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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 1-정에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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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7-12 16:50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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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1, 2018

<실크로드, 피터 프랭코판>

제1장~제5장

정에스

 

2. 실크로드와 종교

 

 “고대에 태평양중앙 아시아인도페르시아만지중해를 연결하는 대동맥을 따라 흘러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사상도 흘렀다.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된 사상이었다지적종교적 교류는 이 지역에서 언제나 활발했다…지역 종교와 신앙 체계가 잘 짜인 우주론과 결합되었다그것은 펄펄 끊는 용광로였고그 안에서 사상이 차용되고 정제되고 재포장 되었다.(실크로드, 63p) 알렉산더가 동방 원정으로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짧은 그의 생을 마감한 후 들어선 동방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식민지의 그리스화 프로그램을 점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이는 후에고대 그리스의 사상주체,상징이 동방에 이식되어 본격적인 헬레니즘 문화 및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였던 박트리아(현대의 아프가니스탄)를 차지한 월지족 쿠샨 왕조가 그들의 전성기에 이루어낼 간다라 미술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원전세기 무렵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강 유역 어디에서나 그리스어를 들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관리들은 알렉산더가 죽고100여년이 지난 뒤에도 그리스어를 썼다인도아 대륙 마우리아 왕조의 통치자 아소카가 선포한 포고령의 일부는 현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그리스 번역을 함께 남길 정도였다그리스의 신화가 멀리 인도까지 전파되었고 그 결과 올림포스의 신상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숭배되었다페르시아와 그 너머의 젊은이들이 호메로스를 읽고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읊조리며 자랐고 인더스 강 유역에서 그리스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인도의 고전언어인 산스크리스트어의 초기 서사시인<라마야나><일리아스><오디세이아>의 일부 이야기를 차용했으며 이런 영향과 자극은 반대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아이네이스><마하바라타>같은 인도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아이디어와 주제와 이야기들이 간선도로를 따라 이동했고여행자와 상인과 순례자들에 의해 널리 퍼졌다알렉산더의 정복은 그가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주변부와 그 너머에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개념을 접촉하게 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실크로드, 33p) 

 

새로운 종교 습속에 위기를 느낀 간다라 분지와 서부 인도의 불교도들은 기존의 시각적인 표현을 삼가하던 자신들의 신념을 버리고 혁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지역에 불상이 나타난 것은 이 때쯤이었다또한3자가 개입되지 않는 불도의 깨달음의 길에 물질적물리적 방식이 도입되었다붓다와 연관이 있다고 하는 사리탑과 성지가 만들어져 참배 장소가 되었다붓다의 치아와 붓다가 세수할 때 썼다는 대야청소할 때 썼다는 메밀짚으로 만들어진 비 같은 것들이 멋진 보석들로 장식되어 성스러운 유물로 숭배되었다또한성지에 꽃이나 향진주수정청금석산호다이아몬드에메랄드 등을 보시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데 도움이 된다고 이 시기에 나온 법화경은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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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양식 불상

 

1세기 무렵 북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상인과 승려여행자들이 다니는 교역로를 따라 급속하게 전파 되었다.불교는 서쪽의 주요 교역로를 따라 전파 되기도 했었지만 특히 중국을 인더스 강 유역과 연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그드 상인들에 의해 그 교세를 안착하게 되었다많은 소그드 상인들이 불교를 믿게 되자 주요 교역로를 따라 사리탑들이 만들어졌고 곧 얼마되지 않아 불교 사상과 의식이 중국에 전파되어 이미 자리잡고 있던 유교와 경쟁할 정도로 기반을 잡기에 이르렀다.이는 외부 출신이었던 새 통치 왕조 북위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불교 장려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거대 불상들이 중국의 한참 동쪽인 핑청과 뤄양에 세워졌고듬뿍 시주를 받은 사원과 성소들도 들어섰다메세지는 분명했다북위는 승리했고 그들의 승리는 신성한 섭리에 따른 것이지 결코 전쟁터에서 얻은 난폭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이다.(실크로드, 69p) 

 

