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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로 가는 길

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 2-정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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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8-07 17:02 조회2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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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 2018

실크로드, 6-10

정에스

 

실크로드-2

 

동방의 패권을 거머쥐고 경제대국을 이루어낸 이슬람은 자신들의 나라를 질서가 뿌리내린 곳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지식인들이 존중 받는 곳,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만들어냈다이슬람 세계의 물질문명의 꽃인 바그다드와는 대조적으로 (적어도 이슬람의 눈에는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북쪽 스텝 지역은 야만인들의 이상한 풍습으로 가득찬 변경 지역이며이슬람교가 확장해 들어갈 수 있는 공백이자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주민들을 문명화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이 유목민들 사이에 퍼져있던 샤머니즘과 애니 미즘은 남쪽 이슬람들과의 교역을 통해 이슬람 교리와 점차 융화되어 갔다이슬람은 스텝 지대로부터 많은 생산물들을 공급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했던 것은 높은 신분의 상징으로 인기가 많았던 모피 교역이었다무슬림 상인들은 스텝 지역에서 검은 담비회색 다람쥐흰 족제비밍크 여우담비비버얼룩 토끼 등의 짐승의 가죽과 털을 수입했다.

 

스텝 지역의 패권은 북해와 카스피해 북안 일대를 지배하던 하자르로 알려진 튀르크 종족 집단에게 있었다무슬림의 대규모 정복 전쟁을 상대로 벌인 군사적 저항으로 점점 유명해지면서 폴라니 족라드미치 족시베리아니 족 등 하자르의 패권을 인정하면서 그의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오랫 동안 안정과 평화가 계속되면서 교역 규모가 늘어나고 장거리 교역이 필요해짐에 따라 여러 정착지들이 소규모 도시로 변모했다하자르가 국제적인 교역 중심지로 떠오르자 스텝 지대와 이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중심지가 되었다하자르를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 상인들이 장거리 교역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지중해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인도와 중국을 정기적으로 여행하면서 사향,침낭장뇌계피 및 다른 동방의 산물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역과 부를 쫒아 바이킹 루시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스텝 세계와 바그다드의 칼리프 정권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오데르 강네바 강볼가 강,드네프르 강 등을 따라 정착지를 만들고 자기네 시장을 늘려 나가면서 새로운 교역 장소들이 생겨났는데 스타라야라도가,류리코보고로디셰벨로오제로노브고로드 등이 거대한 유라시아 무역로를 북부 유럽의 먼 변경까지 잇는 새로운 거점들이 되었다그들은 밀랍,호박비단 등의 교역에 종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은 8세기에서10세기 사이에 기본 판매 상품이였던 노예였다.

 

지중해와 아랍 세계에서는 노예가 사회의 필수품이었으므로 상품 중에서도 그 시장의 규모가 매우 방대하였다바이킹 루시들은 지역 주민들을 약탈하고 무자비하게 끌고 갔는데그 당시 노예로 돈을 벌려는 욕망은 너무도 강렬해서 심지어는 현지 지배자가 새로운 지역을 약탈하여 포로로 잡아도 좋다는 허가를 내줄 정도였다.노예 무역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루시만이 아니었다유대인 상인들 역시 어린 소녀와 소년들의 매매에 깊숙이 관여했다북쪽 스텝 뿐만 아니라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과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계 종족들 그리고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노예의 대상이 되었다그 당시 많은 노예들이 스칸디나비아로 끌려 갔는데 그보다 아랍권의 시장은 수요가 훨씬 더 컸었다기록에 의하면 이슬람의 칼리프와 그의 아내가 각기1000명의 여자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4000명은 된다는 기록이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노예 교역과 사람들의 고통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여 중세 지중해 지역의 가장 화려한 보석 가운데 하나로 변신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드리아 해 북쪽 끝에 위치한 베네치아였다베네치아의 성장은 단기적으로는 보헤미아와 달마티아 등을 습격하여 비기독교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일을 함으로써 시작 되었다.그러나9세기 말 경에 이르면 그들은 자유민이든 기독교든 아니든 이웃 나라의 신민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 넘겼다.  

