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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 2-권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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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8-02 17:53 조회2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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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 2018

권순예


십자군 전쟁의 발생 배경

 

셀주크인들이 노예 병사에서 막후 실력자로 자기 떠오른것은1055년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면서부터다. 이들은 개종을 선택하여 이슬람교를 아들였으며 그들의 거침없는 성장은 주변의 다른 유목민들을 들어 캅카스와 아시아에서 발칸 반도 깊숙한 곳까지 대담한 습격을 감행하게 했고 그들의 격 속도는 놀라웠다.


이에 동방의 방어벽을 강화하려던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는 스탄티노플에서 대군을 고 전하였으나 1071년  현재 터키 동부인 라즈기르트에서 셀주크 지배자 프 아르슬란에게 바닥에 눕히고 목을 발로 히는 굴욕적인 대패를 하게 되었다. 이때 셀주크 정권과 이집트의 티마 칼리프 정권 사이에는 예루살렘의 제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어 었고 이때 셀주크는 소아시아를 떠돌며 습격하고 화 조건으로 보상을 요구하는 고전적인 스텝 유목민들을 제거하고자하는 동로마와의 통의 이해로 인하여 관계를 수립하게 다. 이렇게 황제와 탄은 거의 20여년간 력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1090년 셀주크가 계위기에 지자 소아시아의 신흥지도자들이 바그다드로부터 립하고 있었고 이것이 동로마의 재난으로 다가왔다.


이에 황제는 유럽 전역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교황 르바누스 2세에게도 사절단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분열된 기독교의 지배권을 보하고자 바로 프랑스 부 클레르몽에서 교회 회의를 열고 기독교 기사단이 진군해서 동방의 교우를 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파했다. 한 소아시아와 인근지역의 란으로 순례길은 거의 막혔고 아나톨리아의 르크인들이 진군해오고 있다는 정스러운 소식은 동방 기독교인들의 고난을 생생히 보여주게 되었고 이에 우르바누스의 군대 동원령은 다란 반향을 으키게 되어 1096년 수만명의 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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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가를 고 성도 원정에 가하는 사람은 를 면죄받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 과정에서 싸우다 전사하는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관념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성지순례의 자유를 되찾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어났다. 이에 1099년 715일에 예루살렘이 1십자군 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 원정 전에는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관한 울한 예측이 나돌았으나 5년새 우트르메르에 (해외라는 의미) 새로운 기독교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 티로스, 티오티아가 유럽인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건 서유럽의 관습법에 라 통치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실제로 십자군 전쟁은 우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려 있는데 그 주역은 교황과 상인과 장자 상속에서 제외된 유럽 귀족들이다. 우선 교황은 1054년에 라진 그리스 정교회를 다시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는 전환점이 것을 기대했고 이로써 황제와의 알력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십자군의 영웅적 인물인 보에몽은 안티오티아와 주변 지역에서 동부 지중해 지역의 부와 권력을 적하는 발판으로써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이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자 이전에 동로마 땅이었던 도시와 영토를 두 동로마에 돌려주겠다는 속을 거부했다.


또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점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했다.

제노바, 사, 베네치아는 십자군이 성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선단을 바다로 내보내 시리아와 레스타인으로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에는 십자군은 보급이 절실하게 요했고  근거지인 유럽과 연결망을 갖추고자 필사적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 함대들은 예루살렘 새 지배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예컨대 새로 도착한 베네치아는 1100년의 아크레 위전에 참여하는 가로 십자군이 점령하는 모든 도시에 교회와 시장 한 곳씩 둘 것을 약속 받았고 전리품의 3분의 1을 받으며 모든 세금을 면제 받기로 했다. 또한 제노바인들은 1101년 카이사레아가 포위되었을 때 유리한 교역 조건과 더불어 청나게 은 전리품을 확보하게 되었다.