반면페르시아는 제국을 부흥시키는 군사 문화와 완전히 일치하는 강력한 신앙체계인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조로아스트교는 기원전1000년 무렵 살았던 페르시아의 위대한 선지자인 자투스트라에 의해 창시되었다그는 우주가 아후라마즈다와 앙라마이뉴 두 개의 원리에 따라 나뉘었다고 가르쳤는데 그것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인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를 의미한다“이런 우주론을 통해 사산제국 통치자들은 자기네의 권력을 고대 페르시아의 황금시대와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실크로드72p)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재천명되면서 불교유대교힌두교마니교와 그 밖의 종교들은 박해를 받았다.성소들은 버려졌고 사리탑들은 파괴되었다고대 위대한 페르시아와의 연결을 강조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나 다리우스키루스 같은 위대한 페르시아 왕들과 관련된 나크시에로스탐 묘지 같은 고대 이란의 중요한 유적들이 문화적인 선전에 이용되었다.(실크로드, 70-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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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기반을 둔 기독교가 초창기에 전파될 떄에는 로마의 관대한 정책으로 인해 해로를 통해 전파된 지중해 연안 지역보다는 동쪽 지역에서 훨씬 더 그 기세를 뻗어 나갈 수 있었다특히 에데사(오늘날 터키 남동부의 샤르우르파)는 남북과 동서로 이어지는 길목의 교차로에 자리잡은 탓에 그 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상인들로 인해 기독교가 동방으로 전파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세기 초에는 파르티아(시리아)의 학자 바르다이산은<각국의 법률에 관한 책>에서 기독교도들이 페르시아 전역과 멀리 동쪽으로 쿠샨이 지배하는 영토(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까지 퍼져 있다고 적었다.(실크로드, 79p) 

 

그러나 분위기는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그리스도의 신도들은 이교도의 관습을 부적합하게 여기고 그들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이것은 종교를 떠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식민 통치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특히3세기 중반에 기독교가 페르시아에 더욱 파고들어서 신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조로아스터교 교단은 폭력적으로 대응했다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점령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조로아스토교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다른 우주론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로마 또한 초기에는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로마 군대는 기독교가 기존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와는 달리 죄와 성죽음과 삶 전반에 관한 혁명적인 태도가 로마의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호전적 가치관에 매우 위협적이라고 생각되자 대대적인 박해를 단행하였다로마에서는 2세기 이후 잔인한 박해가 거듭 이어져 기독교도들이 수천명씩 살해 되었고 때로는 대중의 오락물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의 신앙을 꺽지 않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그들의 이야기들은 길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묘사되어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더욱 고무시겼다.기독교도들의 교세는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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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그 교세를 확장하고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와 페르시아가 동맹을 맺은 이후부터이다대략350년부터360년 사이에 스텝의 여러 민족들이 동방에서 일어나 훈족의 압박과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부족과 기근,그리고 말라리아의 발생 등으로 서쪽으로 내몰리면서 극심한 자원 쟁탈에 의한 민족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이주의 파도가 일어났다멀리 도나우 강 유역부터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박트리아까지 로마의 국경이 흔들리고 있었다.이탈리아는 서고트가카르타고는 반달족이이베리아 반도는 알라니족의 수중으로 떨어졌다이후세기 중반에는 테르빙기 고트수에비게피다이,네우로이바스타르나이 등 여러 종족들이 뒤범벅이 되어 쫒아서 들어왔다.“페르시아 역시 스텝에서 밀려오는 격동으로 인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페르시아의 동쪽 주들은 맹공격에 시달리다가 완전히 무너졌다…캅카스 산맥을 넘어오는 공격에 메소포타미아시리아,소아시아의 도시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약탈 당했다.(실크로드, 91p)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도시들이 유린되고 수도 크테시폰도 공격을 받았다야만적인 약탈 패거리를 몰아낸다는 공동의 목표아래 로마와 페르시아는 뜻을 같이 하고 유목민이 캅카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2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건설했다.“로마는 이 페르시아의 성벽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돈을 내는 데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그 방어를 돕기 위해 병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실크로드, 92p)

 