 

300년 가까이 안정과 풍요를 누리던 이슬람의 오랜 번영이 중앙과 변방 사이의 연계가 느슨하게 되자 지역 실력자들이 서로 힘을 키우고 충돌을 빚으면서 마찰하기 시작했는데10세기 말에는 바이킹 루시가 서부 스텝 지역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또한920년대에서960년대 사이에 이례적인 흉년이 계속되자 식량 부족으로 이슬람 내부는 심각한 불안이 계속되었다이를 틈타 부와이흐라는 새 왕조가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칼리프는 명목상의 이름으로 남게되었다이러한 칼리프 왕조의 불안과 불확실성은 동로마에게도 기회를 주었는데10세기 전반에 크레타와 키프로스가 탈환되어 지중해 동부와 에게해 지역이 안정을 찾았고969년에는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직물 생산의 중심지인 대도시 안티오키아가 점령되었다.이러한 운세의 역전은 기독교 세계의 부활로 이어졌으며 칼리프 왕조에게 흘러들어가던 세금과 공물이 바그다드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대거 이동하여 동로마 황금기의 시작이 되었다

 

서유럽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예수가 살고죽고부활한 땅을 방문하고자 하는 관심이 증가했다예루살렘과 콘스탄틴노플은 기독교의 본향과 그 수호자로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끌어 들였다.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영국이탈리아프랑스독일등 유럽 전역에서 온 젊은이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많은 사람들이 교역을 하거나근무를 하거나,순례를 위해 그곳을 지나갔다키예프스칸디나비아,아이슬랜드에서 온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또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피사아말피제노바에서 온 상인들은 물건을 사서 고국으로 보내기 위해 이 도시에 정착지를 건설했다도시 성장의 열쇠는 동방과의 거래에 있었다.바로 크림 반도 북쪽의 헤르손과 노브고로드 같은 실크로드와 연결 된 도시들이었다어느 경우든 힘을 가진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은 동방 교역과 높은 가치를 가진 상품에 대한 접근성이었다

 

무슬림의 정복과 중앙 아시아로의 팽창에 의해 확립되었던 국경이11세기에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중앙 아시아 각지의 여러 무슬림 왕조들과 바그다드의 칼리프 정권은 스텝 지대 사람들을 노예 부대의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특히 튀르크 종족 출신의 병사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었는데 점차 용병들 자체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 중 고위 장교들이 권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결국11세기 초에 가즈니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국이 튀르크 노예 장군의 후손에 의해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카라한 왕조 또한 옥수스 강 북쪽에 영토를 얻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것은 구즈족 무리에서 나온 셀주크인들이었는데1020년대 말에서1030년대 말 사이에 메르브네이샤부르발흐 등 도시들을 항복시키고 통제권을 가져간 것을 시작으로1055년에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이슬람의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버렸다

 

한편 동로마는 취약한 지방 경계를 방어하기 위해 셀주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소아시아를 떠돌며 습격하는 무리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1090년대에 셀주크가 승계 위기에 빠져 허우적대자 아시아의 신흥 지도자들은 자기네 영토를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고동시에 동로마는 그들로 인한 크고 작은 재난으로 급격하게 흔들렸다제국의 힘만으로 그들을 모두 견제하기에 역부족이었던 동로마는 결국 교황 우르바누스2세에게 사절을 보내 이교도에 맞설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2세에게 있어서 동로마로부터의 구원병 요청은 기독교계의 오랜 종교적 논쟁을 종식시키고 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부와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 절호의 찬스였다. 1095그는 클레르몽에서1차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유럽의 기독교 기사단이 이교도에 맞서 성지 예루살렘과 교회를 지켜내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밝혔다. “교황 우르바누스2세는 십자가를 메고 성도 원정에 참가하는 사람은 죄를 사면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이것은 원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교도와 싸우다 전사하는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관념으로 진화했다.” (실크로드, 235p) 우르바누스2세의 군대 동원령은 유럽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096원정대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노르망디프랑스플랑드르로부터 수만명의 남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1099년 예루살렘이1차 십자군에게 함락된 이래로 교황은 계속해서 유럽의 기사단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바로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계속해서 성지를 수호할 의무를 상기시켰다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 점령 이후 여러 위험한 상황에 처해 보급이 절실해졌고 근거지인 유럽과의 연결망을 구축하고자 필사적이었다원정에 참여해 달라는 교황의 호소에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인 제노바피시베네치아는 십자군을 통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하였다전쟁에 참여하는 댓가로 그들이 얻은 것은 유리한 교역권과 법적상업적 권리 그리고 전리품의1/3을 지급 받으며모든 세금의 면제치외법권 등이었다.그들은 이러한 막대한 혜택과 이익을 거머쥐고 그동안 무슬림들의 통제 아래 있었던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그 중에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무슬림이 차지하고 있는 항구들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 유지비를 대출해 주었던 베네치아가 예루살렘 전역에 이르는 방대한 특혜를 받음으로써 지역의 강자로 떠올랐다십자군과 상인들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세계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라는 표어를 내세웠지만사실상 그 뒤로는 현실정치와 맞닿은 엄청난 돈줄과 영적인 것이 함께 결합되어 교묘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과 부에 대한 유럽의 열망은 같은 기독교들의 도시인 자다르(지금의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티아에 있는 도시)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악랄하게 약탈함으로서 명백하게 가시화되었다무슬림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려던 충차와 투석기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도시를 파괴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처녀들이 강간당하고 죄없는 자들이 창칼에 희생되었다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재물들과 귀중품,무수한 유물들이 서유럽 전역의 교회로성당으로수도원으로그리고 개인 소장처로 반출되었다언제나처럼 사제들은 경제적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교리분쟁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약탈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11세기에서13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루어진 십자군 전쟁은 중세 서유럽 사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독보적인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지닌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로 떠올랐다그리고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공통 분모라는 생각이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잇따라 출전한 십자군의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수복의 꿈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거듭날 것이라는 원대한 꿈은 좌절되었다기독교 기사들이 비틀거리며 지나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만이 오직그러한 현실을 이용하고 간단히 적응하였을 뿐이다

