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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4-권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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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9-18 22:06 조회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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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예

Sep 4, 2018

 

실크로드 세계사

피터 프랭코판

 

19장 밀의 길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이후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교역은 거의 단절되었다. 베르사이유 평화협정에 따라 1914년 이전에 러시아 땅이었던 곳을 폴란드에 주었고 폴란드는 1917년 이후 군사행동을 취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위협했었다. 소련 독일 비밀협정 2년 전 스탈린은 폴란드 군사기구의 스파이 네트웍 근절을 요구한 명령에 서명했으며 이에 따라 수만명이 체포되고 5/4 이상이 총살되었다. 

 

이렇듯 러시아에 있어 폴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후 혐오의 대상이었다. 거기다 소련은 1930년 초의 처참한 기근과 붉은 군대의 궤멸이라는 국내 상황 하에서 경제적 정치 군사적 재건을 위한 숨 돌릴 시간도 필요했다.

한편 독일은 장기적으로 힘과 세력있는 위치를 구축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불가결했는데 문제는 독일이 대서양에 접근하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와의 교역에 나서기에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소련과 화해한다는 결정의 배경에는 그것이 독일만의 실크로드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리라는 계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스탈린과의 협정에 의한 폴란드 침공은 히틀러에게 곡물, 소, 석탄, 납, 아연 같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양국의 상황에서 독일의 폴란드 관련 협력 문의에 대해 스탈린은 긍정적이었다. 이에 1939년 봄 폴란드를 분할하여 두 나라가 나누어 가지는 비밀협정을 맺게 된다.

 

한편 영국의 참모본부는 ‘1940년 소련과의 적대가 미치는 군사적 영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소련 정부가 인도 및 아프카니스탄에서 행동을 취할 것이 예상되고 독일과 소련의 협력이 연합국에 심각한 해를 끼칠 것이며 영국이 이란과 이라크에서 석유를 통해 얻는 이득이 위태로워지거나 사라질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적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독일은 이란과 이라크에서도 관계 구축 작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는데,  나치스 정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이란의 일부 지도급 이슬람 학자들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페르시아가 언어와 풍습을 정화하기 위해 채택한 프로그램 및 반신화적인 황금시대로 돌아가자는 노력은  공통분모가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의 이슬람법 해설자 무프티암인 무함마드는 히틀러의 등장을 환영했다. 

 

이라크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의 기반도 나치스의 선전과 부활 사상에서 많은 것을 끌어왔고 그후 히틀러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압둘아지지 1세의 사이에 의미있는 교류를 나누었다. 이런 정세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계획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히틀러가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자 좌절되었다.

 

1939년 소련과 독일의 비밀협정은 세계의 미래를 베를린에서 소련을 거쳐 아시아와 인도아대륙 깊숙이 이어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향 수정은 소련의 끊임없는 소련의 독일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취약점이 있었고 폴란드 침공 후 몇달 동안은 독일로 상품과 물자가 흘러들어 갔지만 갈수록 수요가 많았던 밀과 석유 협상은 순조롭지 않게 진행되었다.

 

이에 1940년 7월에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한다는 새로운 모험을 발표하면서 문제의 근원은 원자재와 식료품 보급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슬라브인에 대한 경멸과 볼셰비즘을 제거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위장했고 마침내 1941년 여름 소련침공의 암호명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20장 대량학살로 가는 길

 

히틀러와 그 측근들은 독일의 자원기반 확장에 두나라를 모델로 삼았는데 그 하나인 영국은 Raj를 통해 소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규모 인구를 지배할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모델이었고 또다른 하나인 미국은 현지 주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한 모델로 삼았다. 

 

독일군은 1941년 6월 22일  새벽  가차없고 파괴적인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민스크 함락, 브레스트 함락, 오래지 않아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과 현주민들 1300만명 이상이 도로건설, 농사, 공장의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여름이 지나면서 9월에는 50만명 이상 소련군 병사들이 사로잡히고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10월이 되자 모스크바가 위험에 처했다. 

 

11월에는 캅카스로가는 요충지 로스토프나누도 함락되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독일로 자원을 보내도록 지정된 거의 모든 지역이 반년 안에 정복되는 등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소련과 영국과 미국 연합국은 어울리지 않은 동맹자가 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소련에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느냐였다.

소련은 블라디보스톡 이외에 적당한 항구가 없고 태평양의 부동항들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주시하게 되었다.

이란의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현지 독일요원들과 동조자들의 발판 마련을 제지할 수 있고, 연합군에게 귀중한 천연자원을 보호할 수 있으며 독일 국방군의 동방 진군을 저지, 중단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에 부합할 뿐 아니라 영국과 소련에게 이란 점령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자원, 전략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1941년 8월 영국군이 이란을 침략했고 동시에 소련군도 움직였다. 영국은 샤에게 독일국민을 즉각 축출할 것을 요구했고 머뭇거리자 레자 칸을 강제 퇴위시키고 아들 모하마드 레자를 대신 왕위에 올렸다. 이에 이란인들은 그런 외부의 간섭을 참을 수 없어했고 자기네 나라가 유럽 열강 사이의 다툼에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을 초조히 지켜 보았다.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소식들은 한없이 좋아 보였으나 현실은 상당히 달랐다. 

우선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침략 시작 이후 처음 두달 동안 전투에서 병력의 10%를 잃었고 9월  중순이 되자 부상 자는 50만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등 죽는 병사 수가 예비대 병력 수보다 훨씬 많았다. 너무 빠른 전진 역시 보급선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고 이는 콜레라와 이질의 발병으로 이어졌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도 북아프리카를 시리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과 연결한다는 초기의 낙관론과 달리 점령은 고사하고 의미있는 진출도 이루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필로폰을 대량으로 나눠주었다.