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이 주춤해지고 국경선이 자주 흔들리면서 경제적인 압박까지 받게 되자 그러한 현실을 타개할 자구책으로 눈치 빠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계시가 내려진 선택 받은 황제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검투사 시합은 폐지되었고신탁과 점이 금지되었으며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관례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또한 이교도의 조각상을 파괴하고 우상숭배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예수가 안치되었던 성지를 발굴하고 예루살렘을 영적인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아낌없는 자원을 투자했다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많은 군인들이 로마의 발 앞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으며 식민지에 대한 높은 조세를 부과할 때에도 현지인들의 많은 반감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콘스탄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은 로마와 그 주민들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들을 보호한다고 선언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그것은 쉽게 써먹을 수 있는 최상의 카드였다.(실크로드, 86p) 기독교 신앙은 이제 로마를 대표하는 신앙이 되었다

 

스텝 지대가 잠잠해지고 쇠퇴된 로마의 주 관심이 침범당한 지중해 지역 주들을 안정시키고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페르시아에게 기독교는 더이상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종교적 관용은 페르시아의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410샤 야즈데게르드1세가 페르시아에서의 기독교 교회의 지위를 공인하여 신앙을 합법화한 후페르시아는 조세 수입을 기반 시설에 투자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곳곳에 건설했다거대한 관개 시설과 급수시설로 농업 생산이 증가하자 부가 늘어나면서 사치품과 고가품의 장거리 교역이 활발해졌다“상품들은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카스피해 지역으로 운송되었고해로와 육로를 통해 인도를 오갔다스리랑카나 중국과의 교역량이 급증했고동부 지중해 지역과의 교역도 마찬가지였다.(실크로드, 106p) 페르시아 정부는 시장과 상가를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관료 조직을 구축했다. 5, 6세기에 걸쳐 페르시아는 경제적 부를 쌓는데 집중하게 되어 갈수록 융성해질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화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로마에서는 제국이 후원하고 페르시아에서는 통치자가 이를 점차 받아들이면서 기독교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지배 종교의 자리를 넘볼 수 있었다그러나 반대로 격렬한 내분이 터졌다…기독교는 교역로를 따라 흘러갔다…세계의 중심부는 언제나 소란스러운 곳이었고신념사상종교가 서로 가진 것을 주고 받는 장소였다…영적 권위를 둘러싼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실크로드, 99p, 107p) 구원의 가능성이 신앙 문제를 바로 잡는데 있기도 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회 지도부층의 권력 다툼과 교리에 대한 입장 수용과 채택에서 오는 위신에 대한 문제들로 인한 것이었다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동정녀 마리아의 지위성부와 성자의 위격에 관한 해석성직자의 임명 방식부활절 같은 종교 축제의 날짜 등에 대한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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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비잔틴 미술

 

동방에서의 치열한 종교 다툼에도 불구하고기독교가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종교와 관행과 가치관을 잠식하고 있었다기독교는 심지어 스텝지역의 유목민에게도 전해졌다. 6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깊숙한 지역인 바스라모술티그리트 등지에서 기독교도 주민이 급증했다메르브,군데샤푸르 같은 도시들과 심지어 중국으로 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라르에도 대주교가 있었다635년 중국에 간 기독교 사절들은 황제를 설득해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승인하게 했다…기독교는 아시아 각지로 퍼져 나가며 조로아스터교유대교불교의 세력을 꺽기 시작했다각 종교는 이 지역에서 언제나 서로 맞대결을 해야 했고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나 가장 경쟁력 있고 성공적인 종교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종교임이 드러났다.(실크로드, 113p) 

 

541기독교가 승리를 거두려는 순간에 우연이 끼어들었다페스트가 교역로를 통해 지중해 지역에 공포를 확산시켰다피해를 당한 곳은 동로마 제국만이 아니었다“재앙이 교통로와 교역로를 따라 확산되면서 페르시아령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닿았다.(실크로드, 118p)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다죽음의 규모는 상상하기 어려웠다하루에 만명씩 죽어나갔다한꺼번에 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생산성을 위축시키고 만성적인 경기 침체를 가져왔다

 