 

12세기가 지나는 동안 이슬람 정권이 내부 정권 문제와 더불어 기근등의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그 시기를 틈타 무슬림 주변의  작은 부족들과 국가들이 일어나 이슬람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그 즈음주위 부족들을 차례로 타협과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초원의 강자로 떠오른 이가 바로 몽골의 징기스칸이다몽골은 키르기즈오이라트위구르 등 중국 서쪽 중앙 아시아의 민족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네이샤부르헤라트,발흐메르브 등에 이어 러시아와 유럽그리고 중국티베트북인도파키스탄,한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이는 후에동아시아와 지중해가 처음으로 서로를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이 몽골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조망하는 관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개 한마리고양이 한마리도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살아있는 것을 모두 도륙하는 잔인성으로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명성을 얻었다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자기네가 점령한 일부 도시에는 기반시설들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였다도시에 돈을 대거 투입건설하여 예술기술,생산에 대한 지원을 하고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또한 위구르를 병합 한 후에는 그들의 높은 문화적 수준에 감응하여 위구르의 서기와 관료들을 몽골 궁정에 대거 등용하기도 하였다

거대한 영역이었던 만큼 몽골이 세계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했다부족 지도자들 사이의 긴장과 경쟁은 물론 존재하였으나 그것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상업 문제에서 만큼은 어느 지역에서든 강력한 법으로 상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하는 도로망을 구축했다그러므로 전에는 위험한 지역이었던 곳을 아무리 많은 돈과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혼자서 여행할지라도 상인들이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해양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국제 무역에 대한 낮은 세금을 유지하고 주요 거래 품목에 대한 세심한 가격 설정으로  교역을 더욱 활성화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이 몽골에 의해 통합되자 해상 교역망이 크게 확충되었다그 중에서도 페르시아만 같은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이 높은 지역과 중국의 광저우만남중국해수마트라 섬과 말레이 반도남인도 서부의 말라바르 해안 등이 해상 수출입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의하면이 시기 동방의 셀수 없을 정도의 많은 진귀한 보물과 값지고 신비한 물건들 등 그 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였고 이에 매료된 많은 상인들은 아시아와의 연결점을 마련하고 독자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또한 몽골은 신앙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관대함을 보였다.정복지의 민족 정체성은 말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면에 이슬람 및 기독교와 불교도의 예배의식에 크게 감동되어 그들의 종교에 크게 고무되었다

 

