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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 | 쿠바 리포트 : 의대생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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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VQ 작성일18-10-26 07:00 조회2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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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의 하루

 

 

김해완

중간고사 기간이다. 오늘 발생학 시험을 보고 왔다. 이 주에 한 번씩 올리는 쿠바 리포트에서는 이제야 학교생활을 소개하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한 일 년은 지난 것 같다. 지난 두 달 동안 뭘 했더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매일 매일 꾸역꾸역 의학 용어를 머릿속에 들이밀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난날 ‘의대’와 ‘의대생’에게 투영하곤 했었던 지적인 환상에는 금이 갔다. 의학, 어렵지 않다. 의대생, 똑똑할 필요 없다. 체력 좋고 미련하고 취미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임상이 아니라 의학 공부를 말하는 거다.) 왜? 정말 무식하게 외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제 외웠으나 오늘 잊어버린 용어들을 머릿속에 다시 주워 담고, 구겨 넣고, 쑤셔 넣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지만, 다른 심오한 공부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학교 가는 길

나의 하루는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우리 집에서 학교를 가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선택지는 55번 버스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한 번에 가며, 별일이 없으면 30분 만에 도착한다. 가격은 착하게도 1CUP(약 40원)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19번 루트 루떼로 택시다. 루떼로란 쿠바 정부가 운영하는 합승 택시로, 루트 내에서는 원하는 곳 아무데서나 내려준다. 19번 루떼로는 학교 옆쪽으로 뻗어 있는 대로를 따라 달리기 때문에, 학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내린 후에 걸어가면 된다. 가격은 10CUP(400원)으로 버스보다 10배나 비싸지만 절대가격으로 보면 역시 비싸지 않다. 게다가 일단 잡기만 하면 15분 만에 학교에 도달한다.

이렇게만 보면 나는 훌륭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학교 가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이 쿠바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제는 버스가 잘 안 오고, 택시가 잘 안 선다는 것이다. 혹은 버스나 택시가 제때 제자리에 (쿠바에서는 운전기사들이 공식적인 정류장을 무시하고 내달리는 경우도 잦다) 섰다 하더라도, 앞서 탄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출근길의 55번 버스는 ‘지옥’을 방불케 한다. 이미 꽉 찬 버스에 내 몸뚱이도 실어달라고 사람들이 달려드니, 버스 기사는 각 정류장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버스 내부의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이렇다보니 어쩔 때는 학교까지 가는 데 한 시간까지도 걸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55번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서는 안 된다. 19번 택시가 나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그러면 학교에 늦는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돈을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갈아타야 하더라도 무조건 먼저 오는 버스 및 택시를 잡아야 한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세게라(Ceguera)라는 정류장이 있는데, 여러 대로가 만나는 교차로이기 때문에 환승역으로는 제격이다. 우리 집에서 세게라까지 가는 버스는 세 종류, 루떼로는 한 종류가 있다. 또 아침에는 어려운 출근길을 돕기 위한 임시 버스도 있고, 세게라까지 가는 사설 택시도 많다. 그렇게 일단 세게라까지 온다. 세게라에서 학교까지 갈 때 이용할 수 있는 버스는 두 종류, 루떼로는 한 종류, 마지막 옵션은 역시 사설 택시다. 운이 좋으면 어쩔 때는 우리 학교 스쿨버스가 서기도 한다! 자, 그러면 내가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경우의 숫자는 몇일까? (계산해 보시라.)

이처럼 나는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을 궁리한다. 오늘은 또 어떤 루트로, 어떤 버스로, 어떤 택시로 학교에 도착할까? 가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어떤 교통수단이 우리 집 앞 정류장에 먼저 도착하느냐에 따라서 재빠르게 새 루트와 새 차비를 계산해야 하니까. 차 오는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노라면, 아침잠에 눌려 무겁게 떨어진 내 눈꺼풀도 어느새 뚜렷해진다. 이어폰에서는 영국 밴드 Starsailor의 노래 Born Again이 시끄럽게 흘러나오며 잠을 깨운다.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네, 다시 태어났다네(She was born again, she was bor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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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어떤 루트로, 어떤 버스로, 어떤 택시로 학교에 도착할까?

