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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로 가는 길

해완`s 뉴욕일기 | [무술년 크크성 2기 두번째 에세이] 실크로드3-권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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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jsun0501 작성일18-09-18 21:26 조회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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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예

August 13, 2018

 

실크로드 세계사

피터 프랭코판

 

11장 황금의 길

 

유럽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몇 차례 장거리 탐사는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연결시켰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교역로가 만들어졌고, 이로써 유럽의 16세기 이후 거대한 대성당과 장려한 미술,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왔는데 이는 유럽인들이 육,해군의 운용과 관련된 여러가지 기술의 끊임없는 발전과 대규모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들은 세계를 탐험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배했다.

 

13세기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북유럽 및 남유럽을 아프리카 시장과 연결짓는 교역망을 활발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야망이 커지면서 제노바가 금 교역에서 밀려났으며 1415년에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무슬림 도시인 세우타를 점령하였다.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는 1454년 교황에게 대서양 항해의 독점권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문책을 주도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유럽에 경쟁자들을 물리치려는 의도였으며, 탐험에 필요한 식량과 신선한 물을 싣는 기지를 확보하고 탐험을 수월하게 해줄 동부 대서양의 도서군 항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15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은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오늘날 모르타니 서해안 앞에 있는 아르깅과 사나의 대서양 해안에 있는 상조르즈 다 마나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그곳에 커다란 보관 시설을 갖추었다. 이 와중에 카스티야인들과 서로 경쟁했는데  이 긴장은 1479년 알카소바스 협정 체결로 카스티야는 카나이라 제도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대신 포르투갈은 다른 도서군에 대한 권한과 서아프리카와의 무역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 서유럽의 운명을 바꾼 것은 유럽역사에서 여러차레 입증된 돈벌이,  “인신매매”를 통해서였다.

 

15세기에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 서아프리카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국왕도 마찬가지였는데 국왕에게 노예는 포르투갈 국내 경제의 추가적 노동력일 뿐아니라 킨토라는 아프리카 무역 수입의 1/5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소득원이었으므로, 더 많은 노예를 데려올 수록 더 많은 이득을 얻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마치 동물사냥과 같이 습격을 통하여 일상적으로 잡혀왔고, 어떤 사람들은 여러 척의 배를 조직하여 함께 움직이기 위해 왕자에게 허가를 요청했고 왕자는 이를 허락하며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가 들어간 깃발을 달도록 명령했으며, 이렇게 인신매매범들과 국왕과 하나님은 한패가 되어 노예사냥을 하였다. 

 

포르투갈 배들은 더 남쪽으로 가면서 노예 사냥을 했는데 그들은 마을 어른이나 족장들이 궁금해서 걸어나와 자기네들을 맞으면 그들을 그 자리에서 학살하고 방패와 창을 뺏아 전리품으로 바쳤다고 한다. 탐험가들은 15세기 말엽에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더 밀고 내려갔는데, 노예무역이 포루트갈의 국내 경제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15세기에 탐험과 긴 아프리카 해안선 발견이라는 측면이 더욱 중요했다.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탐험대와 함께 사절단도 파견하였는데 이는 강력한 현지 지배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에스파냐보다 우위를 점하기위한 노력이었고 그런 대리인 중 한명이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는 1492년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인 페르나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출항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갠지즈강 너머 인도의 일부인 새로운 땅과 섬들이 발견되었고, 커다란 금광과 다른 광물들이 개발을 기다리고 있으며 카간의 영토와 본토의 광범위한 무역의 가능성에 대해 두 후원자에게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길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사실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예상과 달리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원시적인 원주민들과 마주쳤고 카간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그곳에 많은 보물이 있으므로 7년 안에 5000명의 기병돠 5만명의 보병에게 급료를 지불할 돈을 마련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사기였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여려차례 항해하는 동안 이런 식의 사기를 반복하며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인색한 식량배급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면 이성을 잃는 콜럼버스에 화가 난 대원들 몇명이 유럽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가지고 간 정보는 콜럼버스의 보고와 허황된 낙관론이 사실이 아님을 알렸다. 