사실상몽골의 성공은 무분별한 만행이 아니라 정복지의 형편에 따라 타협하고 조정하는 그러한 세심함과 협력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러한 중앙 통제력과 중계 역참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통치하며 이후 수백년 동안에 해당하는 찬란한 번영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몽골의 정복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교역이나 전쟁문화나 화폐만이 아니었다바로 질병이었다. 14세기 중반가축과 유목민들의 근거지인 유라시아로부터 페스트가 발생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서아시아,유럽이집트아프리카를 휩쓸면서 하루에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를 토하고 흉칙한 모습으로 죽어 나갔다전병병은 곧 교역로를 따라 메카와 예루살렘 등지에 도달하여 순례자들과 학자를 죽이고 영혼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보았다주교들은 단식과 기도,그리고 맨발에 말총 차림으로 거리를 행진하며 회개의 표시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였다무슬림들은 특정 기도문을 외우거나 무함마드의 생애를 언급한 시를 읊조리면 종기가 나지 않고 페스트로부터 안전함을 보장 받을 것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성관계 및 모든 육체적 욕망과 쾌락은 물론이색적이고 노출이 있는 옷들도 천벌을 받을 일이기에 금기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페스트의 창궐은 그것이 불러 일으킨 공포에 비례하여 유럽에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방이 대두하고 세계의 중심이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먼저페스트 이후 만성적 인력부족 문제가 대두되었다너무도 많은 인구하락으로 인해 하인과 기술자와 농사꾼노동자들이 부족해지자 사회 경제의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해 있던 하층민의 임금이 오르고 임대료가 내려갔으며 그들의 의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농민들과 도시 노동자그리고 여성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이에 짝을 맞춰 유산 계급의 힘은 약화되었다이에 사회전반에 부가 고르게 분배되고 과거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계층에서 필수품만 아니라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 것은 옷이었는데 이로 인해 유럽의 직물산업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반면 서아시아 시장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방의 경제는 활기를 띠었다많은 부가 서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를 과시한 것은 베네치아 였는데 보통 상인들의 집들도 천장을 금으로 도배하고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 정도로 사치품들을 소유했다.이렇게 페스트는 결론적으로 북서 유럽의 장기적인 번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18세기 산업 혁명의 뿌리가 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14세기 중반몽골의 원 왕조를 대신하여 명나라가 들어서고15세기를 지나면서 중국은 부패한 관리들의 만연과 정부의 무능으로 나라 경제를 다스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기근과 가뭄잇단 홍수 등의 환경적인 영향으로 인해 경제는 바닥을 쳤고 음식과 물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이 벌어져 혼란의 시기로 이어졌다이러한 상황은 스텝 지역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침체와 궁핍적나라한 생존 경쟁으로 점철된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14세기 말투르족의 하나인 오스만이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몰려가서 동로마와 불가리아세르비아인들을 크게 물리치고 트라케와 발칸 반도에 자리를 잡았다콘스탄티노플은 또다시 유럽 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1453년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었다이슬람 세계는 이렇게 다시 한번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이에 따라 기독교 내에서는 다시 한번 세상의 종말과 아마게돈을 말하며 문화적,종교적으로 편협한 태도가 대두되었다유럽에서 자리잡았던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무력에 의해 쫒겨나가거나 개종과 처형 중 하나를 강요당했기에 어쩔 수없이 오랫동안 다져온 자신의 터를 떠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광신과 종교적 근본주의가 유럽 사회에 점차 만연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사회의 특징으로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했다.

 

실크로드가 내게 말해주는 것들-2

 

길은 오직 하나가 아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뀔 수 있는 것이 길이다실크로드 또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다양하게 변모해왔다중앙 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쥐는냐에 따라 실크로드는 수시로 그 모양을 달리하며 오랜 역사의 시간들을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다때로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끝없이 펼쳐진 고원으로상점들과 각종 기반 시설들이 즐비했던 강 하류에서 상류로또 때로는 바다를 통해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싱싱하게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말이다.

 

몇달 전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결의안 국제법인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로도 지정하지 않았던 규정을 어기고 이스라엘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전격적으로 이전하는 일이 있었다미국의 이러한 행동은 예루살렘 성지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공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예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은 언제나 전쟁과 폭력그리고 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예루살렘은 성지이기도 하지만 순례를 위한 많은 여행자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상업 도시로서의 큰 역할을 해내는 곳이기에 많은 이문이 걸려 있음 또한 자명하다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그리고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이다그곳은 유대인인들과 서방 기독교도들그리고 이슬람인들에겐 절대적으로 자신들이 차지해야할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중동 지역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음이다

 

예루살렘 성지는 히브리어로 평화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그러나 오히려 그곳은 지옥의 집이라고 불러야 할 듯싶다십자군 전쟁 때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무력으로 점령하고그 후 유다가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함락시켰을 때 조차도 그들은 늘 종교적 이념과 자신들의 정통성그리고 순수의 깃발을 내세웠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강도도둑질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도 모르겠다중동 지역의 그 끊이지 않는 분쟁의 시작은.

총칼에 쓰러져 죽어간 이들의 피가 흐르는 땅이 말 그대로 풍요의 상징인 젖과 꿀석유가 흐르는 땅으로 불리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실크로드를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인의 박해가 히틀러에 의해 이루어진 홀로코스트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 때에도그리고 유럽에 패스트가 온 전역을 휩쓸던 당시에도 기독교의 이념 아래 반유대주의를 외치며 독일에서는 그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었다여러 민족 중에서도 유독 유대인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실크로드를 보면 유대 상인들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적인 잇점을 점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었고, 유럽의 역사에서 여러차례 입증되었듯이 무역의 가장 큰 돈벌이였던 노예 무역특히 어린 아이들을 파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었다고 한다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혹은 세익스피어의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의 캐릭터가 그들 모두를 대변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도하게 과장된 것만도 아니리라 여겨진다

 

나와 다른 종교는 왜 나의 적이 되는 것일까. ‘와 우리는 한편인데 는 다른 편이라는 식의 논리각자 서로의 종교를 이해해주고 다름을 인정할 순 없는 것일까서로 다른 이념,서로 다른 종교서로 다른 사회그리고 가치

다르다는 것은 단지 개성적인 것일뿐 나쁜 것이 절대 아닐진대 인간은 왜 다름을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걸까어찌 보면 중동의 이슬람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끝없는 인간의 탐욕만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로 작용하게 되는 걸까꼭 피를 봐야만 역사는 돌아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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