 

심각한 석유 보급의 문제와 더불어 소련 남부 점령지인 무궁무진한 곡식 창고라는 우크라이나와 남부러시아는 본국의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는 커녕 소련의 초토화 전술에 의한 대부분의 물자 파괴로 환상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독일은 이 동방원정으로 아무리 영토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약속했던 것은 고사하고 필요한 것조차 얻는 데 실패했다. 독일은 식량부족과 기아로 수백만명이 죽을 것을 예측하고 1941년 9월 16일 약하거나 부상이 심해 노예노동을 할 수 없는 ‘ 일하지 않는’ 전쟁포로에대한 음식물 공급을 중단했으며 한달 뒤에는 ‘일하는’ 포로에 대한 식량공급이 이미 줄어든 상태에서 추가삭감을 했고 결과는 330만명 소련군 포로 가운데 1942년 2월까지 200만명이 대부분 굶어 죽었다. 또한 이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아우슈비츠와 작센하우젠에서 전쟁포로 수백명씩 모아 살충제 실험을했고 일산화탄소 중독의 영향도 실험했다. 

 

침공이 개시된지 몇 주만에 시작된 대량학살은 독일의 공격 실패와 경제적 , 전략적 계획의 좌절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많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독일  사회의 각계각층과 언론, 대중의식 속에 두 악마가 생겨났고 슬라브인을 종족적으로 열등하고 변덕스러우며 고통과 폭력에 대한 수용력이 강한 민족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쟁 전에 꾸준히 개발되어 온 것이며 이런 비방은 1939년 독일 -소련 협정으로 다소 누그러졌다가 소련 침공이후 다시활개를 치며 소련인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반유대주의는 전쟁 전 독일에서 더욱 깊이 배어들었는데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새벽까지 유대인들을 상대로 벌인 ‘수정의 밤’은 유대주민들을 ‘다른 민족들의 살과 생산물과 노력을 먹고 사는 기생충’이라던 독설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1930년대 말 이후 파리에서는 경찰이 유대인과 비유대인외국인을 비밀리에 등록해 왔고 추방과정이 훨씬 수월했다. 네델란드 같은 다른 점령된 나라에서도 유대인 등록은 제도화된 광범한 나치스 반유대주의프로그램의 일부였으며 소련 침공으로 이루려 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나치스 지도부는 독일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1942년 1월 20일 유대인 인종청소라는 최종 해결책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 대한 반격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탱크, 비행기, 무기와 보급품들이 런던과 워싱턴에서 모스크바로 수송되었다. 한동안은 히틀러의 도박이 성공하는 듯 했으나 독일군은 끊임없이 베를린 쪽으로 되밀리면서 점령지가 하나씩 손에서 빠져 나갔다. 

 

1942년 여름에 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충격을 받아 행동에 나선 미국은 1942년 중반 무렵 미드웨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태평양 지역에서 공세에 나설 수 있었고 이듬해 초부터 북아프리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에 그리고 나중에 유럽의 다른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부대 역시 전쟁의 흐름을 돌릴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1942년 봄 독일군이 남부 러시아를 휘돌아 제3국 전쟁 계획의 중심이 된 캅카스 유전을 확보한다는 ‘청색 작전’을 승인했다. 이에 볼가 강 굽이에자리잡은 스탈린그라드를 무력화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캅카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격은 늦게 시작되었고 인력과 군수품, 갈수록 귀해지는 연료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대량으로 소모되는 등 금세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가을이 되면서 소련의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42년 말이 되면서 새로운 연합군인 미국, 영국, 소련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으로 옮겨가서 1943년 테헤란에서, 1945년 봄 얄타에서, 그리고 몇달 뒤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었다. 1944년 10월에 처칠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전후 유럽의 운명에 관해서는 공식 기록에 삭제 되었으나 여러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1939년 영국 하원이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폴란드 영토 보전은 포기되었고, 폴란드의 3/1은 독일 땅으로 옮기고, 3/1은 소련에 속하게 되었으며 나머지3/1은 독일이 점령했지만 직할령으로 삼지 않고 총독을 두어 통치하는 ‘폴란드 총독부’가 되었다. 처칠은 또한 중부유럽과 동유럽 나라들에 대한 분할도제의했는데, 루마니아는 90대 10으로 영국이 우위를 갖고 그리스는 그 반대로 했으며, 불가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는 50대 50 분할이 적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유럽 전역에 드리워진 폭압을 걷어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철의 장막’을 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둘로 쪼개졌고 단지 악독한 나치를 물리친 성과만을 가지고 기뻐했다. 독일은 전쟁 패배로 인해 만성적인 체질 약화를 불러왔고 영국 프랑스는 경제가 피폐해졌으며 네델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경제가 붕괴했다.  

 

이런 혼란은 광범한 핵무기 연구를  수반할 수 있는 군비경쟁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직접적인 대결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로 이어졌다. 소련군은 유럽에서 다른 연합군에 비해 4대1의 수적 우세를 보였고 탱크 배치의 이점도 확보하고 있어서 독일 항복 이후 새로운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만연했다.  그 결과 처칠은 히틀러의 패배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한 국면이 끝났을 뿐이라는 전제하에  ‘operation unthinkable’라는 비상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억압이라는 정치적인 적을 하나 설정해서 스탈린이라는 새로 맞아들인 친구의 잘못과 실패에 대해서는 얼버무리는 것이었고, 서유럽은 자기네의 잘못과 현실정치라고 설명되는 결정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민주주의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전쟁이었다. 

1914년 서유럽의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떠오르고 있었고 그 과정은 1939년-1945년의 전쟁과 함께 가속화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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