그러나 1498년, 콜럼버스는 베네수엘라의 파리아 반도를 탐사하다가  진주 노다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탐사하는 와중에 아즈텍과 잉카 같은 수준 높고 복합적인 사회를 만나는 과정에서 금과 은도 발견되었으며 탐험은 정복으로 변했다.

 

콜럼버스 눈에 현지인들은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고 환영나온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등 잔혹행위가 일상화 되었다.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철저하게 짓밟혔으며 콜럼버스 첫 항해 이후 수십년 사이에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50만명에서 2000여명으로 줄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에르난도 코르테스였는데, 중앙아메리카를  탐험하고 확보하기 위한 그의 피에 굶주린 원정은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의 죽음과 아즈텍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코르테스는 그를 케찰코아틀 신의 현신으로 생각하는 아즈텍인들을 이용하고 아즈텍의 멸망으로 덕을 보려는 틀락스칼라의 지도자 시코텡카틀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도로 발달한 사회를 붕괴시키는 일에 나섰다. 그는 그들을 열등한 원숭이에 비교하고 온갖 보물을 약탈했는데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벌어진 종교축제 도중 귀족과 사제들을 대량학살하여 근대 초의 가장 잔혹한 행위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에스파냐인들은 1520년 경 천연두 같은 질병을 전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성의 사망률이 높았는데 이에따라 여성이 주로 맡고 있던 농업생산이 급감했으며 농작물의 공급사슬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게 되었다. 몇년 뒤에는 홍역이 덮쳤다.

 

콜럼버스의 첫 보고서가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귀금속들이 정말로 본국으로 실려가고 있었고 이는 거리와 규모면에서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망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네트워크였고 가치면에서는 곧 그것을 능가하게 된다.

이에 야망있는 사람들은 신세계에서 기회를 잡기위해 앞다투어 대서양을 건너갔다.

 

디에고 데 오르다스는 코르테스를 따라 멕시코에 갔고, 그후 중앙아메리카와 현재의 베네수엘라를 탐험하는 원정대를 이끌었는데, 이들은 에스파냐 국왕과 맺은 계약과 면허를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짜냈다. 이는 다시 본국 에스파냐 왕이 자기 몫을 챙겨 왕실 금고를 가득 채웠다. 

이와 함께 우연한 행운으로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는 물론 저지대 국가에 뻗어 있는 땅들, 그리고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1세의 손에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새 제국의 지배자였을 뿐 아니라 유럽 정치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519년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의 재정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이러한 카를로스의 행운은 다른 유럽 군주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는데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수입은 창피한 수준이었고, 헨리 8세는 앤 불린을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교황에게 혼인무효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로마 카톨릭과 단절하고 영국국교회를 독립시켰다. 이는 카를5세의 꼭두각시인 교황에게 도전하는 것이었고 이는 카를 5세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지중해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방 변두리에서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급속하게 팽창한 것은 부와 힘과 기회가 변함에 따른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이후 30년이 채 되지않아 에스파냐 왕국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를 수출하고 수송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통제하고 있었고, 포르투갈 상인들에개 인신매매의 면허를 내주었다. 오래지 않아 콩고 왕을 비롯해 아프리카 지배자들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일부 유럽인들은 노예들의 고통과 새로 발견한 땅에서 끊임없이 이득을 짜내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다.  예루살렘을 수복할 전망은 사라져갔지만 그 대신에 기독교도의 의무인 선교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고 한 예수회 사제는 1559년 에 남아메리카의 유럽인 정착자들의 식민의 목적은 금과 은을 얻거나 부를 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신앙을 찬미하고 영혼을 구제하는 것임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짜낸 부가 전부 에스파냐로 간 것은 아니었는데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항구들에 진을 치고 있던 눈치 빠른 모험가들과 해적들이 수송을 방해하며 노획물을 가로채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카리브해까지 진출하여 보물 실은 배들을 습격했는데 이들 가운데 무슬림도 있었다. 

 

이들의 습격은 종교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꾸며졌고 기독교도였던 에스파냐 왕의 경쟁자들은 민간 나포 허가증을 발급하고 에스파냐왕도 재빨리 해적 소탕 면허를 내놓아 법으로 처단하고자 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았고 명성까지 얻었다.

