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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 1-권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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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7-12 13:15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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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1, 2018

<실크로드, 피터 프랭코판>

제1장~제5장

권순예

 

<고대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의 기독교>

 

실크로드 세계사 1장에서 5장까지는 실크로드 형성과정과 이 무역 루트를 통한 각 재배세력의 부침과 종교의 교류, 특히 기독교의 발전과 이슬람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현재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세심히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어떤 위상을 가지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다시금 종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 세기의 400여년은 팔레스타인의 작은 지역에서 터져나온 기독교가 지중해와 아시아를 넘나 들며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의 원천이었다. 페르시아에서는 무엇보다도  Caucasus 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로마와의 전선에서 통치권을 차지한 Sasanian 왕조는  Greek religion에서 Zoroastrianism으로 바뀐게 된다.

224년에 Ardashir I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권력을 잡자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의 연관을 강조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 cosmology는 현 Sasanian Dynasty를 Illuminating Wisdom을 설파했던 고대 페르시아 왕들과 연결하려는 의도였으며 사사니언 왕조의 Ardashir I세와 그 아들 Shapur I 세하에서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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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로아스터교 신전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트로교가 장려되면서 지역 종교그룹과 경쟁적인 Jews, Buddhists, Hindus, Manichaeans 등 다른 cosmologies를  evil doctrines으로 규정하면서 박해하였고, 

조로아스터니즘이 3세기 페르시아에 그렇게 강력히 뿌리를 내린 것은 기독교가 무역 루트를 따라 상인들과 시리아에서 추방당해 페르시아 영토에 재정착한 죄수들에 의해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가자 이에 대한 적대적 반응이 반대급부로 아주 강력한 조로아스터 철학으로 형성되며 가속화되었다.

 

기독교는 오래 동안 지중해와 서유렵과 관련되어 왔다.

기독교는 로마에 기저를 둔 Catholic, Anglican, Orthodox 교회의 전신과 함께 Canterbury, Constaninople에 존재해왔다.

사실은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는  예수의 탄생과 삶, 십자가 처형과 연관된 Asian Jerusalem이었다.

기독교 초기 로마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열정에 감동받아 그냥 두었으나

로마 사회에 기독교가 깊이 침투하는 걸 보면서 태도가 강경하게 변하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전통적 가치를 위협함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2세기부터는 수천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잔인하게 처형당했는데 종종 공공 오락 차원으로 시행되기도 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바빌로니아 추방이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았던 유대 공동체를 통해 동쪽으로 퍼져나갔다.그들은 예수의 나고 죽음의 소식을 서방에서 개종된 모든 사람들이 하듯이 예수와 그 제자의 언어인 아람어로  접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파는 지중해에서와 같이 무역상들이 동쪽으로 교역을 해나감으로써 선교의 도구로써 역할을 했으며 에데사 (modern Urfa in south-eastern Turkey)가 북과 남, 동과 서로 나아가는 교차로로써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곧 상당한 수의 개종한 유대인들이 있던 Caucasus나 얼마지나지 않아  Persian Gulf를 따라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났다. 3세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페르시아 전역과 동쪽으로는 Kushans (히말라야 보더라인) 통치하던  현재의 아프카니스탄에 걸쳐 발견되었다.

 

기독교의 전파는 2세기에 Shapur I 세가 왕조가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동방으로 추방하면서 확장되었다.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다른 페르시아인들과 달리 더이상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았으며 

유목민들 또한 더이상 인간 육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으며 이러한 진전이 환영받았다.

이는 3세기 중반 페르시아에서 기독교가 깊숙히 전파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헤 조로아스트의 사제들은 로마제국하에서 기독교 핍박을 반영하듯 엄청난 폭력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에서는 열광적인 조로아스터리어교로 인해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말살로 이어졌다. 이는 새롭게 페르시아를 건설하면서 국교로 등장하게 되었고 조로아스트교의 가치가 페르시안과 동일시 되고 사사니언 왕국의 지지대이며 영혼의 해방의 한 형태로 여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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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

 4세기 시작할 무렵 아르메니안 왕 Tiridate III 세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로마의 콘스탄틴 또한 312년 개종하였다.  콘스탄틴은 새로운 도시 Contantinople에 황제의 노력을 축복했던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여 기독교를 강화하였고 다른 종교 그룹을 문을 닫게하고 신탁이나 신성화, 로마 종교학의 중요 인물들을 금지시켰다. 이교도 동상도 철거하였고 법으로 금지되었다.