1교시 : 발생학 컨퍼런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의 1교시는 발생학 컨퍼런스다. 1학년 1학기 커리큘럼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발생학, 조직학, 생화학, 이렇게 세 가지다. 각각의 과목은 또 세 가지 형태로 순서대로 진행된다. 컨퍼런스, 워크샵, 쪽지 시험. 컨퍼런스는 교수가 새로운 공부 테마를 소개해주는 시간이다. 네 그룹이 함께 컨퍼런스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대형 강의실에서 열린다. 거의 백 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서 흰 벽에 프로젝터로 쏘아진 PPT를 바라본다. (여기서 다시금 쿠바인들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다. 간이 스크린을 살 돈이 없으니, 아예 벽을 흰 색으로 칠해버렸다.)

과제의 양으로 보면 컨퍼런스가 제일 부담이 없어야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아직 새로운 용어를 하나도 익히지 못 했기 때문이다. 교수가 아무리 천천히, 또박또박 강의를 진행한다 한들 그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랴. 쇠귀에 경 읽기다. 게다가 우리 학교 대형 강의실에는 마이크가 없다. 충격적이게도 말이다. 뒷줄에 앉으면 쿠바 학생들도 교수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학기 초에는 나를 비롯한 한국인 학생들이 사비를 털어서라도 마이크를 구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렇게 교수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휙휙 넘어가는 PPT 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딴 생각에 빠진다. 아, 이번에도 외울 게 참 많겠구나... 오늘도 태아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구나... 세상에는 아프게 태어나는 애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컨퍼런스가 중간까지 진행되면 아침 등굣길에서 바짝 조여졌던 정신이 다시 느슨해지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발생학은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이다. 한국어로는 발생학, 영어나 스페인어를 직역하면 ‘태아학’인 이 과목은 생식세포의 생성부터 수정, 착상, 태아 형성, 그리고 출산까지를 다룬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궁 내부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세포 조직학이나 분자 생화학 같은 다른 과목에 비하면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공부하는 맛이 난다. 태아가 제 아무리 희한하게 생겼을지라도 (4주차 태아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해마 같다) 단백질에 촘촘하게 붙은 몇 백 개의 아미노산 분자식보다야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중에 우리 학생들도 아이를 갖게 될 테니, 그때를 위해서 정보를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령, ‘임산부는 담배 피우면 안 됩니다’라는 캠페인을 보는 것보다 ‘담배에 있는 니코틴은 아드레날린 호르몬을 과다분비하면서 태아의 혈관을 좁히는데, 태아의 영양분은 모두 피를 통해 공급된다. 따라서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못 받은 아이는 미숙아가 된다.’라는 구절을 외우는 게 훨씬 더 강력하다. 이런 정보를 외워버린 이상, 임신을 한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는 (혹은 아내가 피우게 내버려두는) 미친 사람은 없으리라.

발생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령, 생식세포는 태아가 납작하게 눌린 밀가루 반죽 같은 모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2주차 때 벌써 생긴다. 다음 세대의 임신을 도모하는 능력이, 아직 뇌도 척수도 없는 태아에게 이미 깃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포들이 태아의 생식기로 무사히 이동하지 못하면 종양으로 변하면서 태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감탄했다. ‘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가 형성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이 태아가 세상에 나와서 훗날 결혼을 할 지 안 할 지, 아이를 낳을 지 안 낳을 지, 이성애자가 될 지 동성애자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생식세포에 담긴 성 에너지는 그가 엄마의 자궁에 착상된 지 일주일 만에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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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세포에 담긴 성 에너지는 그가 엄마의 자궁에 착상된 지 일주일 만에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런 재미있는 생각을 하도록 자극하긴 하지만, 발생학은 애증의 과목이기도 하다. 매 챕터마다 새로운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이는 태아가 엄청 빠르게 변하는 탓이다. 헉헉대면서 태아의 각 파트를 다 외웠더니, 일주일 만에 다 사라지고 새로운 기관들이 등장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도 이런 경이로운 과정으로 태어났다는 게 놀랍지만, 이 과정을 외워야 하는 순간 경이는 경악으로 바뀐다.