 

이렇듯 신세계가 발견되어 대륙 탐험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과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부가 증가하여 수십년 사이에 부유한 후원자들이 등장하여 문화적 수혈을 위한 자금을 대고 활기에 넘친 새 사상이 장려되고 지식인과 과학자들은 서로 부대끼며 후원자와 후원금을 얻으려 경쟁하였고  그것이 유럽을 변모시켰다.  유럽은 새로운 부를 통하여 자랑스러움과 자신감을 되찾았고 신앙도 강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오는 무진장해보이는 부가 하나님의 축복을 확인한 것이며 “원하시면 누구에게든지 어떤 방시으로든지왕국을 주거나 빼앗으시는 하늘에 계신 주님이 정하신 것” 이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에 옛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은 입양된 새 상속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서유럽 나라들은 아테네나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고 로마의 역사에서도 멸망하는 날까지 주변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건축가들이 고대로부터 주제와 발상과 문장을 빌려다가 이야기를 꾸미고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실처럼 되어 아예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시기를  르네상스, 즉 부흥기라 불렀으나 결코 재탄생이 아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12장 은의 길

 

유럽에서는 15세기는  사치품에 대한 수요에 비해 지불할 수단이 부족한 신용경색과 기후변화로 인한 궁핍, 화산활동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한랭화 등이 겹쳐 경제적 충격을 초래한 시기였다. 이로 인해 교역방식은 개선되고 있었는데 서아프리카의 금 시장에 접근하게 된 것과 아울러 예컨대, 1460년 이후 수십년 사이에 작센, 보헤미아, 헝가리, 스웨덴의 은 생산량은 다섯배로 증가하는 등 발칸반도와 유럽의 다른 지역의 채굴량이 늘어난 것도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또하나의 요인은 경제위축의 교훈으로 인해 15세기 후반에 세금 징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들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세금징수 관리의 필요성과 이러한 통화와 재화 관리를 용이하게 하는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하는 군주제의 부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 조선인 여행자 기록에 따르면 15세기 말에는 교역 회전율이 빨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15세기 후반에 유럽의 경기가 점차 호전되면서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거대한 신세계의 부가 에스파냐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자원이 비축되는 양상이었다.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 콜럼버스의 값비싼 실수가 탐험에 대한 공포를 자아낼 무렵,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와 그 주변 나라들로 가는 길을 찾아내라는 마누엘 1세의 명령을 받고 출항했다. 다가마 일행이 처음 남아프리카에 도착했을때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어 케냐 해안의 말린디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을 뱔견했을 뿐만 아니라 계절풍을 헤치고 인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안내인을 만났고, 열 달에 걸친 여정 끝에 캘리컷 항구 앞바다에 도착함으로써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 콜럼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가마도 동방에 많은 기독교 왕국들이 있어 이슬람 세력과 맞서 싸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고 그의 보고의 상당수는 오해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캘리컷의 왕 사무티리와의 협상은 최악의 상황을 우려할 정도였으나 갑자기 사무티리가 포르투갈인들에게 상품을 하역해도 좋다고 거래를 허락했다. 이에 다가마는 향신료와 그밖의 물건들을 잔뜩 사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서양을 건너는 첫번째 원정 뒤에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대서양 건너에서 발견한 모든 땅에 대한 통치권을 에스파냐에 달라고 교황에게 청을넣은 것과 같이 교황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원정에 관련된 통치권을 포르투갈에 부여했고

1494년에는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두 나라의 소유권에 관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카브베르드 제도 (Cape Verde islands) 서쪽1800킬로미터에 두기로 협의를 이루었다. 

 