3년 에는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1세가 제노바인들에게 포괄적 면세조치와 더불어 종 법적, 상업적 권리를 제공하면서 더욱 강화되엇고 사형을 당할 죄를 저질러도 치외법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카이사레아 3분의 1, 아르수프 시의 3분의 1, 아크레의 3분의 1을 도 받았고 아울러 세금 수입의 상당 부분을 받았고 군사적 지원을 해주면 연공을 지불하고 전리품의 3분의 1을 주겠다고 했다.


이런 엄청난 보상은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사이에 극심한 경쟁을 발하였고 이들 도시국가들의 이전투구는 포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119년에 아제르상귀니스(피의 판) 전투에서 서방 기사들의 대군이 궤멸되자 독립 십자군 국가로서의 안티오티카는 베네치아 도제(국가원수)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했고, 베네치아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강력한 이 모아졌으며 “모두가 기독교 세계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 였으며,  더 중요한 것은 보두앵 2세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새로운 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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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베네치아는 확실한 승자가 되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새 황제 요한네스 2세가 20여년 전 베네치아에게 주었던 특혜갱신을 거부한 데한 보복으로 함대를 동쪽 안티오티카로 보내는 길에 르푸 을 포위 공격하여 특혜 갱신을 받아 내었다.

또한 베내치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서방 지도자 들에게 대출을 해주므로써 막대한 이자를 내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왕령 남작령 도시들에서 교회 하나와 상당한 면적의 구역을 받았으며 매년 연공을 받게 되었다. 또한 티로스가 1124년 포위전 에 함락되자  에루살렘 왕국 전역에 적용되는 방대한 특혜를 얻음으로써 이 지역의 강자로 변모하였다. 

 

1144년에는 에데사를 무슬림에게 빼앗기자 유럽 전역에서 원군을 성하여 원정에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2차 십자군으로 이어졌다. 증원군은 카이스마 치는 클레르보의 배르나르가 이끌었는데 죄를 사면해준다는 말과 순교하면 구원받는다는 말만으로는 동방으로 갈 사람들을 모을 수 없음을 알고 “상인과 하루빨리 거래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엄청나게 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치지 마십시오!” 라며 증원군을 모집했다고 한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8차까지 이어졌는데 그중 가장 추한 전쟁으로는 1204년 출발한 십자군에게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송용 선박을 대주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플부터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전투 전날 주교들은 전쟁이 “정당한 것이며 그들은 림없이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고 서유럽 사람들을 안심시켰고 사제들은 동로마와의 교리분쟁을 언급하면서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이 공격을 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동로마인들은 “로마법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선언했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개라고 불렀다”는 게 또다른 십자군 원정의 이유였다. 그들은 동로마인이 유대인보다 나쁘다고 십자가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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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의 재물들은 서방 사람들이 벌인 광란과 약탈로 인해 서유럽 전역의 교회로 성당으로 수도원으로 그리고 개인 소장처로 반출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서유럽 도시국가들의 동방과의 연결점 마련이라는 이해관계가 고조에 이른 열망을 반영한 사건인 것이다. 그 뒤에도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지만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는 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피사, 제노바, 베네차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필두로한 유럽인들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 도시, 섬들을 점령하는 일에 어 들게 된다.

 

위에서 살펴 것과 이 종교의 이름으로 치뤄진 십자군 전쟁은 사실은 교황과 황제의 알력관계, 팽창의 열망으로 가득찬 서유럽 귀족영주들, 그리고 동방과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자하는 서유럽 도시국가들의 열망이 어낸 전쟁임을 알 수 있다. 십자군들은 이런 세력간의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없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건 원정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100년 동안 르시아제국과 동로마제국의 이지 않는 각축 속에서 아라비아 시장들이 파괴되고 경제가 피폐해지자 이런 상황을 심판의 날이 다가온 것이며, 믿는 자는 원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파멸과 재앙이 온다는 리로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을 모아 정복을 해 나갔던 무함마드의 정복전쟁 논리와도 아주 사함을 발견하게 되며 이는 고대의 로마와 페르시아의 제국 팽창 전쟁의 정당성을 종교적 이유에서 찾았던 것과 다르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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