거듭된 군사 원정과 지출의 증가로 국고가 바닥나자 로마와 페르시아의 동맹에 적신호가 켜졌다친선을 유지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스텝 지역에서 몰려왔던 동맹들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인 노선을 취했다. 20년 동안 싸움이 이어졌고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다페르시아와 대치하는 동안 종교적 감정이 악화된 것 또한 중대한 문제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국가는 그들이 믿는 신의 강력한 보호와 축복 아래 보호받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페르시아의 호스로는 로마의 헤라크리우스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하나님의 무능을 조롱하는 편지를 로마로 보냈다이에 로마는 군국 체제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 광적인 신앙을 주입하여 제국 주변부 사람들의 지지와 충성을 얻을 목적으로 그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약속하며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그리고 국고를 늘리기 위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페르시아에 맞서 싸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황제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신에게 봉사하는 것임을 각인시켰다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로마 내부에는 잇단 반란이 계속되는 등 제국은 정신적 물리적 붕괴를 경험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또한 잇단 전쟁으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 이어지자 쿠데타와 내분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었던 페르시아에서는 기독교 주민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주교들은 경험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페르시아가 기독교와 싸울 경우 기독교도인들은 부역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수도 크테시폰에서 전염병이 발생하고 카바드2세가 죽자 조로아스터교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듯했다

 

이렇게 이슬람교의 등장은100년 동안의 혼란과 분열과 재앙을 겪은 세계에서 일어났다당시 메카는 인도양에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대상로의 요지였다.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이 모여 살았으며 이단으로 몰린 몇몇 소수파 교회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거주하고 있었다.이들로 인해 유일신 사상이 아라비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 및 그 결과로 나타난 군국화와 전쟁이 아라비아의 시장들을

파괴하면서 경제는 피폐해졌다이때 무함마드가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는 신의 경고와 함께 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는 파멸과 재앙이믿는 사람은 낙원을 볼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하기 시작했다그는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킬 때 단순한 영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전리품과 재물을 함께 분배하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경제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을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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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슬람교의 성공 요인이었던 아랍 통일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모았다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무장으로 상단을 습격한 것을 필두로 

로마의 공격으로 흔들리고 있던 페르시아의 남부 변경의 도시와 마을들까지 진격해 집어 삼켰다동로마 또한 갈릴리 호수 남쪽 야르무르 강에서 크게 패했다도시들은 차례로 항복했고 세계의 심장부는 이슬람을 향해 크게 열려 있었다그들의 승리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유일신을 믿는 구약 성경 이외에도 예수의 메시아 자격을 부인하는 등의 많은 공통점이 있었기에 유대교의 환대를 받았다이슬람군이 진군하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열광했다.그것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동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또한 이단으로 규정되어 공개적인 박해의 대상이 된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과는 다신교와 우상 숭배를 금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그들 간의 동지애는 강조되었고 유대교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지원은7세기 초 이슬람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부분의 동방의 주요 교통로와 교역로에 위치한 도시들과 군사적 위협을 받는 지역들은 차례대로 협상을 통해 항복 조건으로 안전과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보장받는 대신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자신들의 새주인을 인정하였다. 8세기 초에는 중국의 서쪽 변경까지 도달했다“도시들이 하나씩 칼리프 왕국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더 많은 자원과 자산이 중심부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교역로와 오아시스와 도시와 천연자원들이 표적이 되고 포획되었다페르시아만과 중국 사이의 교역을 연결하는 항구들이 병합되었고사하라 사막 횡단 교역로도 마찬가지였다.실크로드, 161p) 아시아의 중심부를 접수한 이슬람 제국의 풍요의 상징 바그다드에는 엄청난 부가 집중되었고 사상과 상품과 돈이 항상 넘쳐났다이러한 부와 번영은 놀라운 지적 학문의 시대를 이끌어냈다우수한 인재들이 부자들의 지원금으로 수학철학물리학,지리학 등의 학문을 연구했으며 의료 분야광학논리학신학첨문학점성학은 물론이고 그리스어페르시아어시리아어,산스크리스트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정략적으로 후원했다“학자들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이슬람의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경제 대국을 만들어냈다…이 세계는 질서가 뿌리내린 곳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지식인들이 존중받는 곳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이 되었다.(실크로드, 171p,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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