30년 뒤 1520년까지 포르투갈 배는 더 동쪽을 탐험하여 인도를 지나 말라카와 향신료 제도로 불린 말루쿠 제도, 그리고 중국 광저우에 이르렀다. 한편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 두 대륙을 발견한 것을 넘어서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과 향신료 제도에 이름으로써 사상 최초의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이에 1519-1520년에 다시 한번 양국은 태평양을 나누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세계를 나누었다.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부가 늘어나는 것에 적응해야 했는데 1499년 바스쿠 다가마의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해로의 발견과 귀국 소식으로 충격과 침울함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제 수많은 검문소를 거치며 세금을 물어야하는 육로 무역의 베네치아는 이제 해상 무역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게 유럽의 상업 중심지 역할과 상품 교역권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방으로 가는 해로 개척은 아프리카 남쪽 끝을 지난 배 114척 가운데 절반만이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베네치아 정치가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내치아는 이집트에 사절을 보내 포르투갈에 맞서는 협력 방안을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해상 운송로 통제의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바스쿠 다가마가 직접 메카 순례를 마치고 인도로 돌아가는 무슬림 수백명이 탄 배를 나포하고 몸값을 내겠다는 호소를 무시하고 배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그들이 한명도 남김없이 바다에 빠져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1505년에 메카의 관문 항구인 지다가 공격 받았으며 그후 페르시아만의 중요 지점인 무스카트와 칼하트가 약탈당하고 그곳 이슬람 사원들이불타 무너졌다. 이렇듯 항구와 전략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카이로 술탄의 사령부에서 소함대가 파견되어 홍해와 그 어귀를 순찰하고 필요한 곳에서는 직적적인 행동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포르투갈 지휘관들도 전술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홍해입구 소코트라 섬 같은 도발적인 지점의 요새를 버리고 그 대신 무슬림 이집트와 유화적인 관계조성을 왕에게 알렸다.

 

기독교가 승리하고 무슬림은 멸망한다며 폭력을 휘두르던 초기 탐험의 태도와 주장은 종교의 차이를 가능한 한 부각시키지 않고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대해 대한 태도를 부드럽게 하여 장사기회를 확보하는 현실적인 접근을 하게 되었다. 대체로 아메리카의 경우와 달리 동방으로 가는 길은 정복이라기보다는 협력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교역품 물량이 크게 늘어났다.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짜낸 부 덕분에 아시아산 사치품을 마구 사들일 수 있었다.

곧 리스본, 안트베르펜과 유럽의 다른 상업 중심지의 상점들에 중국 자기와 비단, 향신료가  꽉 들어찼으며,  이 새로 만들어진 시장에 물건을대려는 경쟁은 치열했다.  바스쿠 다가마의 첫번째 원정 소식에 베네치아는 경악했지만 베네치아의 장기간에 걸친 교역관계는 하루 아침에 대체할 수 없었고, 오히려 유럽의 수요가 늘면서 더 번성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서로를 철저히 감시하며 무엇을 사는지 가격이 얼마인지를 기록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상인을 뽑아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에서 육로 또는 해로로 오는 상인단과 수송대의 규모를 정탐하고 그들이 가지고 오는 상품의 양에 관해 보고하도록 했다.  언제 향신료 선단이 출발하느냐에 따라 공급변동이 생기므로 시장은 정보력이 뛰어나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것에 비해 덜 위험한 수송로에 의존하는 동부 지중해 상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다.

 

대량판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한 덕분에 상류층 사치품 사업이었던 향신료 사업이 금세 문화와 상업의 주류가 되었고, 포르투갈인들은 독자적인 실크로드를 건설하여 인도부터 말라카해협과 향신료 제도까지 마구 뻗어나가고 있는 무역기지 및 영구 정착지들을 리스본과 연결하기 위해 앙골라, 모잠비크, 동아프리카 해안과 그 너머까지 항구와 항만 사슬을 구축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를 탐험한 지 수십년만에 포르투갈 국가수입의 상당부분이 향신료 무역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도 시장에서 자국의 몫을 놓치지 않으려고 결연히 나섰기 때문에 혹독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517년대 서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오스만이 이집트 지배권을 장악한 뒤 지중해 동쪽의 강국으로 떠올랐고 유럽을 위협하는 주요세력이 되었다. 오스만이 발칸반도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유럽의 중심부로 이동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었는데, 1526년 헝가리 남부 노하치에서 승리한후 더이상 사생결단의 싸움은 없었다. 

 

오스만은 아시아 곳곳에 상업적 위치를 강화했고 구매 대리인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지중해, 홍해와 페르시아만의 해로를 보호하기위해 여러성채를 복구했으며, 페르시아만에서 바스라를 거쳐 레반트까지 내륙을 달리는 도로를 현대화 하여 안전하고 빠른 교역로를 건설했다. 1538년에 오스만은 인도 서부 디우에 있는 포르투갈  항구에 대규모 공격 감행했으며 포르투갈 배들을 거듭 공격했고 이들에게 빼앗은 전리품 덕분에 갈수록 부유해졌다고 한다. 

