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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4-정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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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9-19 18:41 조회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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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스

Sep 6, 2018

 

실크로드 세계사

피터 프랭코판

16-20

 

실크로드 세계사-4

 

1차 세계 대전이 발발된 요인에는 유럽 열강의 이익들이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있기도 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동아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석유와 송유관에 대한 통제권에 있었다중동 지역에 막대한 석유 광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다근대 서구인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석유를 발굴하기 훨씬 이전인 4000년 전부터 중동 사람들은 석유의 존재를 알고서 연료의약품무기 제작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며또한 고대 말기에는 동로마 작가들이 메디아 화염에 대해 자주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1850년대에 이루어진 첫번째 지질 조사에서 상당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옴에 따라 돈을 벌려는 투자자들이 중동으로 너도나도 모여들고 있었다이번 글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를 즈음하여 석유를 중심으로 어떤 실크로드가 형성되었고그리고 그 길을 따라 무엇이 흘러들고 나갔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 식민지의  총독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가 파산할 위기에 이르자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이러한 조치는 아메리카를 극도로 분노하도록 만들었다보스턴에 홍차를 싣고 온 배들의 입항을 거부하고 홍차를 바다에 모두 던져버리는이른바 보스턴 티 사건이라 불리는 일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미국의 독립선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그러나 식민 사업은 단순히 욕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자 동아시아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져갔다특히영국은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완전히 확립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였는데,그 이유는 헤아릴 수 없는 부의 원천이며미래산업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킬 검은 금 즉석유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다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영국 해군의 지원과 비호 아래 투자자 녹스 다시는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서60년 동안 석유와 천연가스를 탐사채굴하고판매와 운송까지 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얻었다페르시아의 석유 채굴권은 샤와 그 핵심 관료들의 배를 불릴 상당한 돈을 증여받는 것으로 대체되었다이것은 사실상 석유에 대한 무제한의 권리를 이양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엄청난 부의 원천인 석유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 부족과 그것을 채굴할만한 자본과 기술이 없음으로 인한 페르시아의 그릇된 선택이었다.

 

녹스 다시 일행은 이후 몇 년간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유 찾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철수하는 듯 하였지만1908마스제드솔레이만의 두개의 시추공이 단단한 바위를 뚫고 결국 석유 주맥을 때림으로써 엄청난 발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이러한 발견은 콜럼버스가1492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와 동일시된다당시에도 막대한 보물과 재산들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었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첫번째 유전과 샤트알아랍 강의 아바단 섬을 잇는 파이프 라인이 곧 건설되었다그 파이프 라인을 통해 페르시아의 석유를 페르시아만으로 실어나르고 그곳에서 유럽으로 수송한 뒤 팔게 되는 것이다이 파이프 라인은 후에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파이프 라인망의 첫 번째 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의 에너지 수요는 급증하고 있었다또한 영국 해군은 석유를 동력으로 자국 군함이 무장되면 그들의 식민 사업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판단하였다제국 신민지에 대한 서방 세력들의 잇권에 대한 분쟁이 전쟁으로 확대되어가는 어수선한 유럽의 정세 속에서1914년 여름영국 정부는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의 다수 지분을 확보함과 동시에 자국 해군에20년 동안 석유를 공급 받기로 하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편, 1800년대 초부터 제국주의의 물결에 편승하여 러시아는 수십년 동안 공을 들여 키르기스인카자흐인오이라트인 등 중앙 아시아 스텝 지역의 여러 종족들을 자국의 영토와 주민으로 편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또한 남쪽으로 몰려가서 캅카스의 산 고개를 넘어 페르시아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페르시아령을 일부 양도 받았으며 샤가 자신의 후계자를 왕좌에 올리기 위해 러시아의 공인을 간청해야 할 정도로 페르시아는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구식 왕국에서 혁신되고 야망에 찬 제국으로 서서히 변신하고 있었다러시아 제국의 영토는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성장과 팽창을 거듭해 나아갔고 이를 지켜보는 유럽 열강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게다가 러시아가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교역로를 열기 위하여 페르시아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하도록 만들어 인도로 향하는 길이 뚫리게 되자 영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자신들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크게 우려해 러시아의 전진을 미리 막으려 했지만 매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던 영국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실랑이에서 비롯되었다영국은 의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1854년 흑해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이득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도 그곳에 합류했다결국1856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얻은 이익과 흑해의 군사적 접근을 박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협력하여 경쟁자의 목을 옮아매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의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도출하였다러시아는 굴욕적인 회담 이후오히려 러시아의 개혁과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군대의 평균 연령을 낮추고 최신 무기를 채택하여 군대 제편에 힘쓰는 한편농노제를 폐지하여 러시아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노예제를 종식시켰다.철강 생산이 확대 되었고 철도망을 확장하여 러시아를 지리적 제약에서 해방시키고 광대한 나라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러시아는 안으로 내실을 기하는 한편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민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 흑해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그 결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지휘가 잘 된 원정대와 외교적 압박을 통해 동아시아의 수십만 제곱 킬로미터의 땅을 자신의 통제 아래 넣을 수 있었다그후 차례로 스텝 지대 남부의 더 많은 부분과 아시아 심장부에 자리잡은 오아시스 도시들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거나 속국으로 편입시켰다

