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크크성 2기 첫번째 에세이-낭송 장자] 권순예 > 이타카로 가는 길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9/21 금요일
음력 2018/8/12

절기

이타카로 가는 길

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첫번째 에세이-낭송 장자] 권순예

페이지 정보

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5-30 16:17 조회202회 댓글0건

본문

낭송 장자

 

May 20, 2018

권순예 

 

'절대자유의'가능하게하는 자의 삶에 대한 인식은어디에서 출발하며 뿌리는 무엇일까

그것이 <만물은 하나다>는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이라 , "만물의 생성변화”의 과정과 어떤 관성 에서 설명하고 는 것일까?

“삶과 음, 지킴과 음, 부귀와빈곤명함과 어리석음, 칭찬과 비방목마름과 고픔, 더위와 위"라는 엄청난간극의 대적 의미를 다름이 아닌‘하나'인식하게 하는 장자의 <만물은 하나다 >라는 인식의 적을 라가 자.

 

1부 나는 장자다, 1-8 <과 죽음은 계절의 변화와 은 것>에서 아내의 죽음을 이한 장자는 인간의 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삶의 시작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디 생명은없었어. 지 생명이 없었을 아니라 본디 형체도없었어. 단지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기조차없었어.

무언가 없는 것이 절로 혼합되어 기로 변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되었다가, 지금 다시 변해 죽음으로 아간 것이야...이 사람은 이제 지라는 에서 편안히 고 있을 뿐이....” 

 

여기서 장자는 생명의생과 소멸이 천지의 무에서 시작하여 기, 형체, 생명, 죽음, 천지로 귀속하는 순환과정의 하나일 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자연법도로써 만물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인식하면 죽음이 픔일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 3부, 삶을 가꾸는 기예, 3-3. <에 하면 어져도 죽지 아요>에서 자는 “지인은 물에서도 숨막히지 않고, 에서도 뜨겁지 않고, 만물을 내려다보는 은 에 라가도 려움에 떨지 않는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관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지인은 순수한 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지혜, 기교, 기 따위가 아니다...... 모든사물은 모양, 소리, 색깔을 추고 있다. 그런 에서 사물들은 차이가 없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들은 모두 관상의 변화일 뿐이다. 모든 사물은 형체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 형체를 어서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남김없이 깨달은 자를 어떠한 사물이 막을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자연의 법도에 의거하여, 변화의 근원과 한몸이 되어, 없이 쳐지는 변화 속에 닌다. 마음을 한결같게 하고, 순수한 기를 기르며, 을 자연과 합치시켜 만물의 생성변화에 달한다. 이렇게 되면 고난 바탕이 온전히 지켜지고, 순수한 기에 어떤 것도 틈입하지 한다....”

 

지인의 지란 "만물의 생성변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즉, 어떤 만물에도 생성과 소멸이라는 변화 과정이 일률적으로 관통하며 그 외관상의 변화에 불과한 변화에 대해 두려움, 공포주관적 정과 생각의 어듬없이 바라보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아들이며 그 름 안에 있는 사람의 경지임을 말해 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인은 어떤 난관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4부, 덕이 만한 사람들, 4-5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 추 애태타>에서도 장자는 추 애태타를 “타고난 바탕이 보존되어 있고, 덕이 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 칭송하며 타고난 바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삶과 죽음, 지킴과 잃음, 부귀와 빈곤, 현명함과 어리석음, 칭찬과 비방, 목마름과 배고픔, 더위와 추위, 이런 것들은 사태의 추이가 바뀌는 것이며 자연의 운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수없는 변화들이 원래 하나라는 것에 통달하면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시각각의 변화에 완벽히 하게 되면 만물과 함께로 탄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을 만나는 모든 순간이 매번 는 순간입니다. 이를 ‘타고난 바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꼽추 애태타를 인간사에서 수 있는 모든 노애락, 삶과 죽음을 포함한 만물의 생성변화는 "사태의 추이가 바뀌는 것이고 자연의 운행이 달라지는 것”이며 이러한 변화가 원래는 하나라는 것에 통달하여 시시각각의 변화의 흐름에서 만물과 함께 늘 새로 탄생하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꼽추 애태타는 모든 변화에서 자유롭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의 본보기인 것이다.