 

16세기 말 무렵에는 향신료 교역에 관여하는 포르투갈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와 수입품에 높은 세금을 물렸으며 유럽에 비효율적인 유통망을 만든 결과 향신료 교역에서 얻는 이문이 크게 줄어들고 이에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에서 발을 빼고 무명과 비단 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경쟁력은 포르투갈과 그 주변부를 극심하게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양 등 여러 곳에서 벌어진 경쟁의 핵심에는 유럽의 부유한 구매자들에게 가는 상품 등에서 최대한 조세 수입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자리잡고 있었고 오스만은 이에 성공해서 상당한 돈을 거둬들였다.

 

국내  수요증가 역시 정부수입을 늘리는 데 기여함으로써 16세기 동안 오스만의 연간수입은 상당히 증가했고 이는 다시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촉진했다. 당시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은 유럽뿐만이 아니라 발칸반도에서 부터 북아프리카까지 계속 늘고 있는 조세 수입으로 오스만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쉴레이만 1세의 수석 건축가 시난은 쉴레이만 치세(1520-1566)와 그의 아들 세리림 2세의 치세에 80개 이상의 이슬람 사원과 60개의 이슬람학교, 32개의 궁전, 17개의 구호소, 3개의 병원, 많은 다리, 수도교, 목욕탕, 창고를 지었다. 또한 페르시아에서도 호화로운 건축공사와 시각에술에 지출이 급증했는데, 아바스1세의 치세(1588-1629)에 정점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금 중부 이란에 있는 이스파한 재건을 지휘했다. 

 

또한 자신감 넘치고 지적 호기심이 많으며 문화가 국제화되는 가운데 출판과 서예, 시각예술 특히세밀화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스파한의 카르멜회 수도사들은 샤에게 시편의 페르시아어 번역본을 선물했고 교황 파울루스 5세는 성서 이야기를 묘사한 중세 그림들을 보냈고 그림을 설명하는 페르시아어 해설판을 만들도록 주문하는 등 물질적 번영은 새로운 분야로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의 징표이기도 했지만 이 성장의 시기에 나타난 페르사아의 문화적 자신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 두 제국은 더 동쪽에서 오는 물건들에 붙는 통행세와 수입관세가 급격히 늘면서 부를 축적했고, 유럽은 현재 볼리비아 안데스 고지에 있는 포토시에 있는 사상 초대 단일 은광을 채굴하여 100여년 동안 전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채굴되었고 이를 녹여 만든 주화가배에 실려 동방을 향해서 16세기 중반부처럼 인기있는 동방의 상품들과 향신료 대금으로 매년 수백톤의 은이 수출품이 생산되는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로 유출되었다.

 

유럽과 서아시아는 아메리카대륙에서 들려온 발견 소식과 아프리카해안을 따라 열린 해로로 인해 활기가 넘쳤고 그중 가장 휘황찬란한 곳은 인도였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간 이후의 시기는 테무르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던 지역에서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는데 1494년 테무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부르는 페르가나 분지를 물려받았고 이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우선 카불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런 다음델리의 포악한 로디 왕조를 몰아내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바부르는 카불에 근사한 와파 정원을 만들어 즐기는 등 열정적인 건설을 이어나갔다.  바부르의 새 영토는 오래지 않아 강대한 제국으로 변신했는데 새로운 교역로가 열리고 유럽이 적극적으로 구매에 나서면서 갑작스럽게 국제적교환가치가 있는 은이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이에 상당 부분 좋은 말을 사는 데 지출되었는데, 말 교역은 이문이 많이 남았다. 대부분의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왔고 말의 수요가 공급을 앞질러 이윤폭이 엄청나게 커졌다. 

 

포르투갈인들은 말을 선적하는 수익성 좋은 사업에 깊숙히 관여하여 기술 변화를 촉진했고 말 수송을 염두에 둔 바닥이 둥근 배를 만들었다.  수입이 늘면서 다리를 놓고 여행자 숙소를 개선하며 북쪽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의 안전을 강화하는 등의 투자가 늘었다.