콘스탄틴의 개종은 아주 복잡한 배경이 있는데 군대의 많은 병사들의 개종을  받아들이는 것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보였고 또다른 이유는 주화나 기념물, 부조물에 콘스탄틴이 불패의 태양을 숭시하는 그룹의 지지자로 보이는 것은 박진감있게 전개되는 기독교 문헌에 비해 그의 존재가 미미하게 보여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개종 이후에도 그의 주장과 반대로 제국은 한번에 그 특징을 바꾸지 못했는데

왜냐면 로마의 주요 인물들이나 콘스탄티노플이나 다른 곳에서도 계속 전통 종교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는 확실히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Diocletian 왕권 동안 극에 달했던 박해 처형이 십년 새 끝났고

중요한 로마의 오락이었던 Gladiator fights가 생명 경시로써 기독교인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이는 325년에 제국의 법으로 제정되었다.

예루살렘은 대량 건축물이 세워졌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통치관리의 중심이라면

예루살렘은 영적인 심장이 되었다.

 

콘스탄틴의 개종은 로마제국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이는 서방의 기독교인과 기독교에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동방 기독교에는 재앙을 불러왔다. 

330년에 콘스탄틴이 페르시아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콘스탄틴이 다뉴브 전선에 없는 틈을 타서 Shapur II가  Caucasus에 갑자기 쳐들어 갔고 이곳을 접수하게 되였으며이에 콘스탄틴은 즉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병에 걸려 죽게되고 Shapur II는 콘스탄틴의 공격성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지옥 같은 박해를 가했다. 5세기 무렵의 기록에 의하면 12명의 순교가 이뤄졌고 적어도 16명의 주교와 50여명의 목사들이 처형당했다.

콘스탄틴과 그의 계승자들은 로마와 로만 시민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을 보호한다고 말하기 시작하자 

제국의 보더를 넘어서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재앙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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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337년에 콘스탄틴이 죽고 페르시아는 379년에 Shapur II가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가 Nisibis, Sinagra 까지 영토를 탈환하면서 서로 적대감이 완화되었지만 이보다 두 나라의 관계개선을 이루게 한 건 공동의 적 유목민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sea levels이 올라가고 말라리아가 출현, Aral Sea에서는 염도가 줄어듬으로써 새로운 식물들이 서식하였으며 Tian Shan 산맥에는 새로운 형태의 빙하가 밀려드는 등 환경변화의 시기에서 북방의 유목민의 공격은 강화되고 있었다. 5세기에 Goaths, Alans, Vandals, Huns가 유렵과 북부 아프리카를 휩쓸면서 문맹률은 엄청나게 되고 돌로 만든 빌딩들도 사라졌으며 뚜렷한 부와 야망이 무너지는 Dark Age로 묘사할 수 있다. 5, 6 세기의 페르시아에서 기독교의 확장은 샤가 605년 총대주교의 선거를 위해 페르시아에 잇는 모든 주교들을 소환햐여 치르는 식으로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던 것에서 기독교를 후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Sasanian ruler의 경제적 성장에 따른 자신감과 종교적 관용으로 표출된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콘스탄티노플과의 매끄러운 관계유지를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정기적 공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14년에 지중해 지역에 발생한 흑사병은 로마제국, 소통과 무역 루트를 따라 페르시안 메소포타미아 지역, 심지어 중국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경제적 침체를 불러왔고 한 세대가 절멸하여 고대 인구 동태를 바꾸고 심각한 경제위축을 불러왔다.

