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 에세이> 마음을 다하는 통쾌한 삶 > 이타카로 가는 길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11/16 금요일
음력 2018/10/9

절기

이타카로 가는 길

놀러와요 함백산장 | <함성 에세이> 마음을 다하는 통쾌한 삶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수리 작성일17-12-27 23:28 조회714회 댓글0건

본문

 

마음을 다하는 통쾌한 삶

 한수리

 

마음내기의 어려움

 

  저번 3학기 밴드글쓰기를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우리의 주제는 교환과 증여의 균형을 통한 공생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중에 나를 보니 1/n로 똑같이 나누어 쓰려는 교환의 태도로만 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내 태도와 글의 내용이 모순되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래서 좀 더 증여의 태도로, 내가 마음을 내서 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랬더니 같은 활동도 덜 힘들고 더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내가 평소에 얼마나 수동적으로 활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지 돌아보게 하였다. 그래서 밴드글쓰기를 거울삼아 마음을 좀 더 내서 생활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밴드글쓰기를 할 무렵 어쩌다 보니 장금샘 책에 들어갈 누드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원래 써놓은 것들을 조금만 수정하면 될 것 같다고 해서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3학기 중반까지 고치고 고쳐서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3학기가 끝나고 이제 좀 쉬어야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책을 마무리하고 나니 누드글쓰기의 방향이 처음과 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밴드글쓰기 때 마음을 내서 했던 경험이 생각나 그렇게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았다. 계속 '왜 이제 와서야 다시 쓰라는 건지, 이걸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쓰라는 건지, 꼭 이렇게까지 써야 하는 건지' 등등 계속 불평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글에 집중은 집중대로 안 되고, 힘은 힘대로 들었다. 결국 어떻게 끝을 내긴 했지만 마음이 참 힘들었다. 그 사건 이후 마음을 낸다는 게 무엇인지 숙제로 남았다. 

  그러던 중 양명을 만났다. 그가 말하는 심즉리, 격물, 지행합일, 사상마련, 치양지는 너무 간명하고 실용적으로 보였다. 지금 내가 가진 '마음'에 관한 숙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철학을 내 삶에 적용하기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간단할 줄만 알았던 마음을 낸다는 것이 나에게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또 양명의 철학을 통해 나는 그 숙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양명에게 마음을 묻다

 

  양명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음이 이치'라는 심즉리이다. 마음 하나도 어려운데 그게 이치라니! 이러한 양명의 사상은 그 시대 주류 학문이었던 주자학에서 갈라지며 나왔다. 주자학은 이치가 각각의 사물에 있다고 보았다. 즉 나의 바깥에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양명도 어린 시절 주자의 주장에 따라 각각의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을 전심전력으로 대나무의 이치를 구해봤지만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환관의 모함으로 용장이라는 멀고 먼 오지에 유배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독충과 이민족, 자객 등 여러 무수한 생존의 문제에 부딪힌다. 양명은 거기서 성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질문을 구한다. 하지만 어떤 성인도 양명과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었다. 성인의 태도를 배울 수는 있어도 그들에게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때 그는 깨닫는다. 이치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마음에 있음을.

 

 

195fc9249cf0642cdf6921e378a98670_1514384
<용장에서 '마음이 이치'임을 깨달은 양명>

 

  그러므로 밖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삶의 이치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란 또 무엇인가? 양명은 몸·마음·뜻·앎·사물이 한 가지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한 제자는 그것이 어떻게 한 가지 일 수 있냐고 반문한다. 양명은 이렇게 대답한다.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사지는 몸(身)이지만 마음(心)이 아니라면, 어떻게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겠는가? 마음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자 하더라도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사지가 없다면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다면 몸도 없고, 몸이 없다면 마음도 없다. 다만 가득 찬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몸이라 하고, 그 주재하는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마음이라 하며, 마음이 발하여 움직인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뜻(意)이라 하고, 뜻이 영명한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앎(知)이라 하며, 뜻이 가서 닿아 있는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사물(物)이라 하니, 다만 한 가지일 뿐이다.

 

 -『전습록2』진구천의 기록 201조목, 625쪽,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

 

 

  마음이 없이는, 몸도 뜻도 앎도 사물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것들이 모두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도 마음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 사물은 내 밖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있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닿아야만 한다. 한 번은 함백에서 세미나를 하는데 내 안경에 지문이 묻어서 영 신경 쓰였다. 그런데 세미나 중이니 닦으러 갈 수도 없고 계속 눈에는 거슬렸다. 그런데 토론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지문은 내 눈에 거슬리지도 않았고 있다는 것 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다음날 기차에서 전습록 책을 보다가 문득 그 지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지문은 내 안경에 그대로 존재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가닿았을 때는 나에게 드러났고 마음이 딴 곳으로 쏠리니 그것은 내 마음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내 마음이 가닿지 않는다면 어떤 사물도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가닿은 것이 물(物)이라면, 물과 마음의 경계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물은 곧 마음이고, 마음은 곧 물이 된다. 여기서 물이란 사물과 사건, 상황 등을 모두 가리킨다. 그렇기에 마음은 따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내가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떤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나, 딱 하나의 답이 아니다. 단지 그 상황과 사건 속에서 내가 행해야만 하는 바름을 얻는 것이다. 바름은 그 상황 속에서 누구나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마음을 다할 수 있는 행이다. 그리고 양명은 그런 바름을 행하는 마음의 본체를 양지라 한다. 양지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이며 헤아려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성인과 보통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다.