 

이제 러시아는 동쪽의 블라디보스톡을 서쪽의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까지 연결하고 북쪽 백해의 항구들을 남쪽의 캅카스 지방까지 연결하는 독자적인 거대한 교역망과 교통망을 소유하게 되었다특히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중국 둥칭 철도를 연결하여 즉각적인 교역 증대를 불러왔다철로는 교역에서의 이윤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대규모 군대를 중앙 아시아의 어느 곳이든 보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이것은 동방에서의 영향력과 개입을 점점 더 확대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러시아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다시 말해 해안 지역에서 자기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크림 반도의 항구나 흑해 북안의 다른 지역 어디서든 군함을 배치할 자유를 얻었다.’(실크로드, 486)

 

러시아가 갈수록 강력한 힘을 과시하게 되자 영국 통치하의 인도아 대륙을 침략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불안은 극에 달하였다영국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할 여러 방법들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그러나 침공 비용 및 국경을 보강하고 식민지에 더 많은 군대를 보내는데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영국은 러시아가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인정해 준다면 유럽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확대하는 일에 도움을 주어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옯겨가도록 노력하기에 이르렀다

 

1907공식적인 영-러 조약 이후에는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영국 정책의 추진력이 되었다. ‘러시아의 흥정 가운데는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보스포루스 해협 문제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포함 되었는데’(실크로드, 508), 이 거래는 나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 또한공업이1870년 이후2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여 경제가 발전하자 군 장비에 많은 투자를 쏟아 부었다이런 독일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이웃 나라인 프랑스와 오스만군이 점점 더 독일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두 나라 사이에1890년대 초 군사협정을 맺고 둘 중 한 나라가 영국의 공격을 받으면 영국에 맞서 행동하기로 약속을 했다

 

4년 동안의 1차 세계 전쟁으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수에즈를 얻었고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가져갔다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이스탄불과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제권이 주어졌다그러나 진정한 승전국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그것은 무기와 탄약 대금등의 전쟁 비용을 뒤에서 지원한 JP 모건 같은 기업들이었다1차 세계 대전은 참전국들의 국고를 텅비게 만들었다. ‘돈은 금은덩이와 약속어음의 홍수라는 형태로 유럽에서 나와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전쟁은 구세계를 파산하고 신세계를 부자로 만들었다.(실크로드, 527)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은 전통적으로 가까웠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가하였다그러나 오스만의 이러한 결정은 그들의 유전과 송유관을 영국군이 점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영국은 전쟁을 통해 동방에서 오는 배들이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몇주 빨리 유럽에 도달할 수 있는 간선로에 위치한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과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아시아의 유전을 보유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또한전쟁이 끝난지 몇주 지나지 않아서 협정을 개정하여 모술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이는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쿠웨이트바레인,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 상당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알고 이 땅들의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영국의 통제 구역에 편입시키고자 함이었다영국은 또한 수에즈 운하에 대한 어떤 공격에 대해서도 완충지대가 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을 탐냈다. 1917년 영국군은 바그다드로 이동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도 진군했다그리고 오스만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예루살렘까지 함락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주시한 것은 그곳이 지중해로 연결되는 석유 송유관의 종점이기 때문이었다.’(실크로드, 567) 수심이 깊고 석유를 영국 유조선에 싣기에 이상적인 하이파를 장악하는 것은 수천 킬로 미터의 운송 경로를 줄이고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으로 드러나게 될 곳의 석유 생산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하이파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석유를 수송해 오는 송유관의 종점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1940년까지400만톤 이상의 석유가 전쟁 뒤에 건설된 송유관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송되었다지중해 함대 전체에 공급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그것은 대영제국의 경동맥이었다세계 최대의 제국은 세계의 심장에서 직접 펌프질해 보내는 석유라는 검은 피를 대량으로 수혈받고 있었다.’(실크로드, 567)