로마의 경우 Justinian 제국은 이태리와 북부 아프리카 지역을 복원하는 등 놀라울 만한 성공을 거뒀지만 

확장된 국경을 유지하기위한 인력과 돈은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경기침체 국면이 계속되자 국민정서는 동서남북의 야만인들에게 빠져 나가는 돈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Justinian의 후계자들은 이런 접근법을 버리고 이웃과 비타협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훈족을 대신해서 중앙 아시아를 차지하고 있었던 튜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의 Justin II세에게 동맹으로 페르시아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동맹군은 574년에 Dara(southern Turkey)에서 페르시아에 대패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여년 동안 로마와 페르시아의 적대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가 계속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580년에 장군 Vahram이 Khusraw II세에 반기를 들자 샤는 로마에 원조를 요청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갔고 대신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다라 지역의 양도를 약속하고 591년에 돌아와 그의 약속을 이행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황제 Maurice가 Phokas에 의해 살해당하게 되고  Khusraw II는 이 틈을 탄 공격으로 

609년에 Edessa를 함락시키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탈환하게 되고 이어서 610년에는 Roman Syria를 611년에는 western Syria인 Emesa, 613년에는  Damascus를 탈환하게 된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포카스는 살해되고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등극했으나 아시아 마이너에서 페르시아와의 교젼에서 참패하자 샤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문화적 종교적 승리를 주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614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로마제국에서는 유대인을 페르시아군대의 적극적 지원자로 현지 주민을 학살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십자가를 짓밟고 성상에 침을 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전쟁에서 최대의 전리물로 성 십자가가 탈취되어 페르시아로 보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헤라클레우스는 관계요청을 위해 페르시아에 로마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는 파국적 상황으로 치닷고 있었다.

이에 로마는 주화 디자인을 바꾸었는데 앞면에는 전처럼 황제 흉상, 뒷면에는 십자가 모습을 새겼다.

이는 페르시아와 맞서 싸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강조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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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동전 

  

페르시아는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619년에 Nile delta로 진격하여 Alexandria를 함락시켰으며 

채 2년도 못되어 이집트(지중해의 곡창지대이자 600년 동안 로마 농업경제의 원천이었던) 를 무너뜨렸다.

622년에는 아시아 마이너를 무너뜨렸다. 페르시아는 유목민 Avar족와 연합했으나 이 부족의 내분으로 퇴각하게 되었고 이때 로마는 Turk와 동맹을 맺어 627년에 Nineveh에서 대승을 거둔다.

Khusraw II는 살해되고 아들 Kavad는 즉각 전쟁 종결을 호소했으며 로마는 영토와 성십자가 반환을 약속 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패전과 혼란의 와중에 페르시아에서는 샤흐르바라즈 장군이 왕위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헤라클레우스와 협상했다.

다시 찾은 영광의 시기에 헤라크레우스는 자신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지금까지의 페르시아의 공격은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고 Khusraw II 가 직접 쓴 듯한 헤라클레우스를 멸시하고 기독교 하나님의 무능을 조롱했던 편지가 군대 앞에서 펼쳐진 연극에서 읽혀졌다.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종교를 위해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며 촉구하는 것이었다.

630년에 헤라클레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성십자가 유물을 성묘 교회에 반환한 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정화의식을 치르게 했다.

이는 16년 전 이 도시가 함락될 때 유대인들이 했던 역할에 대한 벌이었다.

이단으로 여겨지는 동방의 기독교도들도 제국의 표적이 되었고 새로운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간의 다툼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전쟁 혹은 협상 테이블에서의 승리가 문화적 우월성과 신의 축복을 받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제대로 된 신으로부터 보호받은 국가는 살아남고, 잘못된 우상과 공허한 약속의 신의 국가는 고통받는다는 원리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제대로된 영적인 인프라스트럭쳐에 투자하고 강고히 하는 것에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게 되었고 지도자가 사제들과 상호적으로 강력한 관계유지를 하는 것은 지속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며 정치적 파워를 운용하게 되는 관계가 성립되었다.

로마의 기독교는(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끊임없이 펼치기 위한 제국 전쟁을 위해 국민들의 무장된 정신상태가 필요했고 전쟁의 정당성을 종교를 지키는 것으로 환치시킴으로써 끊임없이 전쟁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체계를 확장하고 지탱하는 전쟁의 필요불가결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를 위해 국민들은 생명을 댓가로 치뤄야만했다.

모든 종교가 인간 영혼의 구원을 모토로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한 국가체계를 원활하고 강고히 하는 상부구조의 역할을 할 뿐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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