 

사사로움을 제거하라

 

  양명은 종종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밝은 거울은 내 앞에 놓여있는 사물을 그대로 비출 뿐이다. 그것이 꼭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나 사건일 때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비추기만 하면 마음이 곧 이치이기 때문에 바른 행인 양지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지 않다. 그런 마음에는 양지와 물(사건) 사이에 사욕, 인욕, 감정과 같은 사사로움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지라는 거울은 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해 바름을 실현하지 못한다. 여기서 양명의 처방은 간단하다. 거울과 물 사이를 가로막는 게 있으면 그것을 치워 제대로 비추게 하듯, 양지와 물 사이를 가로막는 사사로운 것들을 제거하라!! 그런데 구체적으로 사사로운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누드글쓰기를 쓸 때 불평하는 마음인가? 아니면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억지로 글을 쓴 게 사사로움인가? 그것도 아니면 글쓰기를 적당히 하면 되겠지 생각했던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사사로움이란 말인가. 그것을 모르는데 어찌 제거할 수 있는가! 양명의 제자 또한 스승에게 그것을 묻는다. 

 

195fc9249cf0642cdf6921e378a98670_1514384
<그대로 비추지 못하게하는 사사로움을 제거하라!
출처 : 고래가 그랬어 포스트>

 

 

육징이 물었다: 지금 천리와 인욕을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이기[克己] 는 공부를 할 수 있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자기를 이기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말로만 떠들 뿐이니, 천리도 끝내 스스로 드러나지 않고 사욕도 끝내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한 구간을 가야만 비로소 한 구간을 알 수 있다. 갈림길에 이르러 의심이 생기면 곧 질문을 던지고, 질문이 끝난 뒤에 다시 길을 가야만 가고자 하는 곳에 점점 도달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천리를 기꺼이 보존하려고 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인욕을 기꺼이 제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다만 다 알아낼 수 없을까 근심하고, 오로지 한가하게 강설만 하는데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자기를 이겨내서 이겨낼 사사로움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 비로소 다 알 수 없음을 근심해도 역시 늦지 않다. 

 

 -『전습록1』육징의 기록 65조목, 216쪽,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

  양명의 답은 간단하다. 의심이 들면 질문하고 일단 행하라! 여기서 자기를 이기는 공부란 사욕을 제거하는 행이다. 양명은 알고있는 사욕을 제거하는 행이 먼저지 완전히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것이 사심인지 저것이 사심인지 모르겠다고 그냥 두지 말고 의심이 생기면 거시서 질문은 던지고 그 자리에서 일단 제거해라! 그러면 그만큼 양지는 실현된다. 완벽한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질문하고 결정을 내리고 길을 가야만 다시 돌아오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나의 질문에 완벽한 답이 아니라 불완전하더라도 나로부터 답을 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양지가 밝아지는 것이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에 걸리고 떳떳하지 않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양지를 실현하는 성인에 다가갈 수 있다. 누드글쓰기를 다시 쓸 때 처음에는 선생님 때문에, 선생님을 위해서 내가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분명 내 글이고 내가 쓰는 만큼 나를 알고,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나한테 좋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 있던 불평들이 조금씩 제거되면서 끝까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일상에서 사심은 쉽게 제거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 제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다

 

  최근에 나에게 자주 올라오는 사사로움은 ‘딴짓’하기이다. 처음은 만화 보기였다. 아침에 연구실에 오면 먼저 잠깐 쉬어야지 하고 만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한편만 더, 한편만 더 하면서 한두 시간을 훌쩍 보내버린다. 아침뿐만 아니라 공부하다가도 중간중간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하기도 하고, 목이나 눈이 아프기도 한다. 그러다 더 이상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보던 사이트를 다 막아버렸다. 그리고 4학기가 끝날 때까지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에세이를 쓰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이제는 다른 걸 찾아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게임이나 재미있는 영상을 찾아보거나, 유머게시판에서 할 일 없이 글을 보거나 하는 등등. 만화를 볼 때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여전히 괜히 하던 게 하기 싫으면 딴짓을 하기 일쑤다. 내가 느끼기에 이것들이 분명 누군가에게 숨기게되는 떳떳하지 않은 것이고, 하고 나면 후회되는 사사로운 것임을 알(?)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제거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까 말한 것처럼 별로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제거하는 게 그대로 하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심에 대한 갖은 핑계와 합리화가 올라온다. '이거 하나 정도는 봐도 돼', '그 정도 했으면 이 정도 쉬는 건 괜찮아', '그렇게 사심이라고 아무것도 안하면 무슨 즐거움으로 살래' 이건 뭐 거의 악마의 속삭임에 가깝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심과 싸우기보다는 그런 방향으로 마음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마음이 흘러가면 욕구는 점점 더 커진다. 한 편이 두 편이 되고, 5분이 10분이 되고 점점 늘어간다. 그리고 지루해지거나 몸이 아픈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런 것을 알았던 것일까? 친절하게도 양명은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것을 또 일러준다. 그것은 바로 뜻을 세우는 것이다.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이 진보하지 않는 것은 아직 뜻을 세우지 못해서며(260조목), 학문의 핵심은 뜻을 세우는 것이며(144조목), 공부하기 어려운 곳은 뜻을 성실하게 하는 일(88조목)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뜻이 이미 성실해지면 대체로 마음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몸도 저절로 닦여진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다. 뜻이란 ‘다만 한 생각 한 생각마다 천리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고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는’ 마음이다.