 

2교시 : 생화학 워크샵

2교시는 생화학 워크샵이다. 네 그룹은 각기 다른 교실로 찢어진다. 워크샵 시간에는 미리 해 온 숙제를 확인하고, 문제를 토론하고, 선생님의 보충 설명을 듣는다. 세 가지 종류의 수업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발생학 수업에서는 재잘재잘 떠들던 친구들이 생화학 수업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생화학은 가장 인기 없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 문제인 줄 알았다. 내가 과학 수업을 너무 오래 전에 들어서, 9년 전에 고등학교 자퇴하기 직전에 들었던 수업이 내 인생의 유일한 화학 수업이어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온 따끈따끈한 2000년대생 쿠바 친구들도 다들 벙쪄서 수업을 듣는다. 고등학교 화학 수업과 대학교 화학 수업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워크샵 교수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애걸하지만, 쿠바 친구들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누구는 대놓고 말한다. “우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이지, 화학자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난이도 좀 낮추시죠.” (지난 번 리포트에서 쿠바 의대 교수들이 권위를 세운다고 썼는데, 그 의견을 수정하려고 한다. 세상 그 어떤 의대생도 교수에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ㅋㅋ.)

생화학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 나는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 탄수화물의 분자식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내가 10년 전에 철학공부를 막 시작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검은 것은 알파벳과 작대기요, 흰 것은 종이로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는 스페인어 단어를 모두 찾은 후에 책을 읽어도, PPT를 봐도, 녹음 파일을 들어도 상황은 똑같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호텔에 가서 인터넷을 연결한 후 EBS 수능 특강을 찾아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절하고 어여쁜 박주원 선생님이 나를 구했다. 우리 학교의 무뚝뚝한 워크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퀄리티의 인강 덕분에 나는 마침내 탄화수소의 중요성과 산과 염기의 특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 ‘깨우침’의 순간 같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다음 스텝을 내딛을 수 있다.) 또, 생명 공학을 전공하는 사촌동생의 추천으로 다운받은 생화학 텍스트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사실 무슨 텍스트를 다운받았든 간에, 90년대에 출판되었고 그림도 몇 개 없는 우리 학교 생화학 교과서보다는 나았으리라.

요즘 나는 생화학 수업에서 만큼은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워크샵에 갈 때 숙제도 거의 해가지 않는다. 마음 편하게 빈손으로 가서 워크샵을 듣고, 집에 와서 천천히 교과서를 들여다본다. 그러면 느리지만 이해가 된다.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외울 것이 가장 적은 과목이 바로 생화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유로운 태도를 가져야 생화학이라는 벅찬 고지를 넘을 수 있다. 아미노산의 놀라운 효율성, 단백질 구조의 오묘함과 복잡다단함, 단백질 효소가 작동하는 원리의 예술성에 기가 질려서 공부 자체를 포기해버린다면 나중에 세포는 또 어떻게 공부하겠는가? 이런 단백질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생성해내고 또 써 먹는 공장이 바로 세포인데... 또 나중에 약의 성분을 어떻게 공부하겠는가? 양약은 순수한 화학제품인데... 내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EBS 박주원 선생님이 다시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 의심치 않으며, 마음을 굳게 먹고 생화학 공부를 기피하는 주변 친구들을 달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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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태도를 가져야 생화학이라는 벅찬 고지를 넘을 수 있다.

