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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로 가는 길

일본에서 담담하게 | 어느 자전거성애자의 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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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랑소 작성일15-09-15 23:21 조회2,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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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전거성애자의 방학


담담

 

 

2번의 학기, 그리고 방학 

방학을 했다. 일본은 한국과 약간 학기가 다른데 봄학기는 4월에서 7월초까지, 가을학기는 10월에서 1월말까지가 보통이다. 뭐, 나야 여기서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는 건 아니고 듣고 싶은 학부 수업이나 대학원 수업 청강하는 정도라 방학이라 해도 별 다를 건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생활한지 벌써 두 학기나 지났다. 이제야 조금씩 여기서의 삶도 익숙해지는 것 같다. 너무 익숙해져서 또 다시 관성화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무서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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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의 상징 아카몬. 빨간 문이라는 뜻으로 

서울대 정문 샤에서 사진 찍듯이 도쿄대에 오면 사진 찍는 곳.  

 

 

대학교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여기 도쿄대도 힘들게 들어와서 공부 안하는 건 한국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ㅋ 수업시간에 절반은 자거나, 스마트폰 만지작거리거나, 노트북 켜놓고 딴 짓 하거나다. 정작 수업을 듣는, 열심히도 아니고 그냥 듣기라도 하는, 학생들은 삼분의 일이나 될라나. 어떤 수업은 서너 남짓 아이들을 빼고는 대놓고 엎드려 자거나 꾸벅꾸벅 졸아서 보고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다.   

 

뭐, 내가 학부 다닐 때를 생각해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제 와서 보면 뭘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 보니 말이다. 대학원 수업은 그래도 대놓고 딴 짓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앎에 대한 충만한 의지라기보다 학점을 채우기 위한, 지도교수의 수업이니까 듣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 ‘더러’라는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래도 여기 수업 방식 중에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매시간 코멘트를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수업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내가 들었던 수업들은 출석을 부르는 대신 그 시간에 들었던 내용 중 의문 나는 것이 있거나, 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미리 나눠준 코멘트용 종이에 적어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제출한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교수는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는 시간을 3-40분 갖고 다음 수업에 들어간다. 물론 질문들은 천차만별이다. 기본적인 질문부터 수업과는 별 상관없는 질문들까지. 그렇다고 교수가 그 질문들에 대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라며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저런 책들이 있으니 참고해보라는 식이거나, 이러저러한 의견들이 있다고 소개하거나, 그 학생이 생각 못한 지점들에 대해 짚어주는 식이다. 오히려 수업은 본 내용을 강의하는데 있다기 보다, 이 묻고 생각하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답이 아니라 질문 찾기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건 원래 그런 묻고 답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학문(學問)이라는 말이 원래는 그렇게 묻고 답하는 것을 의미하는 문학(問學)이었다는 것을,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질문을 통해 앎을 구성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답하는 것이라기보다 ‘묻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결국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문제를 풀어라! 답을 맞춰라! 해를 구하라! 초등학교 다닐 때 완전학습, 다달학습, 이달학습 등 문제지를 매달 몇 권씩 풀었던 경험(그 때의 경험 때문인지 아직까지 사지선다에는 무척 강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빨간펜이니 재능교육이니 학습지의 이름이 바뀌고 선생님들이 찾아오는 식으로 바뀌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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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

좋은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찾는 법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만 주목할게 아니라, 그 사람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가, 그 사람이 무엇과 대결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 공부를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노동일 뿐, 사유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저자가 제시한 답을 찾는 것보다, 저자가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물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질문으로부터 자신만의 답을 찾고, 거기에서 또 다른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책을 읽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질문하는 힘! 좋은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는 학문뿐만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라는 질문. 삶에 어떤 단순한 목적지가 없다고 한다면, 질문은 답을 찾아가기 위한 단순한 시작점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질문과 그에 맞는 해답이 아니라, 답을 미리 품고 질문이라 말할 수 있다. 왜 내 삶은 이렇게 엉망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혹 그것은 질문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헤매는 이유는 답을 잘못 구한다기보다 질문이 잘못 되서 그런 경우가 많다.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답. 맨날 제자리걸음.  

 

마찬가지다. 막연한 질문, 하나마나한 질문, 자신도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모르는 질문으로는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지금 막혀있는 바로 그 문제, 정확히 그 문제! 두루뭉술 넘겨버리지 않고 콕 찝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한 질문으로는 잘해야 막연한 답밖에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질문과 답이라는 생각을 전도시켜야 한다. 답이 질문을 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답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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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 왜 이렇게 살지라는 질문은

언제나, 나에게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질문 없이 살기, 그것은 어쩌면 그냥 살기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흔들리는 삶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이 별 다른 게 아니다. 소위 우리가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크게 생각이 보수적이라거나 완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건 단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이다. 자기가 해봐서 다 알아라는 식의 사고, 관성대로만 모든 것을 보는 자! 그런 점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보수냐 진보냐에 상관없이 ‘꼰대’들은 존재한다. 물론 그런 사고의 꼰대가 있다면 몸의 꼰대도 있을 것이다. 늘 관성대로만 몸을 사용하는 자. 변화하지 않고 자신의 습대로만 모든 관계를 맺는 자. 

 

그러나 하나 주의할 것은 질문이 짐짓 무겁기만 해서는 재미없다. 그렇게 되면 질문을 해결하기 전부터 진이 빠지게 마련이다. 질문을 할 때도 유머러스하게! 재미있는 질문에 재미있는 답이 나오는 법!  

 

 

소유로서의 앎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앎. 

이처럼 우리는 공부 역시 소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공부를 하다보면 어떤 지식을 소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접근해 버린다. 하지만 앎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아닐까. 자유가 어떤 소유가 아니라 해방의 과정으로 자유롭게-‘되기’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앎 역시 소유형이 아니라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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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앎은 삶이다.

 

 

앎만큼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배신하는 순간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는가? 그것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빠져나가버린다. 자신은 앎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거나,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상황에 부딪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앎이란 어떤 무지로부터 앎으로 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앎이란 그것을 소유함으로서 어떤 앎의 지극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실천하는 행위로서의 앎 밖에. 가령 자전거를 운전할 수 있는 앎, 능력이란 그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내 몸을 움직여 그것에 능숙해지는 순간으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지식을 계속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머리에 외워두는 것을 앎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어단어를 외운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뜻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머리에 주입해 놓는 식이 아니다. 우리가 외운 영어단어를 그전과는 다른 문장에서, 다른 맥락에서 볼 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 외운다는 행위를 단순히 어떤 메모리 장치에 입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몸이 그 앎과 관련된 환경이 되었을 때 튀어나올 수 있도록 한다는 메모리 장치, 그리고 습이라는 하드웨어에 입력한다는 의미에서라면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단순히 앎이 어떤 소유형태로 자신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자, 오히려 자기에게 독이 된다. 그런 앎이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 순간 앎이라는 환상의 늪에 빠져버리게 된다. 소유할 수 있는 대상(object)으로서의 앎 그 자체란 없다. 앎은 역량(capacity)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앎의 소유화, 다시 말해 앎의 상품화, 앎의 자본화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앎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길이자, 삶을 바꾸는 길이다. 자기의 몸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앎 역시 소유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일지 모른다. ‘내가 앎을 갖는다’라는 식의 사고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무엇인가,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앎’은 무엇인가라는. 이처럼 앎과 삶의 분리태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무지에서 해방되는 찰나로서의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 앎을 통해 구성되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갖는다는 것, 즉 소유한다는 것과 사용하고 순환시킨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한 걸음씩 문턱을 넘어서는 과정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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