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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이타카로 가는 길

일본에서 담담하게 | 자전거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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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랑소 작성일15-09-15 23:19 조회2,2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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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예찬

 

 

 

담담

 

 

자전거 열쇠를 잃어버렸다. 어디다 놓았는지, 어디서 흘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놈의 칠칠치 못한 성격. 자전거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서는 자전거포로 자전거를 1시간 정도 끌고 가야 하는데 그건 귀찮다(걸어서 가장 가까운 동네가 1시간 거리다. 내가 사는 오다이바는 주변에 쇼핑몰이랑 관광지는 가득한데 자전거포가 없다.) 물론 출장서비스도 있기는 하지만 비싸다. 그렇게 한동안 자전거를 못탔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래서 글로나마 자전거를 탈란다.  

 

자전거와 자동차. 한자로는 자전거(自-轉-車)와 자동차(自-動-車). 한자를 봐도 알 수 있듯 둘 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의미에서는 같다. 다만 자전거가 스스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차라면 자동차는 스스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화석연료의 힘을 빌리는 차라는 점에서 전(轉)과 동(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전거는 다른 외부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자신이 힘들인만큼 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직하다. 물론 인간이 거리를 이동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신선들이 하는 것처럼 경공술로 날라서 이동하거나. 

 

하지만 사람이라면 땅에 발을 내딛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천지인(天-地-人)의 매개로서의 인간. 땅을 밟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면 이 땅위에 뿌리박고 살 수 밖에 없는 조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잠깐은 현실과는 상관없이 붕 떠 있을수 있을지는 모르나 직접 발을 내딛으며 땅과 접촉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내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은 지금 내가 발딛고 서있는 여기 그리고 내가 지금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기계들과의 관계이다. 그걸 무시한채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 혹은 미래에 붙들려 사는 것, ‘여기’가 아니라 거기 혹은 저기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고착 내지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때는 그랬었는데’와 ‘나중에 할게’라는 마인드 속에 부재하는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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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땅에 발을 내딛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또 하나 자전거와 다른 운송수단의 차이는 자전거를 ‘탄다’라는 것의 의미다. 여기서 탄다는 것은 단순히 자전거 위에 오른다는 의미라거나 운송수단으로서 자전거를 이용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자전거와 한 몸이 되는 것일게다. 물론 예민한 사람이라면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자신과 자동차가 한 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겠지만 말이다.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내 발과 자전거의 페달이 접속해 하나의 신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럴 때 사고가 안 난다. 나의 무게 중심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전거는 나의 몸과 하나가 되어 중심을 잡는다. 자전거의 바퀴는 나의 발의 연장이고, 자전거의 전등은 나의 눈의 확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도구를 이용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의 몸과 자전거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게 아니라 자전거-탄-신체가 되는 것이다. 자동차나 전차 안에서 이러한 신체의 변용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근대가 만들어낸 신체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몸을 확장할 수 있을까. 집합적 신체는 그것이 자전거가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혹은 자연이 되었건 간에 근대가 획정한 포함-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경계를 넘어서 낯섬 속에 놓여지는 것은 아닐까. 자전거를 타는 순간 느끼는 몸의 확장과 동시에 몸의 열림. 자기가 그동안 감각하지 못했던 역량들의 각성과 새로운 것들과의 이접. 그럴때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내가 나이게 되는.   

 

 

새해맞이 참배 

이쯤에서 갑자기 이어지지 않지만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 하나. 원고를 여기까지 한참 쓰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 일 없으면 절에나 같이 가자고. 구정을 세는 한국과 달리 신정을 세는 일본은 연말연시가 가장 큰 명절이다. 보통 거의 일주일 동안 연휴가 이어지는데, 학교 도서관은 물론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 그리고 새해에는 다들 절이나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빌며 참배를 한다.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친구를 따라 주변 조그만 절에 들렀다. 조그만 절인데도 사람들로 붐벼 발디딜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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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하츠마이리(初参り)에서 참배하는 사람들

 

 

소원을 빌 때 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딱히 소원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뭘 빌어야 할지, 내게 소원이라는 것이 있나라는 생각도 들고. 눈감고 소원을 비노라면 뭔가 구체적으로 생각은 나지 않고 답답하게 시간만 지나간다. 언제까지 눈 감고 떠오르지도 않는 소원을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쩝, 결국 한해 무탈히 보내게 해달라는 작은 소원을 빌고 눈을 뜬다. 

   그리고 새해 첫 참배에서 오미쿠지(御神籤)라고 한해의 길흉을 점치는 제비를 뽑는다. 100엔 이나 200엔 정도 하는데, 통을 흔들어 숫자가 적힌 막대기를 뽑으면 그에 해당하는 길흉이 적힌 쪽지를 받는다. 오미쿠지는 대길(大吉)-중길(中吉)-소길(小吉)-말길(末吉)-흉(凶) 이런 식으로 순서가 매겨지는데 자신이 뽑은 오미쿠지가 소길이나 말길, 흉일 경우에는 절이나 신사의 나무 혹은 기둥에 매단다. 자신의 흉을 절이나 신사에 매달아 놓음으로서 액땜을 하는 식이다. 좋은 괘가 나오면 좋고, 나쁜 괘가 나와도 절이나 신사에서 그 흉을 가져가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다. 나도 절이나 신사에 들를 때마다 재미삼아 뽑곤 하는데 좋은 괘가 나온 기억이 없다. 올해는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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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쿠지. 크게 한 해의 운세와 학문, 연애, 이사, 출산 등 사람들이 관심있는 부분에 관한 운세를 알려준다. 

 

 

운세대길!! 그래 작년에 뭐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는데, 올 한해는 일이 잘 풀릴라나 보다. 오미쿠지 중 가장 좋은 대길이 나온 것이다. 요시 그란도 시즌!! 학문에 관한 세운도 안심하고 공부하라는 말이 나와 더 기분이 좋다. 뭐, 오미쿠지가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게 사람인가 보다.  

 

 

길과 흉 사이

 

그렇게 참배도 하고, 오미쿠지도 뽑고 집에 돌아오려 하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지갑이 없다. 이때만 해도 또 방에 놓고 왔으려니 생각했다. 안 그래도 매번 카드키를 방에 놓고 문을 잠그고 나와 버리는 바람에 관리실에 가서 부탁한 일이 다반사여서 경비 아저씨가 얼굴을 외울 정도였다. 그런데 방에 와서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보통때라면 돈을 얼마 안 넣어가지고 다니지만, 이번에는 연말연초라 주변에 신세 진 사람들한테 드릴 선물도 사고, 근처 온천에 여행도 갈 요량으로 넉넉하게 돈을 뽑아놓았다. 5만엔, 우리 돈으로 치면 약 50만원 정도. 기숙사 한 달 방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덜렁대다 또 어디다 빠뜨린게 분명하다. 자전거 열쇠를 잃어버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절에 가서 올 한해 무탈히 보내게 해달라고 소원까지 빌었는데!! 하물며 올 한해 운세대길 오미쿠지를 뽑은 바로 그 날에!!!  

 

물론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흉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이 칠칠치 못한 성격, 무언가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성격을 고친다면 지갑을 잃어버린 일이 앞으로의 대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길(吉)과 흉(凶)은 결국 나의 운(運), 나의 길(道)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길이 흉이 될 수도, 흉이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동안 계속 눈물이. 오늘은 이쯤에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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