3교시 : 조직학 쪽지 시험

마지막 수업은 조직학이다. 몸의 구성과 기능을 세포, 조직, 기관과 같은 각 단위 별로 공부하는 (생으로 외우는) 수업이다. 세포 파트는 끝났고 몇 주 전부터 조직에 들어갔다. 연결조직에 대한 컨퍼런스도 마쳤고, 워크샵도 끝났으니, 오늘은 쪽지 시험을 보는 날이다. 며칠 동안 노트 정리를 하고 어제 하루 종일 외웠던 노트를 마지막으로 검토해본다. 그러나 솔직히 그 세포가 저 세포 같고, 저 조직이 이 조직 같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감을 잡을 수도 없는 이 미시 세계의 친구들과 친숙해지는 것은, 그것도 건조한 텍스트를 통해서 친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단위가 더 커져서 구체적인 기관을 다룰 때 즈음이야 조직학에 본격적으로 흥미가 붙을 것 같다. 심장, 폐, 위장...... (그러나 아직도 공부해야 할 새로운 조직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흑흑.)

쪽지 시험은 짧고 간단하지만, 이 방대한 내용 중에서 어떤 부분이 나올 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 쪽지 시험은 두 파트로 나뉜다. 쓰기와 구술이다. 쓰기 시험은 쉽다. 빈 칸을 채우거나 참*거짓만 가리면 된다. 그러나 구술시험은 훨씬 더 어렵다. 이 시험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한 명씩 일어나서 문제에 답을 해야 한다. 가령, “연결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대식세포의 구성과 기능에 대해 말하시오”라고 교수가 물으면, 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즉석으로 대식세포에 대한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쿠바 친구들도 부담스러워 하는 이 시험은 내게는 공포 그 자체다. 내용 자체를 기억해내는 것도 충분히 어려운데, 이것을 스페인어로 즉석에서 풀어내야 한다. 의학뿐만 아니라 스페인어까지 나를 압박한다. 쿠바 친구들이야 눈치껏 살을 갖다 붙이면서 대답할 수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통째로 외워서 답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어휴.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집에 오는 길

집에 돌아왔다. 몸이 노곤하다. 그러나 책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바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잠시 의자에 앉아 딴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작은 보금자리를 둘러본다. 아침에 요거트를 마시고 설거지통 물속에 담가놓고 간 컵, 의자에 개지 않고 놓아둔 잠옷,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바닥. 이 순간만큼은 시계를 보지 않고 천천히 청소를 시작한다. 동생과 최근에 통화를 하면서 공부할 것은 많지만 이래저래 해야 할 소일거리도 많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동생이 말했다. “원래 그래. 시험 기간에는 안 하던 청소도 하고 싶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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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래. 시험 기간에는 안 하던 청소도 하고 싶어지는 거지.”

헐, 어떻게 알았을까.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청소와 설거지가 나의 거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 되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흥 나는 설거지를 한 후, 깨끗한 그릇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후에 냉장고에 미리 쟁여둔 아이스크림과 브라우니를 꺼내먹으면 기분이 한층 더 좋아진다. 아, 이렇게 단순한 것이 의대생의 일상이란 말인가? 뉴욕 살 때는 디저트의 ‘디’도 입에 대지 않았건만, 이곳에서는 달달한 간식이 나의 유일한 낙이 되고 말았다. 머리에 의학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 자체는 단순해지고 있다. (역시, 지적인 사람만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자, 이제 놀 만큼 놀았다. 다시 책과의 전투로 돌아갈 시간이다. 지금까지 해온 공부 방식과 많이 달라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이 지루한 공부는 희한한 방식으로 사람을 매료시킨다. 책을 펴놓고 몇 시간씩 뚫어져라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새로운 생각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몸에 대한 상상력이 바뀌는, 혹은 바뀌고 있다는 전조다. 어쩌면 내 의대 생활의 진면목은 이 잠깐의 일탈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은 순간을 위해서 오늘도 나는 아침에 버스를 잡고, 점심에 학교에서 졸고, 저녁에 청소를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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