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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두와 석영이 | 정성을 바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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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영 작성일18-11-24 09:54 조회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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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바치는 기쁨

 

 

김석영

 

 

 

대관원의 청일점, 여색에 빠진 도련님?!

 보옥이와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매일 소소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거처가 한데 모여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옥의 거처인 ‘이홍원’은 영국부의 거대한 정원, ‘대관원’ 안에 위치해 있다. 대관원은 원춘귀비를 맞이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보옥의 누나인 원춘이 귀비가 되었는데, 귀비가 출궁을 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정원을 만든 것이다. 대관원은 문을 열면 푸른 산이 눈앞을 가리고, 소박한 초가집부터 기개 있는 저택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하루 종일 봐도 절반을 채 둘러보지 못할 정도의 규모다. 이러한 대관원은 원춘귀비가 떠난 후, 영국부의 여자아이들이 사는 공간으로 꾸려진다. 가모가 어떤 공간이든 비어있는 것 보단 사람이 살고 있어야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집들엔 영춘, 석춘, 대옥 등 집안의 ‘여자아이들’이 들어가 살게 된다.
 단, 보옥을 제외하고! 가모는 평소 보옥이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잘 알고, 또 보옥을 귀여워하는 터라 보옥도 대관원에서 함께 살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보옥은 대관원에서 혼자 남자로, 시녀들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보옥이는 대관원 생활이 체질에 딱이다.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이 아이를 보면 이 아이가 고와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또 저 아이를 보면 저 아이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기는 보옥이인데, 어련하겠는가. 때로 보옥은 누나들에게 입술의 연지를 한 번만 빨아먹게(?!) 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보옥의 행동거지(?)와 생활하는 모습은, 좀 이상해 보이긴 한다. 이 여자 저 여자 탐하는, 여색에 빠진 철부지 도련님으로 보이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보옥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면, 보옥을 그런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끼워 넣을 순 없다는 판단이 든다. 보옥이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사람을 대하느냐가 그런 사람들과는 천지 차이이기 때문.

정성을 바칠 기회

 어느 날, 보옥의 형수인 왕희봉의 시녀 ‘평아’가 집에서 봉변을 당했다. 희봉 부부의 싸움의 화풀이대상이 되어 주인에게 온갖 욕지거리와 매를 얻어맞은 것이다. 작은 사건이 아니었기에 평아는 잠시 동안 집에서 나와 대관원에서 쉬게 되었다. 보옥은 그런 평아를 잠시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준다. 옷이 더러워졌으니 깨끗한 옷을 내어주고, 잔뜩 울고 세수를 하고 난 평아에게 향기 좋고 색도 고운 연지를 내어주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이 때 보옥이의 속마음이다.

 보옥으로서는 평소 평아가 가련의 애첩이며 희봉의 심복으로 있으므로 쉽게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고 정성을 보일 수도 없어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 이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평아에게 정성을 바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이었다.

 ─조설근, 『홍루몽』 3권, 나남, 2014, p.100~102

 ‘시녀들에게 하인노릇 해주기’가 취미인 보옥은 평소에도 평아를 챙겨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평아는 엄연히 형의 애첩이자 그 집의 하녀였으므로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이번 기회에 그동안 못해줘서 아쉬웠던 것들을 실컷 해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단다! 보통 ‘잘해주고픈 마음’이 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 해 제멋대로 막 퍼붓기가 쉽다. 그런데 보옥은 평아의 상황을 고려해가며 그녀에게 ‘정성을 보일 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대단한 세심함이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정성을 바칠 기회’가 생겨 기뻐한다니, 참 독특한 기쁨 포인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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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정성을 바칠 기회’가 생겨 기뻐한다니, 참 독특한 기쁨 포인트가 아닌가?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마음

 여자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남자 이야기, 드라마에서도 많이 본다. 또 우리도 관심이 있는 상대에게 잘해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행동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보통 무언가를 해주면서, 그것을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기, 이 안에(?) 있고, 상대방을 챙겨주는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게 된다. 내가 ‘표현’을 했으니까! 혹은 상대의 호감을 얻게 되길 바라게 된다. 내가 뭔가를 ‘해줬’으니까! 누군가에게 잘해줄수록 기쁜 게 아니라 보상을 받고 싶어지고, 그게 없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 행동 자체가 내가 ‘함으로써 기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곤한 감정이 쌓이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좋은 감정’이라며 표현을 마구 퍼부어버린다. 그렇게까지 퍼붓는 이유는, 결국 단지 상대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보상심리만 쌓일 뿐, 기쁘지가 않다. 이런 걸 ‘잘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뻔뻔하다.
 반면 보옥이 평아에게 정성을 바칠 수 있게 되어 기뻐하는 것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다른가? 여기에는 어떤 소유욕이나 보상심리도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일을 하면서 나도 기쁘게 되는 것, 아니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여러 사람한테 품을 수 있다면, 그건 무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을까?! 보옥을 ‘여색에 빠진 이들’과는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특별히 보옥이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누구나 포용심이 생기고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진다. 그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보옥이의 이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그 마음이 소유욕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 자체를 기쁘게 생각하는 훈련부터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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