 

또한영국은 천연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 받기 위하여 아랍 세계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접근하였다그 첫번째 대상자는 런던의 증권 시장에 투자를 많이 하여 재산의 상당 부분이 영국의 번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페르시아의 최고 사령관 압둘-후세인 미르자 대공이었다. ‘그가 총리로 임명되도록 하기 위해 집중적인 로비가 펼쳐졌다.’(실크로드, 563)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에는 이라크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써 그렇게 했다...영국은 이전의 동맹자이자 메카 샤리프의 아들인 파이살1세가 권좌에 오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실크로드, 572) 

 

이라크는 명목상으로 독립 국가 였을 뿐 사실상 영국의 속국이었다영국은 이라크의 대외 관계와 국방 등 모든 문제에 관여 하였고 법관을 임명하고 금융 자문관을 강요하여 이라크 경제를 손에 넣었다.영국은 석유에 대한 잇권이  그들이 세운 대리인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었다. ‘1920년대에 영국은 이라크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들을 세우고 끌어내리는데 직접 책임이 있거나 배후에 있었다.’(실크로드, 581)

 

페르시아는 영국의 영향력에 대항할 대안으로 유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투자를 끌어들이고 스탠다드 오일에50년간의 채굴권을 주었다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고 황금을 숭배하고 약자의 목을 조르는 영국과 똑같은 부류임이 드러났다. ‘페르시아 국가의 보물에 대한 통제권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뿌리 깊고도 지긋지긋한 증오로 이어졌고이는 다시 민족주의를 촉발했으며마침내 서방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낳았다.가장 전형적인 것이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다석유 통제권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장래에 많은 문제가 된다.’ (실크로드, 545)

 

서방 열강들은 식민지에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언제나 개화혹은 근대화’ 또는, ‘종교라든지아니면 해방같은 그럴싸한 이름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예쁘게 포장하곤 했었다. 1916, 1차 세계 대전 이후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의 아래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중동의 세력권을 사이좋게 나눠가진 바 있다그들이 지도에 그은 선들에 의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역사적으로 중동의 국가들은 대부분 신생 국가들이다이슬람 제국이 몽골의 침략으로 망국의 길을 걸어간 후 중동을 통합한 세력은 제대로 없었다. 16세기 경에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가 패권을 잡았지만19세기부터는 유럽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다따라서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민족과 부족 단위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서방에 의해 인위적으로 국경이 설정된 나라가 대부분이었다이는 그 지역 형편과 지역 주민들의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이었기에 후에 중동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의 원인 되었고 오히려 중동 지역에 민족주의 성향을 부치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슬람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방 세력에 대한 반감은 유럽의 십자군을 대하는 수준에 준한다.

 

최근 유럽의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반면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들은 일부다처제로 자녀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아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또한프랑스나 독일에서는 난민 출신의 시장이 선출되는 등 정계에서도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있으며 유럽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난민들의 많은 자녀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최근 눈에 띄게 발생하고 있는 유럽 난민 사태는 사실 근대 유럽이 식민 제국주의를 표방했던 그들의 인과응보나 다름이 아니다이슬람 난민들이 자신들을 받아준 국가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폭동과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 것은 유럽이 이미 오래 전에 중동 국가들에 뿌린 씨앗의 일부일 뿐이다현재유럽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유럽의 난민 사태는 그들이 중동에 저지른 과오를 복구하기 위해 다각도로 힘써 노력하지 않는 이상 쉽게 수그러들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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