 

5부 만물은 하나다, 5-8 <애당초 사물은 없었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히고 있다.

 

사람들의 지혜는 매우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애당초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없이 깊고 완전하여 보탤 것이 없는 경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설사 사물이 있다 하더라도 애당초 구별은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입니다. 그 다음은  각각의 사물이 존재한다 해도 애당초 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입니다. 옳고 그름을 드러내면 도가 훼손됩니다. 도가 훼손되면 사물에 대한 애착이 생깁니다......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솜씨, 사광이 를 고 장단을 맞추는 솜씨, 혜시다 상에 기대앉아 변론하는 솜씨는 모두 무 훌륭해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에까지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아한 것은 참된도와는 다른 것으로,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도를 밝히려 하였습니다. 좋음이 생기면 도는 훼손되는 법. 따라서 밝힐 수 없는 것으로 밝히려 한 입니다.......성인은 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윽한 을 추구합니다. 이 때문에 별 단하지 않고 사물의 자연스러움에 따릅니다. 이것이 ‘밝은 지혜’입니다.”


만물에 대한 옳고 그름과 좋고 음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기준에 따른 것일 뿐 어떤 모습을 하던 모든 사물 자체에 차이가 없다고 바라보는 자연의 도에 위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5-6 <도의 지도리 (2)>에서는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것에서 보면 저것이 저것인 모르고, 이것에서야 저것이 저것인 줄 알게 됩니다. 저것은 이것에 의해, 이것은 저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에 의해 성립한다는 세상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좋은 것이 있기에 싫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기에 좋은 것이 있다는 주장은 옳고 그름의 근거를 상대에게서는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러한 주장에 따르지 않고, 자연의 이치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모두 정’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옳고 그름의 상대적 구별을 넘어서는 것을 ‘도의 지도리’ 라고 합니다. 지도리가 전의 중심이 되면 끝없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옳은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요, 그른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위에 살펴본 것과 같이 장자는 모든 사물의 근본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수많은 모습으로 우리 에 펼쳐지는 다사다난한 세상사의 모습은 '자연의 운행과 사태의 추이'에 따른 변형된 모습에 불과함을 주장하고 있다. 즉, 현상적 삶과 죽음은 상극으로 보이는 개념이지만 근본을 들여다 보면 삶은 죽음의 변형된 모습이며 죽음 또한 삶의 또다른 모습일 뿐 인 것이다. 이는 “지킴과 잃음, 부귀와 빈곤, 현명함과 어리석음, 칭찬과 비방, 목마름과 배고픔, 더위와 추위” 등 라만상의 법칙과 그 중 한 부분인 개인적 차원의 인생사를 해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사회적 인간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안에서 한 성원으로서 상호작용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많은 사회적 관계, 작게는 회사, 교, 작은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장자의 '만물은 하나다', '자연의 도'라는 명제로 해결할 수 있는가? 

일신의 수양에 적절한 장자의 도와 사회의 위계를 세우고 다스리는 법을 말하고 있는 공자는 제 각각의 주로 자신들의 학을 적용했다면 가치관의 배치로 여길 요가 없지 않을까? 

하나의 철학을  모든 부문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 한 오류가 장자와 공자의 철학을 대립으로 바라보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현 시대의 , 명예 등을 는 물질만능의 가치로 일생을 사는 것이 마나 된 것이며, 우물 안 세상과 같이 시대적 한계에 갇혀있는 것인지를, 시대적 가치를 넘어서는 “자연의 도”를 지키는 것이 이 시대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길임을 배웠다. 

 

그러나 내가 속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자의 '자연의 도'를 적용하므로써 모든 모순과 불의에도 순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어불성설 그 자체라 할 수 밖에 없다.한 시대에 필요한 ‘성인의 도’와 ‘인의’는 ‘자연의 도’ 보다 하위 개념이 아니라 다른 범주의 문제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글 장자를 펴낸 노고에 감사한다.^^

(지인, 참된 스승, 자연의 도, 양생의 도, 자연의 도를 지키는 것이 성인의 지혜와 인의의 행동보다 지극)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