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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이타카로 가는 길

일본에서 담담하게 | 어느 자전거성애자의 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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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랑소 작성일15-09-15 23:22 조회2,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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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전거성애자의 일년

 

 

담담


벌써 일년


벌써 일년이 지났다. 이제 조금 있으면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기 싫다.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ㅋ 그건 꼭 여기가 살기 좋아서라기보다는 들어가서 살 생각이 답답해서 일거다. 이것저것 신경써야 할 일들, 부딪혀야 할 사람들, 해야만 하는 일들, 눈치보지 않으려해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들. 그러한 것들에서 자유롭기 위한 내공을 키우는 게 답일 터이지만 그 대신 그것과 멀리 떨어져 사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해서 일터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들어갈 생각만 하면 갑갑하다.ㅋ 그럴때는 역시 자전거다. 추운 겨울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노라면 몸에서 땀이 나지만 머리로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게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다. 여기에 두고 가는 것들 중에 아쉬운 것은 별로 없는데, 딱 두 가지. 길고 곧게 뻗어있는 나무들로 가득 찬 도쿄대 캠퍼스, 그리고 자전거 페달 위에서 맞는 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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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갑목이요!”라고 외치는 듯 서있는 도쿄대 캠퍼스 내 나무들

 

 

제일 큰 걱정은 또다시 빠른 서울에서의 삶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는 일이다. 지하철 역에서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서울과 비교하면 여기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다. 물론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건 비단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속도에서의 차이뿐만 아니다. 삶의 속도란 양적으로 느리고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속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속도가 붙더라도 그것을 자유자재로 늦추고 빨리하게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안 될지 모른다. 문제는 그 속도에 못 이겨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건 단지 나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번 일년은 삶의 속도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실어증과 수다증 사이


언젠가부터 글을 쓰는 게 막막해졌다. 물론 그동안도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부담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 배와 머리는 갈수록 비워져 가고 있었고, 채워질 줄을 몰랐다. 여기에 와서 통 문학책을 읽지 않아서일까. 단어의 빈곤과 생각의 빈곤. 

 

그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럴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외국에서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누군가와 같이 오지 않는 이상 혼자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처음에는 해방감으로 다가오지만 말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처럼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외국 생활에서 하루에 한마디 하기도 쉽지 않은 날들이 많다. ㅡㅡ 어쩌면 외국어로 이야기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을 잃어버린 실어증의 상태로 자신을 내몰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자기의 언어를, 자기의 생각을 다시 갖게 해줄 둘도 없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침묵의 시간으로 내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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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도서관. 하루 종일 말없이 혼자 앉아있노라면 

실어증 뿐 아니라 입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걸 느낀다.ㅋ

 

 

그래도 여기 와서 변한 것들도 있다. 혼자 있어서 좀처럼 말할 기회가 없어 그런 건지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말이 많아졌다는 점. 나 스스로도 원래 이렇게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물론 천성적 어두움과 낯가림, 자폐 증세가 간혹 찾아올 때도 있지만 말이 많아졌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스스로 가두고, 스스로 무겁게 하는 것보다 열고, 비우는 것 속에서 삶은 무게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할 터이니 말이다. 

 

삶은 글이라는 말은 진리다. 말을 잃은 내 삶에 글 역시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 나가고 기존에 자기가 사용하던 언어를 해체해 나가면서(비단 이건 단순한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존의 사고의 해체와 새로운 사고의 습득이란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글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새롭게 시작해 새로운 말을 배울 수밖에. 그것도 수다스럽게. 이는 긍정적 변화이리라.     

 

 

여행과 도피-제자리에서 여행하기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 여행은 도피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여행을 손쉽게 도피로 바꿔 생각하기 쉽다. 일상에서의 탈출 혹은 일탈. 무언가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색다른 곳에서 맞는 해방감 따위로 등치시켜 버린다. 무언가로부터의 도피가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로 둔갑해 버리는. 물론 나에게도 결국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도피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 도피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도피는 끝나지 않는다. 공소시효 없는 도피. 여행이 자유, 해방일 수 있다면 그것은 도피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여행일 것이다. 나의 일년이 도피였을지 여행이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여행이 어디를 향할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건 자전거 위에서의 내 삶을 긍정하리라는 것.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천의 고원』에 나온 말을 인용하는 걸로 글을 마치도록 하자.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된 채로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에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 토인비가 시사하는 대로 이들 유목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라고. 전혀 이동하지 않음으로서, 이주하지 않음으로서, 또 하나의 매끈한 공간을 보유한 채 떠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정복하거나 죽을 때야 비로소 그곳을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의 여행, 이것이 모든 강렬함들의 이름이다. 설령 이러한 강렬함들이 오직 외연적으로만 전개되더라도 말이다. 사유하는 것, 그것은 여행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에 대한 신학-사유학적인 모델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즉, 이 두 종류의 여행을 구별해주는 것은 장소의 객관적인 질도, 운동의 측정 가능한 양도 아니고 또 오직 정신 속에만 들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며 공간화의 양태, 공간 속에서의 존재 방식 또는 공간에 대한 존재 방식이다. 매끈한 것 속에서 여행할 것인가 홈이 패인 것 속에서 여행할 것인가를 사고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매끈한 것 속에서 여행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생성이며, 그것도 아주 어렵고 불확실한 생성이다.”-<들뢰즈, 『천의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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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이제 봄을 알리는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네요. 다들 즐거운 봄을 맞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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