  천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내 양지를 남김없이 실현하는 것이고 성인은 그것을 행하는 자다. 예(禮)와 같은 어떤 형식이나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기 마음의 본체인 양지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이다. 다만 사심을 제거하고 마음을 다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게 성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뜻을 세우는 것조차 사심이 가로막는다. "왜 그렇게 피곤한 짓을 해. 그러면 여태 즐거움을 주던 건 하지도 못해. 그렇게 사는 게 재밌을 것 같아. 피곤해 그런 거 하지마." 여기서도 양명의 처방은 한결같다. 사심을 제거하는 것도, 양지를 밝히는 것도, 뜻을 세우는 것도 다만 사건에서 갈고 닦아야 한다고. 그것을 바로 사상마련이라 한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사건화하는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성찰하고, 살피고, 질문하고, 행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뜻을 굳건히 해나가며, 사심을 제거하고, 양지를 밝혀나갈 뿐이다. 성인은 그 과정에서 실현된다. 성인은 어떤 상태가 아니다. 다만 마음을 다해 양지를 실현한 그 순간만이, 그 사건에서만이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실현된다.

 

통쾌한 성인되기

 

자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왜 우리는 양지를 실현하고, 사심을 제거하며, 성인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양명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양명은 늙은 육신과 고질적인 병마로 고생했다. 그는 그런 몸을 이끌고 민란을 훌륭하게 수습하지만 그 과정에서 건강은 악화 되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다. 스승이 걱정된 제자가 그의 건강을 묻는다. 양명은 자신의 병세가 매우 심각해서 아직 죽지 않는 것은 약간의 원기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며칠 후 양명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제자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가야겠다." 제자는 스승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을 알려 주십시오."

  제자의 말에 양명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보일듯 말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의 이 마음이 이렇게 훤히 밝아서 다 드러났는데 달리 더 무슨 말을 남기겠는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양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전습록, 앎은 삶이다』, 63~64쪽 요약 발췌, 문성환 저, 북드라망

 

195fc9249cf0642cdf6921e378a98670_1514384
<매 순간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양명의 마지막 유언>

 

 

 

  '즐거움은 마음의 본체(166조목)'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웃음을 놓지 않는다. 그 웃음은 나에게 알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을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두었고, 자신의 양지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는 매 순간 마음을 다하며 살았기에 한 점의 잉여도 마음에 남기지 않았다. 이런 그의 마지막을 보면 무언가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나의 경험들도 역시 그랬다. 내가 밴드글쓰기를 쓰면서 딱 각자 할 만큼만 하려고 했던 사심을 제거하니 같이 글 쓰는 것에 내 마음을 다 할 수 있었고, 『전습록』 공부를 통해 장금샘의 책을 같이 검토하고, 감이당 학술제에서 사람들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단지 내 것만 하려고 하는 사욕을 발견 하고 제거 할 수 있었고 함께하는 것에 마음을 다 할 수 있었다. 또 지금 글쓰기를 하면서도 내가 공부한 것보다 더 잘하려는 마음이나, 빨리 써버리려는 마음을 확인하고 제거하니 예전보다 글쓰기가 조금은 덜 힘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하니 뭔지 모를 후련한 느낌이 있었다. 물론 양명이 했던 양지의 실천과 내가 실천한 양지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고 그 후련함의 크기도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련도 후회도 남기지 않는 그 후련한 느낌은 같을 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도 그렇게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다만 매 순간 내 마음을 다하는 후련한 삶, 통쾌한 삶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다만 매 순간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이고 나를 위한 것이다.

  4학기 동안 양명을 배우고 사사로움을 제거 한 만큼 나는 그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알면서 제거하지 못한 사심이 수두룩하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사심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또한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과 사사로움이 있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평생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그렇기에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양지를 실현하는 것은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평생의 숙제이다. 그러니 다만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사심을 제거하고 양지를 실현하는 통쾌한 성인되기를 행할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