과 결혼해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옆집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이 모순을 그냥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쿠바,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어떤 자족을 바라는가. 지금 아바나는 바쁘다. 사람들은 연말 행사를 치를 돈을 구하느라, 관광객 상대로 일을 하느라, 외국인을 꼬셔서 나이트클럽에 가느라 정신이 없다. 어쩌면 내년 4월에 뽑힐 새로운 대통령을 기다리면서 한시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거의 적응을 마쳤다. 그러나 이 적응은 일종의 편법이었다. 처음에는 쿠바 사람들 기준에 맞춰서 똑같이 살아보려고 했다. 이곳 아바나 리브레 호텔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하며 마시는 (맛은 더럽게 없는) 아메리카노는 단돈 2달러다. 그러나 쿠바 사람들 입장에서 이것은 피자 한 판의 가격이고, 버스를 100번 탈 수 있는 가격이며, 변호사 월급의 10%의 가격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그 어떤 것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마음의 가난을 한 달 반 정도 견디고 나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거의 뉴욕 물가에 준하는 값비싼 중국 식당에서 거하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쿠바인이 아닌 것을 인정하고 다시 적절한 ‘소비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쿠바의 태환페소(외국인 화폐)의 시장은 자본주의 국가에 비교하지 못할만큼 궁핍하지만, 가끔씩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글을 쓰고픈 나 같은 사람의 욕구를 적당히 채워줄만큼은 된다. 특히 투어 시즌을 맞은 지금은 더하다.

  쿠바. 이곳의 생활은 단조롭고, 안전하며,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광란의 파티와 외국인의 순례가 시작되는 화려한 겨울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도착해서 참 다행이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이 미지의 정적을 경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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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소담esc님의 댓글

소담esc 작성일

해완샘~ 건강하게 잘 지내요? 이제 쿠바 완벽 적응?
뉴욕과 다른 쿠바의 사람, 환경, 시스템... 건강 챙기면서 적응해요.
난 한국 이민(?) 일주일... 뉴욕에 살았었나...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ㅋ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