 

말시장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도시들은 호황을 누렸다. 카불도 그중 하나였고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은 델리였다.델리가 상업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지배자 지위도 높아졌다. 곧 이 지역에 직물산업이 번성하고 이 물건들이 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까지 명성을 얻자 무굴제국 정부는 이 시장을 잘 보호했다. 

 

이러한 재정적인 영향력을 이용하여 여러지역을 차레로 쓰러뜨리고 하나로 통합하여 16세기가 지나는 동안 바부르와 그 뒤를 이은 아들 후마윤 및 손다 아크바르 1세는 무굴제국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1600년 무렵에 영토는 인도 서해안 구자라트에서 동쪽의 뱅골만까지, 그리고 북부 편자브 지방의 라호르에서 중부 인도 깊숙이까지 뻗어 있었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정복을 위한 정복이라기보다는 이 도시와 지역들에 수입이 흘러들어 갓 태어난 제국의 힘을 북돋우고 강력하게 만드는환경을 활용하여 도시와 지역들의 지배권을 장악한 경우였다. 구자라트와 뱅골 등 북적거리고 두둑한 과세 기반이 촘촘히 들어찬 새로 추가된 지역은 중앙에 더 많은 힘을 제공했고, 이는 몸집을 불려나가는데 큰 동력을 제공했다.

 

무굴 지배자들은 몽골과 티무르에서 오랫동안 인기있던 세밀화를 후원하여 여러 먼 지역에서 숙달된 전문 인력을 데려와서 성대한 시각예술집단을 만들었고 중앙아시아의 오락거리인 비둘기 경주와 격투기 관람하는게 대중화시켰으며 건축과 정원 설계의 혁신도 두드러진다.

 

16세기 후반에 새로 지은 도시 파테푸르시크리는 무진장해 보이는 자원과 자신감에 찬 통치가문의 제국에 대한 열망을 분명히 보여준다. 17세기 초에는 샤 자한이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해 건설한 묘, 타지 마할은 유럽에서 흘러 들어온 막대한 부를 입증하는 가장 유명한 기념물로써 세계적으로 확대된 국제무역이 이 무굴 지배자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러한 유럽과 인도의 영화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과 은이 아시아에 흘러들어가는 부의 재분배 덕분에 즉, 아메리카 대륙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럽인들에 대한 동방의 부름은 강력했는데 장사로 돈 벌 기회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말레이 반도, 심지어 일본에서도 포수, 도선사, 항해사, 갤리선 선장, 조선 기사가 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돈 번 사람들은 사실상 소군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571년 에스파냐인들의 마닐라 식민지 건설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었느데 그들이 처음에 대서양을 건넜을때에 비해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방식의 식민화를 추진했다. 

 

마닐라는 온갖 종류의 상품을 살 수 있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곧 거대 도시로 성장하여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이제 상품은 먼저 유럽을 거치지 않고 태평양을 넘어 운송되었으며 그 상품 대금인 은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을 거쳐 아시아의 다른 지역, 특히 중국으로 향하는 은의 양은 엄청났는데, 이는 특히 유럽 주요 사치품인 도기와 자기 비단 제조업이 발달한 중국으로 모여들었던 것이고 또하나는 중국에서 은의 가치는 인도, 페르시아나, 오스만 제국에 비해 상당히 높았고 16세기초 유럽 시세의 두배에 이르렀는데 이는 유럽인들이 같은 돈으로 중국시장에서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중국 물건을 살 강력한 동인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16세기와 17세기 중국의 문화와 예술, 학술에 영향을 미쳤다. 명대의 심주, 문징명, 당인, 구영 같은 화가들은 후원과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는 실험과 발견의 시대로 문학의 형식과 성에 대한 인식에 도전하는 성애소설 <금병매>이 나왔으며, 송응성 같은 학자들도 지원을받았고 잠수에서부터 수력학을 응용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백과사전 <천공개물>이 탄생했고 유학에 대한 관심 증대와 왕수인 같은 유학자에 대한 존경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또한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상당부분은 여러가지 대규모 개혁에 지출되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화폐경제로의 전환과 자유노동시장의 육성, 대외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그램 등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은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그 가치가 불가피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가상승을 유발하여 17세기의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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